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해가 오고 있지만, 사실 우리 서민들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연말을 맞아 발표되기 시작하는 정부와 민간경제연구소들의 내년도 경제전망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4~5%의 높은 수준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2010년 국내경제전망'에서 내년 경제성장률을 4.6%로 제시하였고, 삼성경제연구소는 4.3%, 한국개발연구원(KDI)은 5.5%로 전망했다. 기획재정부도 5% 안팎의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발표된 서민들의 생활, 삶의 질과 관련된 각종 지표들은 악화일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에 따르면,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3.2%나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전국 가구의 명목 근로소득은 작년의 같은 기간보다 0.3% 줄었고, 물가를 감안한 실질 근로소득은 작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2.3%나 줄었으며,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의 배율은 1.43배로 지난해 말(1.40배)보다 0.03배 더 높아져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최고치를 보이고 있다. 나라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성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서민가계의 실질적인 소득 증가는 없이 오히려 빚을 얻어 미래의 수입을 담보 잡히는 방식으로 민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 탓으로 서민가계의 소득이 줄어들자, 웬만하면 줄이지 않고 매년 늘어나던 교육비 지출액도 올해는 지난해보다 1.1%가 줄어들어 외환위기 때인 1998년 4분기(-2.6%)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내년에 우리 경제가 5% 성장한다고 해도 3%에 가까운 물가상승률과 올해의 소득감소분 등을 고려할 때, 국민들의 실질적인 살림살이의 개선은 고사하고, 경기회복의 곁불을 쪼일 수 있는 기회조차 얻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 12월 매 일요일마다 초를 하나씩 켜도록 돼 있는 크리스마스 화환.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불우이웃 돕기 운동이 활발해진다. 하지만 이런 반짝 행사가 춥고 배고픈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진짜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보편적 사회복지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을 키우는 게 필수적이다. ⓒ김영희 |
답답한 마음에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느닷없이 휘날리기 시작하는 눈발이 보인다. 다가올 해에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면, 우리나라도 복지국가가 되어 있는 상상을 해 본다.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무주택이라는 것만으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정부에서 제공하는 그런대로 살만한 공공주택을 한 달에 10~20만 원 정도의 저렴한 비용만 내면 평생 임대해서 살 수 있는 나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해 청혼을 하지 못하는 일은 과거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 되어 버린 나라, 아이를 출산하면 아기가 돌이 되기 전 1년 동안은 일터를 떠나 집에서 마음 놓고 쉴 수 있도록 보장되는 나라, 비싼 산후조리원 비용을 내지 않아도 집으로 산모 도우미가 찾아오는 나라, 국가와 사회가 양질의 공공보육과 보육비를 완전히 보장해 주는 나라, 한국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동수당을 매달 10만~20만 원 씩 받을 수 있는 나라.
초등학교와 중학교 뿐 아니라 고등학교까지 무상으로 교육이 보장되는 나라, 등록금과 교과서만이 무상이 아니라 급식비, 교재와 교구재비, 방과 후 교실 비용에 해마다 교복 비용까지 전부 국가에서 공급되어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가 준비물 비용을 달라고 문간에서 엄마와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중학교 교실부터 벌써 경쟁 상대인 친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기말고사 성적에 피를 말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 고등학교를 가지 않아도 대학 가는 데 별로 지장이 없는 나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도 언제든지 대학에 갈 수 있는 나라, 그래서 대학입시에 초등학생부터 고3학생의 엄마까지 모두가 매여 살지 않아도 되는 나라.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자녀와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러 가는 마누라를 보내고 외로움에 눈물짓는 기러기 아빠가 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대학 등록금 걱정에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아니라 24시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 취직 걱정에 스펙 맞추기를 위해 학원 다니느라 미팅은 물론 방학도 포기하고 다시 고3 같은 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나라, 3~5년 동안 재수를 하면서까지 대기업이나 공기업 직원, 공무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나라, 대기업보다 월급은 약간 작지만 4대 보험이 보장되고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중소기업에 취직해도 부모님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나라.
청년과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일자리 걱정 없는 나라, 전국의 대학에서 각종 신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해 내고,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벤처창업을 하여도 식구들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소득이 사회적으로 잘 보장되는 나라, 국민의 5대 불안(일자리, 보육과 교육, 의료, 노후, 주거)이 말끔히 녹아내리는 보편적 복지가 잘 실현되는 나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지국가의 삶'에 대한 상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 사이엔가 내리던 눈이 그쳐 버리고, 덩달아 나의 상상도 끝나 버린다.
아마 올해도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보면서 무심한 척 채널을 돌리거나, 육교나 지하도의 계단에 엎드려 구걸하는 추위에 차갑게 굳어가는 손을 보면서 100원 짜리 동전을 바구니에 던져 넣거나, 연말이면 의례적으로 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사랑의 열매나 크리스마스실을 구입하고, ARS 전화를 걸어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거리고 미안함을 무마하는 것으로 또 한 해를 보낼 것이다. 그러다가, 새벽의 조간신문을 펼쳐보면, 역시 아직은 그런 나라가 요원하겠다는 확인을 하게 되겠지만, 잠깐 스쳐가는 신기루 같은 꿈이라도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올해 12월은 조금 다르게 보내는 방법을 제안해 본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를 안내하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뉴스 끝자리에 나오는 불우이웃 돕기 명단 소개를 보면서, 길 가다 쇼 윈도우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볼 때마다 무심히 넘기지 말고, 이런 결심을 한번 해 보자. 복지국가라는 것이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선물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복지국가를 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진보적 정치세력에게 힘을 몰아주면 된다. 그들이 집권을 하거나 유력한 정치세력이 되도록 밀어주면 된다. 북유럽 복지국가들도 그렇게 해서 지금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된 것이다.
내년에는 잊지 않고 꼭 투표장에 가자는 결심을 새로 구입한 내년도 수첩과 다이어리에 표시해 보자. 이때는 혼자만 가지 말고, 이웃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가자. 모처럼 맞은 주말 아닌 휴일에 등산 가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투표는 했는지 점검하는 정도의 수고를 하도록 하자.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세대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 역동적 복지국가를 만들어 주는 일을 우리 손으로 해보자는 결심을 하면서 연말연시를 보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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