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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변명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인범을 도와!"
[해방일기] 1945년 10월 17일
이승만은 13세이던 1887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거의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다. 그리고 1895년에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했다. 3살 때부터 서울에서
김기협 역사학자
2010.10.19 09:45:00
맥아더-이승만-하지, 무슨 음모를 꾸몄을까?
[해방일기] 1945년 10월 15일
이승만은 귀국하는 길에 10월 10일에서 16일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맥아더의 극히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다. 도쿄에서 '가이진(外人) 쇼군'으로 군림하던 맥아더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은 따로 없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미국인 총독'으로 군림하
2010.10.15 09:04:00
박헌영 vs 김일성…둘로 나뉘는 공산주의자들
[해방일기]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군 2인자인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 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 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
2010.10.14 08:24:00
공용어가 '영어' 하나였던 그때 그 시절엔…
[해방일기] 1945년 10월 13일
미국 군정은 남한에서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았다. 미군정의 점령 통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미군 중에 아무리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한국인을 다스리는 정치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고 통역 제도를
2010.10.13 10:46:00
"박헌영 선생이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해방일기] 1945년 10월 12일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벽보를 본 사람들 중에는 박헌영(1900~1955?)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아는 사람들 중에도 왜 그 사람이 꼭 나타나서 지도해 줘야 하는
2010.10.12 08:14:00
한민당에 놀아나는 아놀드 군정장관
[해방일기] 1945년 10월 11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10일 기자 회견 발표문이 보도되었다. 핵심 부분만 발췌해 놓는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2010.10.11 08:16:00
박헌영과 김일성의 첫 만남
[해방일기] 1945년 10월 8일
3·1운동을 계기로 식민 지배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심화되면서 '독립'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발전했다. 그 전에는 대한제국의 복벽을 바라는 생각이 독립사상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이제 대한민국을 내걸며 '민국'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2010.10.08 09:23:00
세력 확대를 위한 임정의 안간힘, 하지만…
[해방일기] 1945년 10월 7일
예상보다 빠른 일본 항복 소식에 김구는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고 한다. <백범일지>(배경식 풀고 보탬, 너머북스 펴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고생하면서 참전을 준비
2010.10.07 09:35:00
藥도 되고 毒도 된 김구의 강인한 의지
[해방일기] 1945년 10월 6일
지난 금요일(1일)에 꺼냈던 중경 임시정부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오늘은 김구의 거취에 초점을 두고 해방 전후 임정의 상황을 설명하겠다. 임정이라 하면 누구나 바로 백범 김구를 떠올린다. 김구는 과연 상해 임정 설립 때부터 참여했고, 1923, 1926, 1935년, 임정이 위기에
2010.10.06 08:35:00
미군정,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문제였다
[해방일기] 1945년 10월 5일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공간'의 정치 상황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이 '분단'이다. 그러나 '점령'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실질적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점령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이 존중받는 상황이었다면 분단
2010.10.05 08:3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