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6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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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4>
촛불
중요한 것은 조용필의 태도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내게 그런 사실을 전화로 알린 것이 다른 사람 아닌 조용필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심지가 있는 아우였다. 한번은 자기 집에 가자 해서 한밤에 들러 부친을 뵈었을 때 대강을 짐작했다. 옛학문을 한 양반이었다. 뼈대가 있었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3>
나카가미 겐지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른바 진보주의자거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었다. 출신성분도 대강 중산층이요 츠루미(鶴見) 교수는 그중에도 귀족에다 학습원대학(學習院大學) 졸업자다. 세련되고 섬세하고 양식있는 사람들이었다.그런데 영 엉뚱한 작가가 한 사람 반도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2>
외국의 벗들
민족국가와 폐쇄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이미 가고 있다. '글로벌리제이션'이 일반화하는 시대다. 그렇다고 민족이나 지역이나 개인의 중요성이 소멸하는건 또 아니다. 민족담론이나 개인주의, 지역의 특수성 속에서 세계화와 지구화, 전인류화라는 거대 체계가 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1>
사상기행
운동이 장기화하면서 민족의 민중운동사 특히 동학혁명사에 대한 사회경제사학의 논문과 책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대부분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나의 불만은 굉장히 컸다. 도대체 동학혁명에 대한 사회경제사학의 접근자세부터가 문제였다. 아직 자기들의 사관도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60>
민중문학의 형식문제
나는 그 사이 산문집 몇 권과 애린 연작의 짧은 시 몇 편을 발표하고 몇 꼭지의 잡문을 잡지에다 썼을 뿐 그리 활발한 활동을 못했다. 그러던 차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내게 '민중문학의 형식문제'에 관해 명동성당에서 강연해 달라는 청을 해왔다. 나는 즉석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9>
두사람
술과 관련된 기억으로는 원주의 천하태평집이 잊히지 않고 찻집으로는 '청자다방'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내게 잊을 수 없는 서울의 여관이 한군데 내 기억 속에 둥지를 틀고 있으니 운현궁 뒤편 운니동의 '운당여관(雲塘旅館)'이다. 그 한옥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8>
바가본도
'바가본도'라는 찻집이 그 골목에 있었고, 그 골목이 끝나는 곳에 한 작업실이 있었다. 벽과 천장, 마룻바닥과 이젤, 종이와 옷들 위에까지 왼통 그림이었다. '바가본도'는 여자다. 약간 미치광이 여자다. 그 미치광이와 나는 가끔 소주를 사들고 수유리 쪽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7>
찬우물
서울엔 내 집이 없었다. 물론이지만 내가 편한 마음으로 묵을 친구집도 없었다. 다만 한군데 서울의 서북쪽 '찬 우물'에 점치는 후배 부부가 살고 있어 술취한 밤, 술깨는 새벽이면 문득 찾아가 서너 시간 잠자고 한술 얻어먹고는 또 다른 술자리를 찾아 떠나곤 했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6>
탑골
5 공 무렵 서울의 내 단골술집 '탑골'은 파고다공원 뒤에 있는 한 시커먼 골짜기다. 그 골짜기 저 안쪽에 흰 탑이 두 개 서 있다. 낮이나 밤이나 그곳에서 취했고 몇 해를 그곳에 드나들었으니 외상값이나 떼먹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탑 위에는 각기 하나의 비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55>
애린
애린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것은 물어 뭘하자는 것이었을까? 그무렵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리역(裡里驛) 앞에 '애린'이라는 카페가 있다고도 했다. 나와 가까웠던 어느 유명한 쌀롱의 여자주인은 애린은 카페제목이 제격이라고까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