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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탈꾼이다
[탈춤과 나] 22. 최재우의 탈춤
매년 3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이 시작되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을 좋아해서 대학에 가면 연극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였던 나는 1978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바로 옆에 탈춤반이라는 동아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전까지 탈춤이란 말을 전혀 듣도 보도 못하였던 나는 탈춤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 순
최재우 경북대 민속연구회 78학번
2021.09.30 07:13:05
황토,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탈춤과 나] 21. 홍경남의 탈춤
1976년 겨울, 공주사대 극회 ‘황토’는 고성오광대 전수관에 있었다. 남해안의 고성도 영하 4도를 밑돌던 그해는 수십 년 만의 추위로 서울과 중부지방은 영하 15도 가까운 혹한이 얼마 동안 계속되던 해였다. 연극을 하던 황토가 민속극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서클(동아리) 해체에서 재등록까지 수난을 겪어야 했던 연극 ‘성냥’(김지하의 ‘금관의 예
홍경남 공주사대 극회 황토 76학번
2021.09.27 07:34:26
탈춤아, 끝까지 나를 춤추게 하라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⑤ 끝
작은 지역에서 문예활동을 한다는 것은 문화환경이 더 열악하고 전문적 예술분야가 착근하기 어렵다. 원주도 그렇다. 여기서 원주민예총도 재건해보고 원주민미협도 창립했다. 문막 산골살이를 벗어나 2006~9년 원주시내 나가 보다 나은 문예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원주는 장일순 지학순 김지하 박재일 님이 유신독재와 맞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시작한 곳이고
김봉준 화가,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2021.09.23 07:45:51
탈춤과 함께 노동자가 사는 문화현장 속으로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④
우리는 졌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민주주의 소생과 가정이 생긴 내 생존을 동시에 고려하며 삶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예술인에겐 별로 뾰족한 수가 없다. 우선 내 고향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다시 민중 속으로 하방하며 문화운동도 하고 밥을 벌어보고 싶었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정치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민중들이 스스로 각성하는
2021.09.20 09:22:46
탈춤과 함께 반독재 민주전선에 서다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③
1984~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도 탈춤운동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관여한 것이니 빠뜨릴 수 없다. 나를 민문협 기획국장으로 추천한 선배를 짐작은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그간 걸어온 길에서 당연한 선택 같았다. 민문협에서 우선 로고부터 만들어 제공했고, 김도연 대표가 운영하는 '공동체'에서 <삶과 멋> 공저, <민중미
2021.09.17 08:12:05
"흥을 모두 포괄하는 '신명'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성이다"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②
여기까지가 197년대 탈춤부흥기에 보냈던 나의 문예공부 기간 이야기다. 왜 탈춤을 추게 되었는지를 내 청년기를 고백하며 설명했다. 탈춤은 내게 치유문화 이상으로 선물을 했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탈춤 공부 덕분에 감시가 심하니 조용히 유신시대 미술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비록 나에게는 2년동안 전담 마크하는 담당형사가 생겨서 나의
2021.09.13 07:20:58
상처꽃을 피우게 한 탈춤
[탈춤과 나] 20. 김봉준의 탈춤 ①
나는 어쩌다 탈춤을 추게 되었나? 자문부터 해본다. 미술대학을 들어가서 탈춤을 추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써클 등록을 하게 된 것은 '75년 가을학기였다. 내 청년기는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표를 정하고 탈춤반을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가입 서명지를 갖고 회원과 지교교수를 찾아다녔다. 이때 벌써 대학탈춤은 비정치적인 문화써클인 데도 학교 당국으로부터 불온
2021.09.09 09:46:54
탈춤과 함께 걸어오다
[탈춤과 나] 19. 형남수의 탈춤
어릴 적부터 에술쪽 기질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남 앞에 나서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노래부르는 거나 춤출 땐 다른 거 같다. 기억엔 없지만 유아시절 영화관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랐고 외국영화배우 이름도 줄줄 다 알았다는 이야기, 초등학교 때 라디오 동요부르기 출연을 위해 토요일마다 방송국을 방문했었던 거나, 배우지는
형남수 계명대 민속문화연구반 78학번
2021.09.06 09:14:15
'통기타 문화' 속에서 탈춤에 이끌리다
[탈춤과 나] 18. 박현경의 탈춤
무엇 하나 진득이 앉아 끝을 보고야 마는, 그런 성격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내가 어떻게 그리 시도 때도 없이 진종일 장구 장단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때는 1972년 봄 학기가 다 끝나가는 어느 날 문리대 연극부 박미해 선배의 제안에 백귀순, 이혜경 등 같은 과 친구들과 호기심 반, 재미삼아 서울대 탈춤패(민속가면극연구회)가 놀고 있다고
박현경 서초여성가족플라자 대표
2021.09.02 08:41:14
"황해도 봉산에 모여 봉산 탈춤 한판 벌이는 것이 꿈"
[탈춤과 나] 17. 김덕중의 탈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1학년 때인 1971년 겨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을 걷고 있던 중에 한 건물에서 장구소리가 나기에 그 소리를 따라갔다. 문 앞에 <봉산탈춤 강습회>라고 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료”라고도 써 있었나? 방을 채운 많은 여성들이 양손에는 한삼을 들고 내보기엔 매우 이상한 동작들을 하고 있었고 웬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김덕중 전 경기대학교 교수
2021.08.30 07:3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