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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카리스마'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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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카리스마'의 허와 실

[의제27 '시선'] '박근혜 정치'가 '3김의 대정치'에 못 미치는 까닭

오늘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며칠 전 중앙일보의 정치인 리더십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는 신뢰도에서 1위, 영향력에서 2위를 기록했다. 최근 미디어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 공방 속에서 그가 보여준 행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적잖은 혼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율은 거의 영향 받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3김의 퇴장 이후 카리스마 정치의 시대 혹은 대정치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는 포스트 3김 시대 혹은 소정치의 시대에 거의 유일한 카리스마 정치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현재 유일하게 열렬한 지지자 부대를 거느리고, 선거에 바람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대구에서 보궐선거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입문 당시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주목받았다. 무엇보다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 시름하던 서민들 사이에 박정희 신드롬이 급격히 확산되어 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바로 그런 여러 가지 후광 덕에 그는 정계입문에서부터 상당히 큰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잘해야 지지율 10% 아래 언저리를 한참 맴도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내에서 이회창 총재의 강력한 후광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그가 200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이회창 총재에게 반기를 들고 탈당하여 새 정당을 창당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어설픔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사건은 권력 1인자의 질서에 결코 순응하지 못하는 그의 내면을 드러내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역량이 권력의지에 미치지 못할 때 그가 겪는 갈등과 처신의 단면을 보여주는 계기였다.
ⓒ연합

박근혜의 신화는 '노무현 패러다임'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04년 탄핵사태 직후 한나라당이 전무후무한 위기를 맞은 가운데, 당대표를 맡은 그는 비교적 신속한 결단력을 발휘하며 1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을 121석으로 지켜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하나같이 탄핵사태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꼴통 짓을 하고 있을 때, 박근혜 대표는 여러 차례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고, 당무를 천막당사로 옮기는 등 신속하고 과단성 있게 몸을 낮춤으로써 국민들의 뇌리에 꽤 신선한 이미지로 박혔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역시도 한나라당의 예상 밖 선방이 전적으로 박근혜의 지도력 덕분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총선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력은 한나라당을 궤멸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국민들은 탄핵사태를 일으킨 한나라당에 분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탄핵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국민들은 일시에 폭발한 분노를 삭이고 일상의 패턴으로 돌아갈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와 함께 총선일이 다가오면서 보수적 지지층은 반격할 채비를 하며 서서히 결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 걸린 사람이 바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는데, 총선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가 노인폄훼 발언 시비에 걸려든 것이다. 그 바람에 지지율 격차가 급격히 좁아지고 선거판세가 역전될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정동영의 노인관련 발언은 그 내용이 노인폄훼라고 볼 수도 없는 수준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적 역관계의 흐름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결국 요지는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선방이 기본적으로는 상황적 흐름의 반영이었고, 박근혜는 여기에서 흐름을 잘 탔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때 한나라당에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대중적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선거양상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박근혜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탄력을 받게 된 계기는 당대표 시절 각종 재·보선에서 40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달성하면서였다. 그는 재·보선 불패를 통해 자신의 위력을 확인시키면서 당내 입지를 탄탄하게 굳히기 시작하였다. 그가 재·보선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3김 퇴장 이후 정치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카리스마를 통해 동원할 수 있는 표수는 3김에 비하면 현격하게 적을 것이지만, 비슷한 유형의 경쟁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유권자의 단 몇 퍼센트만 동원할 수 있어도 선거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386정치인들의 잦은 정치적 실책과 실언은 박근혜 대표에게 엄청난 반사이익을 가져다주었다. 386정치인들이 주도한 국가보안법폐지를 비롯한 4대 개혁입법 추진에 맞서 박 대표는 끈질긴 지구전 끝에 입법 시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에는 일명 전투복을 입고 등장하여 노 대통령을 묵사발 내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뺨때리고 싶은 여론의 감정을 대리해 줌으로써 정치적 반사이익을 챙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항상 정치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2005년 사학법 개정에 반발하여 거리로 뛰쳐나가 퇴로를 끊고 4개월 여 이상 국회를 표류시키면서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사학법 개정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높았고, 장기간의 장외투쟁에 대한 여론의 비판적 압력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장외투쟁을 지속하였다. 가녀리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의 이미지는 아집과 독선의 이미지로 변질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줄 몰랐고, 자기가 벌린 일에 대해 결자해지를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당시 원내대표이던 이재오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한길과의 산상회담을 통해 거의 직권으로 표류 국회를 풂으로써 비로소 박근혜는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재오 전 의원이 "나와 박 전 대표는 삼시 세 판이다"고 격하성 발언을 한 것은 이때의 기억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무현 정권의 쇠락과 함께 박근혜의 정치무대는 주로 MB와의 관계 속으로 이동한다.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박근혜는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막판까지 MB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경선과정을 통해 그는 다소 속물적 이미지가 강해 보이는 MB와 대비시켜 자신이 바위처럼 단단하고, 원칙을 중요시 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깊게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경선에서 MB에게 패배한 이유는 그의 지지기반이 지형적으로 협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역으로 있는 유일한 카리스마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영남과 보수에 치우쳐 있는 지지기반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당내 지도부 등 과거 자신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경선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게임을 강요할 때에도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박근혜가 한나라당이라는 구조물을 폭파시킬지도 모른다는 실질적 공포감을 불러일으킬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1991년 YS와의 차이였다.

대통령후보 경선 패배 후 박근혜는 "아름다운 승복"을 선언하고 또 다시 권력 1인자의 그늘 밑으로 칩거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권력 1인자와의 갈등을 지속하였고, 정권에 협력을 거부하였다. MB정권이 그에게 다소 부당한 처우를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18대 총선을 앞두고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권력으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하게 핍박받고 있다는 모습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는 한나라당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런 모호한 태도로 인해 '친박연대'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사생아 정당이 출현하기도 했다.

박근혜의 모호한 위치는 상호 모순관계에 있는 그의 다중적 조건에서 기인하다. 박근혜 리더십의 핵심은 '카리스마'에 있다. 그러나 3김의 그것에 비하면 그의 카리스마는 제한적이다. 3김의 카리스마가 의미하는 핵심은 개인의 결단에 따라 독자적인 대중정당, 포괄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카리스마는 한나라당이라는 구조물에 플러스알파(+α)를 더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친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그는 3김 이상으로 유일적 자기중심성의 권력세계를 가정하고 행동하지만, 한나라당을 뛰쳐나가지 못한 채 권력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끊임없이 내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의 권력에 대한 비상한 집착과 제한적 카리스마 사이의 불일치는 당장 현재적으로 그와 구체적으로 경쟁하는 카리스마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은폐된다. 그런 조건으로 인해 그의 리더십은 신비롭고 강렬하게 증폭되고 그를 정치적 성공으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항상 끊임없는 자기모순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명박과 싸울 것인가, 어깨를 걸 것인가? 전면적으로 싸우기에는 부족하고, 어깨를 걸기에는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지금까지 그는 권력 1인자와 적절한 차별화와 거리두기를 통해 반사이익을 챙겨왔다. 아직은 이대로가 좋다. 적어도 MB가 힘 떨어질 때까지는 말이다. 아마도 내년 지방선거가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처신을 보수세력들이 더 이상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세력들의 압박을 기존의 포지션과 절충하려 해보았다. 그런데 미디어법 처리과정에서 보이듯이 그의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여론의 압박도 비슷한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다. 한나라당을 뛰쳐나가지 못할 바에는 국정의 책임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쇼업(show-up)식의 이벤트정치가 계속되는 것은 MB의 좋고 싫음에 상관없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MB의 국정운영에 대해 동조해주든지, 아니면 분명하게 비판해 주든지 책임지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베일 속에서 던지는 신비주의 어법만으로는 안 된다. 국민들은 박근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공적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너무 베일에 쌓여있다. 그에게 정치적 선택을 요구하는 촘촘한 압박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승패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직 그는 착점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가 착점을 형성하는 데 실패하면 2012년 대선은 매우 흥미로운 게임 양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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