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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운명 받아들여 모두의 존엄 지켜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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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운명 받아들여 모두의 존엄 지켜준 당신"

[弔辭] 노무현 대통령님, 고맙습니다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어리를 품었던 사람
모두가 이로움을 좇을 때 홀로 의로움을 따랐던 사람
시대가 짐 지운 운명을 거절하지 않고
자기 자신밖에는 가진 것 없이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던 사람
그가 떠났다

스무 길 아래 바위덩이 온 몸으로 때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껴안고
한 아내의 남편
딸 아들의 아버지
아이들의 할아버지
나라의 대통령
그 모두의 존엄을 지켜낸 남자
그를 가슴에 묻는다

내게는 영원히 대통령일
세상에 단 하나였던 사람

그 사람
노 무 현
 
ⓒ프레시안(일러스트=손문상)

지난 월요일 아침 서울역 분향소를 돌보던 유시민 선생이 짬을 내 몇 줄 적은 글입니다. 유 선생은 가신 님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린 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경호'보다 '심기 경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역할을 자신이 더 잘 맡아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을 당하고 그 심정이 얼마나 참혹할지….

지난 20일 유 선생을 찾아갔었습니다. 봉하 마을에 제가 할 만한 일이 있을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회고록을 비롯해 참여정부에 관한 서술 작업이 진행될 만큼 진행되고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 변화가 혹시 당초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라면 저 같은 사람이 맡을 만한 작업 방향은 없을지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태 진행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저처럼 참여정부는커녕 어떤 정치 활동에도 관여한 일 없던 '아웃사이더'가 참여정부의 의미를 서술하러 나설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통상 논의되어 온 것보다 더 깊고 큰 뜻을 역사를 공부한 제 눈으로 밝혀낼 여지도 있겠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돌이켜보면 그 생각도 대통령님의 '심기 경호'를 위한 것이었을 수 있네요. 그래요. 역사학도로서 정치평론에 나선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전술-전략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어 철학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필요에 어느 정치인보다 잘 부응해 주셨다는 점에서 대통령님을 존경하고요. 제가 봉하 마을에 간다면 그런 측면에서 대통령님의 살아오신 보람을 더 키우고 굳혀드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공 청문회로 모습을 나타내실 때부터 대통령님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정말로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 것은 2002년 선거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의 뛰어난 '전술'에 저는 탄복했습니다. 어떤 매너리즘에도 얽매이지 않고 청문회 소기의 목적을 최대한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님의 모습은 청문회 자체보다 자기 선전을 위해 가식적 핏대를 올리는 다른 의원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었지요.

'바보 노무현'의 전설을 만들어낸 부산에서의 거듭된 '자살 출마'를 보면서는 님의 탁월한 '전략'에 경탄했습니다. 그 전략이 설령 청와대 입성이란 놀라운 성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현상을 이끌어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한 청문회 활동도, 지역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부산 출마 고집도 모두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전술에 대한 탄복이나 전략에 대한 경탄을 넘어 님의 철학에 깊은 존경심을 품게 된 것은 2002년 선거 상황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님의 충성심을 보면서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공허한 관념에 머물러 있던 민주주의를 거침없는 실천의 단계로 체화한 님에게 어느 정치사상가에게 못지않은 존경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청와대를 나와 봉하 마을 가 계시는 소식을 들으면서는 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을 벗어나 '인간 노무현'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면서 너무 허망합니다. 제가 못난 탓입니다. 대통령이 되어 뜻을 펴게 되신 것을 한없이 기뻐하면서도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마음을 허락한 귀한 벗들, 유시민 선생과 이정우 교수조차 그들이 님을 가까이 모시는 몇 해 동안 일체 연락을 끊고 지냈지요. 어쩌다 님 같은 분 접하게 되면 공부에만 매달리는 자세가 흐트러지기라도 할까봐 지레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숨어 지내기를 잘했습니다. 제가 뒤늦게 정치사 방면에 눈을 돌리고 정치평론을 시도하게 된 것도 대통령님 덕분에 한국의 장래에 희망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님의 존재를 통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국민이 수없이 많이 있고, 저는 그중의 하나입니다. 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님의 큰 기운에 휘말려 제 공부하는 자세가 흐트러졌을 겁니다.

대통령님을 가까이 모시던 분들 모두 고생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수감된 분들만이 아닙니다. 님이 심어주고 키워줬던 희망의 좌절, 그것이 언론, 검찰, 그리고 정권의 핍박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아픔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님에게 받은 감동과 기쁨이 워낙 컸기 때문에 님이 받아들인 운명을 나란히 받아들이는 마음이기 때문이겠지요.

거리를 두고 바라보던 국민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같은 마음입니다. 님이 국회에서 질타하던 전직 대통령들의 비리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를 가지고도 실망감을 보인 것은 바로 님께서 우리 도덕 수준을 너무 높여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모두 벗어난 님의 모습 앞에 비로소 보살의 마음을 깨우치며 마음의 슬픔과 아픔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지금도 그렇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봉하 마을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가는 길은 차를 타고 가도 돌아오는 길은 천리 길 걸어올 생각을 하며 등산화까지 꺼내놓았습니다. 세상만사 제쳐놓고 님 생각에만 빠져 있고 싶었습니다. 고통에 몸을 던져서라도 슬픔을 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글 한 꼭지만 써놓는다는 것이…. 열여덟 시간이나 걸려 변변찮은 글 하나 겨우 짜낸 뒤 탈진 상태에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탐닉할 때가 아니라고. 책상 앞을 지키고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고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할 때라고. 생전에 님을 대면하지 못하면서도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이 행복했던 것처럼, 떠나신 뒤에도 님이 남기신 뜻을 홀로 앉아 새기는 것이 저 같은 책상물림의 본령이겠지요.

대통령님은 시대가 짐 지운 운명을 거절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두의 존엄을 지켜준 분입니다. 고맙습니다. 한없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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