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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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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175>

츠루미 순스케(鶴見俊輔) 선생

'베헤렝'(베트남에 평화를!)이라는 반전(反戰)단체를 이끌고 있는 교토(京都)대학 철학 교수인 츠루미 순스케(鶴見俊輔) 선생은 일본의 양심(良心)으로서 수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당대 희유(稀有)의 철학자요, 사상가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사인한 김지하 석방(釋放) 탄원서를 들고 츠루미 선생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요양원을 방문했다.

역시 남북회담 직전의 공론(公論)을 걱정한 정보부는 나와의 면회를 허용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자기가 오게 된 이유를 말하고 나자, 나는 그 무렵 외신기자(外信記者)들이 '콩글리시'라고 불렀던 나의 그 유명한 '코리안 잉글리쉬'로 이런 말을 했다.

"You can not help me, I can help your movement by my resistance!(당신은 나를 도울 수 없다. 내가 저항을 통해 당신들의 운동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츠루미 선생이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 구명 운동을 지속하던 긴 세월을 일관하여, 바로 이 '콩글리시' 두 마디를 반드시 연설이나 글에 앞세웠으니까! 요컨대 한국의 청년시인(靑年詩人)의 용기와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국제적 연대 의식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츠루미 선생이 뭐라 한들, 내가 뭐라고 변명하든 역시 좁은 마음의 소산이다.

그래서 재작년에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京都)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의 환영사에서 츠루미 선생이 이 두 마디를 다시 앞세우자 나는 답사(答辭) 앞마디에서 다음과 같이 그 말을 수정했다.

"나는 그 두 마디를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수정한 말은 영어로, 'Thank you very much' 입니다."

박수가 터졌다. 그것은 참으로 인간과 인간의 연대(連帶)였다. 계속해서 나는 츠루미 선생에게,

"저 창밖의 바다는 아름답다. 특히 안개 낀 바다는 더욱 아름답다. 그러나 바다 속에 사는 생물(生物)들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마찬가지로 안개가 걷힌 바다 위의 쓰레기들, 부표(浮漂)들도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마도 어느 날인가는 현재의 한국과 일본의 바다, 그 안개 낀 바다가 걷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그 추한 모습까지도 각오하고 우리는 바다에 접근해야 한다. 바다는 우리 존재의 고향이니까!"

츠루미 선생 일행은 그날 밤 가포 여관, 파도치는 물 소리가 바로 머리맡에서 들리는 여관에서 자고, 내가 한번 들러 가라고 권유한 원주에까지 가서 청강 선생과 지 주교님을 만나고 돌아갔으며, 그 뒤로 원주캠프와 츠루미 선생이 이끄는 교토 그룹 및 구명위원회(救命委員會)는 상시적인 연락망을 갖추어 하나의 국제적인 시민운동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지난해 4월에 만났을 때 선생은,

"일본(日本)은 경제적으로 망해야 정신적으로 살 수 있다. 향후 10년이면 일본은 비로소 대륙과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삶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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