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가붕가레코드는 서울대 학내 동아리에서 출발한 독립 음반기획사(레이블)다. 그저 음악이 좋았던 사람들이 취미생활을 위해 차린 붕가붕가레코드는 이제 법인 등록을 마쳤고, 상근자까지 둘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회사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불안한 미래와 여전히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다. 이는 한국 독립 레이블의 공통된 고민이다.
모두가 안정을 찾을 때 이들은 불안한 꿈에 도전했다. 재미있는 삶을 영위하기란 쉽지 않았다. 멋진, 또는 치기어린 삶을 산다는 말을 들을 법한 붕가붕가레코드 사람들의 오늘은 안정과 꿈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감, 회피하고픈 현실과 맞닥뜨려야만 하는 오늘날 청년세대의 고민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마치 장기하와 얼굴들 최고의 히트 싱글 <싸구려 커피>가 20대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구술했듯이 말이다.
사인회가 열리기 직전 곰사장과 만났다. 인터뷰는 8일 오전 11시 홍대 인근 커피숍에서 진행됐다. 이하 인터뷰에서는 '독립음악'이라는 용어 대신 '인디음악'을 사용키로 했다. 한글 우선 표기 원칙이 맞지만 인디라는 단어는 이제 신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고유명사화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초에 대중지향적이었다."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이 회사에서 직급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맡은 역할을 표시할 뿐이다. ⓒ프레시안 |
'빡센 취미생활'의 시작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는 어떻게 탄생했나? 간단하게는 학내 음악동아리가 발전했다고 보면 될 듯한데, 구도를 보면 제법 복잡하게 느껴진다.
곰사장 : 붕가붕가레코드 탄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뺀드뺀드짠짠(이하 뺀짠)'이다. 서울대 학내 민중가요 동아리인 '메아리' 사람들 중 창작곡을 만들려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주도한 게 깜악귀와 슬프니(이상 눈뜨고 코베인)다. 뜻이 맞는 이들이 모여 컴필레이션 앨범(모음집) <뺀짠>을 2002년 만들었다. 나는 당시 총학생회 활동으로 학내 웹진인 <스누나우>에서 일하다 이들과 연이 닿았다. 보다보니 재미있겠다 싶어서 2집과 3집을 프로듀싱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영속적으로 하고 싶었다. 1~2학년 때 열심히 동아리 생활하고 4학년이 되면 졸업준비에 바쁜 식의 사이클을 따르기 싫었다. 그래서 레이블을 만들었다. 단 하루 만에 결정한 이름이 붕가붕가레코드다.
프레시안 : 자본금 마련이 쉽지 않았겠다. 첫 앨범 녹음은 어떻게 했나?
곰사장 : 본격적인 활동 계기는 뺀짠에 참여했던 멤버의 하나인 9(이후 튠테이블 무브먼트를 설립)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작업이다. 9는 뺀짠에서의 인연을 바탕으로 윤덕원(현 브로콜리 너마저), 생각의 여름(당시 치기프로젝트) 등을 끌어 모아 '관악청년포크협의회'를 구성했다. 9와 내가 붕가붕가레코드 공동 대표가 되면서 2005년 2월 첫 번째 앨범 <관악청년포크협의회 Vol.1>을 만들었다. 3개월 후에는 '청년실업' 음반이 나왔다.
제작비는 '뺀짠' 사업으로 얻은 80만 원 정도의 수익금이었다. 녹음은 9의 아파트에서 했는데, 마이크 하나에 컴퓨터 하나가 다였다. 팝스크린(앨범 녹음 과정서 보컬이 내는 자연스러운 숨소리 등을 막아주는 장치)이 없어 스타킹을 사다가 동그란 고리에 씌워서 사용할 정도였다.
프레시안 : 굳이 앨범을 제작하지 않아도 지인들을 상대로 얼마든지 자기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 레이블 경영이라는 '위험한 취미'까지 한 이유가 있나?
곰사장 : 우리들이 만든 노래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우리의 출발은 애초에 대중지향적이었다. 노래는 들을만해야 하고, 공연은 재미있어야 하고.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 관계자들을 보면 메아리 출신이 제법 된다. 그런데 붕가붕가레코드 사운드에서는 민중가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깜악귀와 슬프니는 물론 이민기(장기하와 얼굴들), 유가영(레나타 수어사이드), 윤덕원, 김잔디(이상 브로콜리 너마저), 이용창(레나타 수어사이드, 눈뜨고 코베인) 등이 모두 메아리 출신이다. 붕가붕가레코드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루시드 폴 또한 한 때 메아리에 몸을 담았다. 편집자.)
곰사장 : 눈뜨고 코베인은 멤버 5명 중 3명이 메아리 출신이고, 윤덕원도 거기 출신이다. 그렇지만 붕가붕가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성격을 민중가요로 이해하는 건 좀 무리다. 우리와 같이 작업한 메아리 기수들부터 공연 때 인디밴드의 노래를 자주 올렸다. 민중가요를 중시하던 기존 문화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만 우리가 추구하는 '재미있는 공연'이 한편으로는 메아리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메아리는 공연 때마다 극형식을 추구했다. 흔히들 '민중가요 노래패의 공연' 하면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텐데, 메아리는 재미있었다.
뭐, 결국 붕가붕가레코드는 '민중가요의 2000년대식 재발견'이라거나 혹은 전혀 상관없겠다. 우리가 기존 민중가요를 배격하는 건 아니다.
프레시안 : 당신을 비롯해 붕가붕가레코드 관계자들 상당수가 별명을 쓴다. 이런 행동이 야한 농담같은 레이블 이름과 맞물려 진중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실제 장기하와 얼굴들이나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등의 노래 가사는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곰사장 : 가명을 쓰는 이유는…. 당시 분위기가 있었다. 왜, 동아리 생활을 하다보면 이름 대신 별명을 많이 부르잖나. 그런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냥 뭐, 대부분 인디 뮤지션들도 다 별명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같은 경우는 레이블 대표가 되다 보니 지인들이 '고사장, 고사장'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이미지에 맞춰 곰사장이 됐다.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다른 직업에 대한 고민이 많다." ⓒ프레시안 |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두 마리 토끼 잡기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가 내건 목표가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다. 음악만으로 먹고 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음악을 포기하기 싫은 인디 음악인의 고민이 와닿는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지는 않았나?
곰사장 : 나만 예로 들면, 요즘도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공무원을 우습게 보는 건 절대 아닌데…, 음악활동과 공존 가능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도 공무원 생활을 하시면서 창작활동을 병행하셨다.
우리 레이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음악하는 친구들 중에서도 현재 상황(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을 하는 생활)에 만족하는 부류가 있고, 음악만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스태프들은 음악을 창작하는 이들이 아닌 만큼, 다른 직업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것 같다.
프레시안 : 예전 홍대신에서 활동하는 한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결국 부모님이 도와줄 능력이 있는 집 음악인만 계속 음악하고, 가난한 사람은 이 바닥을 뜬다'고. 동감하나?
곰사장 : 아직 우리가 생계 문제를 고민할 정도로 나이를 먹진 않았다. 다만 그런 점이 현실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부모님의 서포트를 받는 사람도 이 바닥에 분명히 있고, 한편으로는 집안사정이 어려워 돈을 벌려 떠나는 사람도 있다.
(장)기하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사정이 수월했고, 진수(나잠수, 붕가붕가레코드의 녹음 엔지니어)는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지만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나섰다. 난 부모님 사주에 따르면 그냥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산다더라(웃음).
프레시안 : 학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회사 관계자들 중 서울대 출신 비중이 어느 정도나 되나?
곰사장 : 8명 중 4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가 유명해지는데 학벌 프리미엄이 적용했다는 의견에 동의하나? 남들은 한편으로 '학벌 좋아서 쉽게 음악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회사 나름의 운영 원칙은 있다." ⓒ프레시안 |
우리가 회사를 홍대 바닥에 차린 지 1년이 지났다. 아직 홍대 커뮤니티에 깊숙이 어울리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학벌 프라이드 때문에 어울리지 않았던 게 아니다. 우리끼리 워낙 친하다보니 끼리끼리만 놀던 면이 있다.
(처음 서교동에 입주했던 붕가붕가레코드는 비싼 월세 때문에 사무실을 연남동으로 옮겼다. 편집자.)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 소속 뮤지션 외에 친한 이들은 누군가?
곰사장 : 크라잉넛 형들이 청년실업 당시부터 도움을 많이 줬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와도 친하다.
프레시안 :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경우 숱한 CF 섭외요청이 왔으나 거절했다. 공연만으로 충분히 버틸 만해서인가?
곰사장 : 장기하와 얼굴들이 성공한 건 사실이다. 그들이 벌어다 준 돈이 제법 큰 덩치의 인디레이블과 비교 가능할 정도다. 올해 매출은 작년의 50배가 넘는다. 물론 작년 매출이 워낙 미미했지만.
그런데 올해 6월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레이블 기획공연(붕가붕가레코드 소속 뮤지션들이 단체로 무대에 오르는 공연)이 갑자기 적자를 봤다. 이유가 여러 가지일 것이다. 팬들이 식상해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공연 제작비가 많이 늘어났다. 신종플루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요즘은 공연에서 패하고 음반은 적자만 안 내는 수준이다.
장기하의 경우 이통3사에서 CF요청이 다 들어왔다. 그런데 본인이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소모하길 원치 않았다. 사실 개런티 조건도 잘 안 맞았고(웃음). 술 광고라면 모르겠다.
프레시안 :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게 좋을 텐데?
곰사장 : 우리는 언론사에 홍보용 음반을 뿌리는 등의 보통의 음반사라면 어디나 할 일상적인 마케팅 업무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기초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을 최근 하고 있다.
다만 우리 회사 나름의 운영 원칙은 있다. 최대한 적게 쓴다는 것. 제작비를 최소화해서 음반을 내고, 거기서 난 수익을 나눠가지는 게 우리 방식이다. 초기 생산비를 줄여서 위험을 낮추는 거다.
▲8일 오후 종로 영풍문고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출판기념 사인회. 왼쪽부터 장기하, 곰사장, 깜악귀. ⓒ프레시안 |
장기하 이후… 잔치는 끝났다?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에는 상근자가 둘 있다. 책에서 이력서까지 쓰고 최초로 정식 입사한 송대현 씨에게 '5년 안에 연봉 2400만 원을 주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지금 그의 연봉은 어느 정도인가?
곰사장 :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1000만 원 초반대다. 5년 안에 장기하와 얼굴들의 2집이 나와서 또 대박을 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웃음).
프레시안 : '빡센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레이블을 만들었지만 이제 상근자도 생겼고 소속 뮤지션도 8팀이나 된다. '안 되면 말지 뭐'하고 그냥 접어버리기엔 이미 멀리 와버렸다.
곰사장 : 취미생활보다 '빡센'에 방점을 찍은 거다. 가벼운 취미생활처럼 하다 안 되면 바로 포기하겠다는 식은 아니었다.
프레시안 : 붕가붕가레코드가 이렇게 성공하리라 생각했나?
곰사장 : 처음 시작할 때는 10년은 너끈히 갈 줄 알았다. 2년째에 접어들면서는 '내년이면 끝나겠구나' 싶었다. 거의 1년 동안 활동이랄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운이 좋았다. 2007년 말에 브로콜리 너마저의 EP가 입소문을 갑자기 타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나왔다.
프레시안 :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은 얼마나 많이 팔렸나?
곰사장 : 싱글은 1만5000장 정도, 정규음반은 4만3000장 정도 나갔다. 내가 알기로는 언니네이발관 5집과 비슷한 수준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장기하와 얼굴들의 싱글앨범이 판매량 1위에 올라간 걸 보니 정말 뿌듯했다. 앨범 디자인도 30분 만에 뚝딱 해치운건데.
프레시안 : 장기하와 얼굴들의 성공은 한편으론 붕가붕가레코드에 숙제다. 장기하가 없는 붕가붕가레코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제2, 제3의 스타들을 발굴해야할텐데?
곰사장 : 상근자 둘 중 하나(강명진)는 매니지먼트, 다른 한 명(송대현)은 유통을 담당한다. 사실상 매니지먼트라는 게 장기하를 뒷받침하는 거고, 유통은 장기하 음반을 파는 거다. 이제 장기하와 얼굴들이 이번 달 말에 1집 활동을 중단하는데, 앞으로 포스트 장기하 시대를 준비해야한다. 이번 달 이후 붕가붕가레코드의 부제는 '잔치는 끝났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웃음)?
▲"'잔치는 끝났을까" ⓒ프레시안 |
곰사장 :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일단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키치적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치즈스테레오도 음반 녹음이 기대만큼 잘 되지 않았지만 뛰어난 자질을 가진 팀인데, 관심이 적어 안타깝다. 생각의 여름이란 친구도 괜찮다. 반응에 비해 음반이 덜 팔린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야 사람들이 알아서 관심을 가지니…(웃음).
술탄은 나잠수가 주축이고 윤덕원이 서브로 참여한다. 나머지는 전부 객원이다. 붕가붕가레코드의 모든 밴드 리더는 술탄에 참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있다. 전에 대중음악평론가 나도원 씨가 <프레시안>에 올린 아이돌에 대한 글을 봤는데, 아이돌에 술탄이 빠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웃음).
(술탄 오브 더 디스코는 '독립음악계 최초의 립싱크 댄스 그룹'을 내걸어 인디신에서 화제가 된 프로젝트성 밴드다. 장기하, 윤덕원, 곰사장 등 붕가붕가레코드의 주축들이 모두 참여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앞으로 준비한 이벤트와 음반은 어떤 게 있나?
곰사장 : 일단 11월말에 남산예술센터에서 6일 동안 열릴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마무리 공연이 가장 큰 이벤트다. 공연이 망하면 회사가 망하고, 잘 되도 남는 건 없다. 지난 1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적인 형식이 가미된 공연을 준비 중이다. 볼만할 것 같다.
차기 음반으로는, 눈뜨고 코베인의 3집이 내년 초순 우리 레이블에서 나온다. 아침과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정규음반도 준비 중이고, 아마도 이자람 밴드와도 정규음반 발매를 논의 중이다.
앞으로 수공업자체제작음반(CD라이터기로 직접 사람들이 음원을 공CD에 구워서 파는 것. 붕가붕가레코드 초기 음반은 이런 형태였다)은 문호를 활짝 열어서 아무나 다 받을 생각이다. 우리로서는 이제 사실 수공업음반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 어울리는 수공업음반은 무엇이냐'는 고민이 생겼고, 그 답으로 나온 게 '음반을 낼 사정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내도록 하자'는 거다. 일단 수공업음반을 내서 검증이 되면 정식으로 앨범을 내는 식이다. 아예 우리 스스로 수공업음반 전용 쇼핑몰을 만들어서 '이 음반들은 들으시면 후회할 수 있다'는 식으로 홍보할 생각이다.
프레시안 : 새로운 수익모델을 구상하진 않았나?
곰사장 : 다양한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식업, 디자인회사 등등. 붕가붕가레코드가 법인등록하면서 음반유통을 전담하는 쑥고개음반은 계열사로 빼낸 형태인데, 다른 아이디어도 여기 붙을 수 있겠지. 가장 현실적인 목표는 공연기획사를 차리는 거다.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브랜드로 하는.
프레시안 : 음악의 위기, 경제 위기의 시대다. 청년 창업도 쉽지 않고, 음악 해서 먹고 살기도 어렵다. 지난 시기 후회는 없나?
곰사장 : 브로콜리 너마저를 내보낸 것만 제외하면 후회 없다(웃음).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나올 때도 잘 될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사실 지금도 별로 없다(웃음).
나름대로 머리를 많이 썼다. 수공업음반제작도 알고 보면 정말 음반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치적인 이미지를 추구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포지션은 항상 '올 오어 낫싱' 중 가운데 어디쯤이다. 회사도 아니고 동아리도 아니고, 진지한 것도 아니고 키치적인 것도 아닌 식. 이처럼 모순적인 걸 우리가 좋아한다. 음악도 그런 느낌이 들면 좋겠고.
(붕가붕가레코드에서 배출한 최초의 스타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EP 1장을 끝으로 레이블을 옮겼다. 곰사장은 "당시는 도저히 회사가 그들을 도와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고 책에서 밝혔다. 지금은 절판된 붕가붕가레코드 시절 브로콜리 너마저의 EP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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