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싫었죠. 지금 제 상황을 공개하는 거는 살짝 아니라고 보는데…."
아이는 이 말 한 마디만 던지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어떻게 대했느냐고 물어도, 심정이 어땠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엷은 미소만 띤 채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철거민의 아들입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철거민 실태를 취재하러 갔다가 만난 아이입니다.
'살짝'이 아니었나 봅니다. 지난 해 여름,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일 때 한 일간지가 인터넷 방송으로 이 아이의 생활실태를 내보낸 후 상처를 '많이' 받았나 봅니다.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꼬치꼬치 캐물어도 "속상했다"는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자기네 애 아냐?"라고 묻기에 애한테 뛰어가 물어봤지만 묵묵부답이더랍니다.
이 아이는 그 후 거처를 옮겼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외할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다세대 주택 2층이었습니다. 재개발·재건축으로 들어선 아파트엔 견줄 수 없는 서민 주택이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기거하는 철거민 숙소보다는 나은 집이었습니다.
#2
그 일간지는 형식상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이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고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그 일간지의 파급력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국내 유수의 일간지라곤 하지만 지면이 아니라 웹사이트에, 그것도 방송으로 올린 것이었습니다. 일부러 찾아야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철거민의 아들로, 못 사는 집 아이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3
연쇄살인 피의자 강모 씨의 공개된 얼굴을 보면서 다른 아이들을 떠올렸습니다. 강씨의 아들들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살인범의 아들'로 낙인찍힐 아이들입니다.
▲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강 모 씨 ⓒ뉴시스 |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공익이니 알권리니 하는 거창한 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태평하고 매정한 주장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강씨의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은 또래집단입니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집단입니다. 강씨의 아이들에게 닥칠지 모를 고통은 인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태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로 '인간의 존엄성'을 제한당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데 어찌 "성숙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어찌 "감내하라"고 다그칠 수 있을까요?
#4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율배반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두 신문은 사이버 모욕죄 제정을 옹호해온 곳입니다. '악플'이 야기하는 인격살인을 맹비판하면서 사이버 모욕죄 도입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곳입니다.
이랬던 두 신문이 '모욕'의 길을 앞장서 열었습니다. 강씨의 아이들에게 '살인범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여지를 활짝 열었습니다.
아닐까요? 그렇게 '모욕'의 여지를 만들어도 우리 사회가 성숙했기 때문에 실제로 '모욕'을 하는 일은 없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왜 굳이 사이버 모욕죄를 제정해야 할까요? 사회가 알아서 자제하고 자정할 텐데 굳이 사법 칼날을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사이버 모욕죄가 더 필요한 걸까요? 흉악범의 얼굴 공개는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부수적인 악영향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사이버 모욕죄를 제정해 더 강하게 단속하는 게 나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왜 굳이 감내하라고 다그치는 걸까요?
주관적 판단이지만 '살인범의 아들'이란 손가락질도 '모욕'에 해당한다고 확신하기에 반문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자세와 능력 이외의 다른 요인에 의해 판단되고 규정되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기에 묻는 겁니다.
PS. 오해할지 모르겠네요. 이런 반문이 사이버모욕죄 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까봐 걱정되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이버모욕죄 제정을 반대합니다. 모욕행위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처벌할 법적 근거가 있는데도 추가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모욕감을 느끼는 주체는 따로 있는데 국가가 대리 응징하려고 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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