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사회적 거인, 그러나 책임은?
다른 한편, 모든 대학은 차세대 교육기관으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한 단계 높은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이를테면 기후변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양성평등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비정규직 고용에 가장 신중을 기해야 할 모범기관이 바로 대학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대학들이 이런 특별한 사회책임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몹시 의문이다.
2008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는 4년제 일반대학 174개, 전문대학 147개 등 총 405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국공립이 52개이고 나머지(353개)는 사립이다. 재적학생 수는 총356만 명. 일반대학에 194만 명, 전문대에 77만 명이다. 대학은 대규모 사용자이기도 하다. 7만3000명의 교원과 3만5000명의 직원을 상시 고용한다. 종합대학에는 최소한 1만 명 안팎의 학생들과 수백 명의 교수와 직원이 근무한다. 하나의 소도시에 버금갈 만큼 인적, 물적 규모가 큰 이런 대학들은 지역사회 경제에서 중요한 사용자이자 소비자로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는다.
대학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더 크다. 우수한 인적자원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며 지역사회에서 지성과 문화의 생산유통기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듯한 종합대학이 없으면 가용인재풀이 부족해서 지방정부의 발전가능성이 낮을 정도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니 대학마다 에너지 소비, 쓰레기 배출, 탄소배출이 만만치 않다. 당연히 환경책임도 크다.
적잖은 사립대학은 족벌경영 등 지배구조의 난맥상과 부패비리 전력으로 오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여파로 사학법인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뒤따랐음에도 사학법인은 여전히 지역토착권력의 가장 강고한 근거지 중 하나다. 한마디로 한국의 대학은 전국적, 지역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회적 거인으로서 당연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이 요구된다.
교육투자는 냉랭, 모험투자엔 열렬
하지만 대학은 대기업과 대조적으로 지금까지 사회적 책임 담론에서 사각지대로 남아있었다. 그 결과, 한국 대학들의 사회책임수준은 몹시 낮다. 무엇보다도 전임교수를 법정기준에 현저히 못 미치게 채용하고 나머지는 저임금 시간강사로 충당해온 교육현실이 이를 웅변한다. 연구실에 교수 2인을 배정할 정도로 연구실조차 부족한 대학이 있는가 하면 변변한 도서관 하나 갖추지 못한 허울뿐인 대학도 드물지 않다.
그래도 사립대학 전체로는 투자가능 적립금이 많이 쌓여있다. 지난 5일 서상기 국회의원이 교과부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전국 사립대학의 누적적립금은 총 6조3186억 원에 달한다. 용도별로는 건축적립금이 2조8808억 원(45.6%)으로 제일 많고 기타 적립금 2조2685억 원(35.9%)이 뒤를 이었다. 연구적립금은 5641억 원(8.9%), 장학적립금은 5074억 원(8%)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일찍부터 사립대학들은 주식이나 펀드 등 위험자산에 적립금 투자를 허용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교육부는 적립금 손실을 우려하여 반대하다 결국 대학경쟁력강화방안의 하나로 2007년 6월부터 적립금 투자자유화를 단행한다. 펀드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주가가 고점으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사립대학은 재테크에 몹시 부지런했다. 주식투자 허용 1년 반 만인 지난 2008년 말 현재 44개 사립대학들이 총 5천220억 원을 주식 등에 투자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사립대학들이 주식과 펀드 등 위험자산 투자를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1929년의 대공황을 방불케 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도래한다. 메릴린치가 도산하고 AIG가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는 사이 전 세계의 주가는 반토막 난다. 당시만 해도 워낙 비관적 전망이 지배적이라 사립대학들은 첫 모험투자에서 손실을 감수하고 환매한 경우가 많다.
교과부가 이상민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전국 대학별 주식펀드 및 파생상품 투자내역 및 손실액> 자료가 이런 사실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아주대, 선문대 등 12개 대학은 주식과 펀드에 1000억 원, 파생상품에 922억 원, 총 1922억 원을 투자해 총 357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현재 사립대학은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에 대한 특례규칙' 제33조에 따라 투자액의 50% 이상 손실이 났을 때만 손실내역을 공개한다. 위의 12개 대학은 50% 이상 손실이 나서 손실액을 공개한 경우지만, 그밖에도 위의 특례조항에 따라 손실액을 공개하지 않은 채 적립금 투자운영내역을 공개한 4년제 대학이 32개 더 있다. 이들 대학은 주식펀드에 2860억 원, 파생상품에 438억 원 등 총3298억 원을 위험자산에 투자했는데 구체적 손실내역은 공개하지 않았다.
투자규모로 볼 때 사립대학 중 모험투자의 왕은 대구가톨릭대학교다. 겁 없이 파생상품에 633억 원, 주식펀드에 148억 원 등 총 781억 원을 투자했다. 다음은 고려대로 주식펀드에만 732억 원을 투자했다. 3위는 주식펀드에 352억 원, 파생상품에 300억 원 등 총 651억 원을 위험자산 구매에 쓴 경남대. 성신여대도 주식펀드 477억 원 등 총 516억 원을 투자해서 4위에 올랐다. 연세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투자자였다. 264억 원을 주식펀드에만 투입했다.
위의 5220억 원 사학주식투자 통계에는 2,3년제 전문대학들의 위험자산 투자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4년제 대학 중에서도 보고누락대학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대학부문 전체의 주식펀드 등 고수익고위험 투자총액은 최소한 7000억 원에서 최대한 1조 원 정도에 달하지 않을까 추정된다.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총 6조3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학적립금 중 결과적으로 어느 만큼이 주식, 펀드 등 위험자산에 투자될지는 개별 사학기관의 내부의사결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주식투자해서 손실이 나면 결국 그 부담이 학생에게 등록금의 형태로 전가된다고 주장하며 투자규제를 촉구한다. 대학의 재정안정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과도한 손실 발생을 이유로 과거의 전면금지로 회귀할 것 같지는 않다.
▲ 고려대 학생들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서 '비정규 강사 해고 규탄대회'를 열고 학교 당국의 조속한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고려대는 주식펀드에만 732억 원을 투자했지만, 비정규 강사 고용에는 인색했다. ⓒ프레시안 |
대안은, 사회책임투자다
그렇다면 대학의 위험투자를 지금처럼 방치할 것인가? 아니다. 정답은 대학법인이 사회책임투자를 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사회책임투자란 환경책임 이행, 지배구조 개선, 사회가치 추구 등 사회책임 구현에 모범적이고 적극적인 기업과 금융기관을 상대로 하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사회책임생산 및 소비자의 사회책임소비와 함께 투자자의 사회책임투자는 사회적 거인들에 대해 법적 책임을 넘는 확대된 책임지평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회책임투자는 본래 특정종파의 윤리투자로 시작했다. 18세기 중반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노예무역과 결부된 일체의 투자금지를 결의하고 실천한 것을 효시로 친다. 미국개신교가 주류, 담배, 도박 관련업종에 투자하지 않는 것도 윤리투자의 일환이다. 이런 연유로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 사회책임투자의 선봉에 선 건 종교기관과 사학법인이었다. 특히 가톨릭 재단 대학들과 성공회재단 대학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사회책임투자가 특정종파의 윤리투자를 넘어 대학 등 기관투자가의 일반관행으로 확산된 것은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사회운동의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면서부터다. 1970년대에는 월남전용 네이팜탄 제조로 막대한 독점이익을 올리는 다우케미컬(Dow Chemical) 투자철회운동이 사회책임투자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는 남아공에서 막대한 인원을 고용하며 인종분리정권의 경제적 연명을 돕는 GM 등 남아공투자기업 투자철회운동이 사회책임투자운동을 이끌었다.
나의 유학시절인 1980년대 미국 사립대학에서는 재단이사회가 열릴 때마다 대학생들이 재단본부 건물 앞에 몰려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책임 시위를 벌였다. 재단이 보유한 남아공 진출기업 주식을 전량 처분하고 남아공에서 어떤 협력사업도 하지 말라고 외쳤다. 많은 대학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회책임을 이유로 한 투자철회운동은 지금까지도 주로 환경오염이나 인권침해로 물의를 빚은 글로벌기업을 대상으로 간간히 전개되고 있다.
사회책임투자원칙은 1990년대 들어 단발성 구호나 사회주주운동을 넘어 은행과 증권사 등 기관투자가들의 일상적 투자행태의 하나로 수용되고 있다. 대형투자회사들이 펀드를 구성할 때 재무실적 뿐 아니라 환경 등 비재무실적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사회책임투자의 주류화가 시작됐다. 선진각국에는 사회책임투자포럼(Social Investment Forum)이 결성돼 있으며 유엔도 지난 2003년 다국적 금융기관들의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내서 책임투자원칙(PRI, 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을 제정함으로써 사회책임투자의 주류화(mainstreaming)에 박차를 가했다.
첫 단추는, 제대로 된 보고
기관투자자건 개인투자가건 사회책임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업과 금융사가 사회책임이행에서 모범적이고 적극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투자자들은 먼저 투자대상 기업과 금융사의 사회책임 이행실적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특정기업의 사회책임 이행실적에 대한 투자자의 평가는 당해기업의 성실한 사회책임보고(reporting)를 전제한다.
실은, 사회책임보고가 모든 선순환의 시초다. 보고사항을 설정하고 충실하게 보고해야만 내부점검과 외부평가가 가능하고 이런 이행과정을 거쳐야만 보완과 개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쓸모있는 사회책임보고를 위해서는 중요사항이 빠짐없이 보고되어야 하고 보고기준은 변별력이 있어야 한다. 보고항목과 보고기준의 설정은 재무보고에서도 늘 문제가 되지만 계량화에 한계가 있는 비재무사항에 대한 보고의 경우 더 문제가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등 재무사항 보고양식이 이미 전세계적으로 표준화, 보편화된 것처럼 머지않아 비재무사항(non-financial) 보고양식도 표준화, 보편화될 게 틀림없다. 이미 국제표준협회(ISO)가 내년 상반기 중으로 사회책임 이행보고 국제표준(ISO26000)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회책임보고의 주류화가 ISO국제표준이 등장하리만큼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종교사학이 사회책임투자 모범 보여야"
세계 어디서나 사회책임투자에 가장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기관투자가는 공적연금과 대학법인이다. 국민의 돈을 책임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의 돈을 책임기업에 투자하는 것도 당연하다. 엄격히 말하자면 환경 등 비재무사항에 대한 본격검토는 투자위험을 관리하는 재무적 차원에서도 필수적이다. 금융위기 중에 구제금융을 받은 파산금융기관들이 건전우량 금융기관에 비해 사회책임평가에서 일관되게 뒤진다는 한겨레경제연구소의 연구결과가 말해주듯이 사회책임우량기업들은 경제위기국면에서 특히 강한 면모를 보인다.
한국의 사회책임투자는 아직도 맹아단계다. 신한은행를 위시해 몇몇 투자회사들이 사회책임투자펀드를 10여 개 선보였으나 실적이 저조하다. 다만 국민연금이 UN PRI에 가입하고 사회책임투자 비중을 늘리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다른 한 가지 전향적 변화는 지난 9월 증권거래소가 한국의 70개 사회책임우량기업으로 거래소사회책임투자지수(거래소SRI70)를 발표한 데 이어 생산성본부가 지난 10월 20일 미국의 다우존스와 손잡고 한국의 41개 사회책임우량기업으로 다우존스 지속가능성지수(DJSI 코리아)를 출범시켰다는 것이다. 포스코, LG전자, SK에너지 등 26개 대기업은 양 지수에 모두 편입된 현 단계의 대표적 사회책임우량기업으로서 사학법인이 1차적 투자대상으로 삼을만하다.
사회책임의 관점에서 대학이 신경 써야 할 투자대상은 주식이나 주식펀드만이 아니다. 정기예금 가입, 회사채 구매, 국공채펀드 가입에도 똑같이 사회책임이 따른다. 정기예금 등 금융거래를 할 때에도 어떤 은행이 사회책임이행수준이 높은지 알아보고 가급적 사회책임 우량은행에 거래계좌를 트는 것이 바람직하다. 회사채나 상업어음(CP)도 발행회사의 비재무적실적을 함께 고려해서 구입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공채도 지자체별로 사회책임이행수준을 알아보고 투자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돈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사회책임이 따른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사립대학들은 이제부터라도 사회책임투자원칙을 익히고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써 사회책임투자의 선봉에 서야 한다. 특별히 가톨릭대, 동국대, 원광대, 성공회대 등 종교사학들이 앞장서야 한다. 먼저 각 종교의 중앙기구가 저마다 특색 있는 사회책임투자 원칙과 지침을 수립해서 산하 대학과 기관이 따르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공통원칙 수립 및 모범사례 보급을 위해 종교간 사회책임투자포럼이 운영돼도 좋겠다. 사회책임투자운동진영도 향후 사학법인, 특히 종교사학을 사회책임투자의 선봉으로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학교법인용 사회책임투자펀드를 선보여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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