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전체 수준에 비해 비교적 무난한 편이다. 그러나 개항이라는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일어난 일인지 보여주는 뚜렷한 시각이 없다는 점이 역시 이 책의 한계를 보여준다. 개항을 근·현대사의 출발점으로 볼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근대 진행의 흐름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열쇠다.
열쇠는 두 개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세계사적 의미고, 또 하나는 제국주의를 맞이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기술적 한계라 할 것이며, 따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역사학자의 참여 없이 만든 이상 이 정도 결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제국주의의 의미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이 자본주의 이념을 중심축으로 삼은 이상 제국주의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향후 서술의 기조를 밝히기 위해 요긴한 일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서세동점'이란 상투적 표현 아래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해체와 근대 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힘"이란 정도의 설명뿐이다.
근·현대사를 자본주의의 역사로 보는 뉴라이트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 문제를 이처럼 소홀히 한 것이 왜일까? 두 가지 이유가 생각된다. 하나는 유럽 근대 문명의 '우월성'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설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서세동점의 침략적 성격을 밝히는 것이 개화파-식민통치-대한민국의 축을 자본주의 발전의 주체로 찬양하는 향후 서술 방향과 모순될 것을 꺼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아래의 내 글에서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제국주의 침략의 성격을 밝히는 데, 그리고 이 침략에 처한 동아시아 3국의 상황을 비교해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산업혁명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있어서 획기적 변화였다. 이 변화의 문제점이 20세기 후반에 와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기 전까지 '근대'라는 시대를 지배한 세계관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산업혁명의 혁혁한 성과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의 핵심은 바로 '근대화'의 강요에 있었다. '대안 교과서'가 개항기 이후 근대화의 한계와 문제점을 일체 무시하고 근대화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비역사적 자세는 서세동점의 의미에 눈 감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상황 비교 중 한국과 일본의 차이에 필연적인 면보다 우연적인 면이 크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일본이 개항한 1854년에 비해 조선이 개항한 1876년에는 제국주의 침략이 크게 격화되어 있었다는 점, 따라서 일본에는 개항에서 유신까지의 14년 방황기 동안 외부의 노골적 침략이 없었던 반면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각축이 바로 뒤따랐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 사이에 민족성의 차이나 전통 성격의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본다.
과거의 실패를 반성함에 있어서 내 쪽 결함을 분명히 하는 데 애쓰는 것이 반성의 의미를 깊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침략자의 침략 정당화를 위한 논리에 지나치게 휘말려 온 상황은 상식 차원에서 한 차례 정리하는 것이 좋다. 아직도 뉴라이트는 '소농사회' 학설로 식민사관 정체성론의 뒤를 잇고 있지 않은가.
개항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뉴라이트는 근대화의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개화파의 노력을 부각시킨다.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국가 체제의 붕괴를 중시한다. 체제 붕괴라는 총체적 파국 속에서 개화파의 노력이 가지는 의미는 극히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근대화는 지금의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어차피 불가피한 진행 방향이었지만, 매판적 근대화와 주체적 근대화 사이의 차이는 엄연한 것이다. 근대화의 주체가 되기보다 근대화의 희생 대상이 되는 길을 바라본 자들까지 '근대화'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을 구분해 볼 줄 모른다면 지금의 세계화에서 휩쓸려 끌려가는 길과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
적어도 16세기까지 동아시아의 기술 수준이 대부분 분야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근년 밝혀져 왔다. 르네상스 3대 발명품이라 하여 유럽의 근대화를 뒷받침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제지술, 나침반과 화약이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은 17세기 이후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 시대를 열고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반면, 동아시아는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가 19세기에 유럽인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과 동아시아의 길이 엇갈린 까닭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유럽은 분열된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유럽이 원거리 무역을 발전시켰다는 점이 많이 지적되어왔다. 경쟁 때문에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으며, 원거리 무역 덕분에 산업 구조가 빠른 속도로 다각화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명나라와 조선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 유럽인은 대항해시대에 나섰다. 국가 간의 경쟁과 교회 간의 경쟁이 항해의 동력이었고, 물자 획득이 그 목적이었다. 당시 유럽인이 구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재물이었다.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뒤이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만든 해상제국은 점과 선, 즉 기지와 항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문명이 아주 낮은 수준에 있던 '신대륙'과 아프리카 중남부에서 유럽인들은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식민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경영을 통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한 상태가 오래 계속됨에 따라 생산, 제조와 교역을 모두 대형화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산업혁명이었다. 그 결과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식민지 수요가 생겨나, 높은 문명 수준과 안정된 정치 조직을 가진 지역까지 침략해 식민지로 만드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것이 서세동점이었다.
18세기에 식민지 경영의 선두 주자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두 나라는 아메리카에서 단순한 착취 기구를 넘어서는 신형 식민지를 경영하며 산업혁명을 추진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가 뒤처진 후 영국의 단독 선두 자리가 굳어졌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궤도에 오른 산업혁명은 19세기 동안 서유럽에서 시작해 중부유럽을 거쳐 러시아, 미국 등 유럽 주변부로 번져나갔다. 막차를 탄 일본까지 포함해 새로운 산업구조를 세운 나라들은 국민국가 체제를 만들고 자국 산업을 독점적으로 뒷받침할 식민지를 찾아 나섰다. 이들이 제국주의 열강이었다.
중국이 두 차례 중영전쟁(1840∼1842, 1857∼1860)을 겪고 일본이 개항하던(1854) 무렵까지만 해도 아직 식민지 쟁탈전이 그리 거세지 않은 상황이어서 열강의 개항 요구는 문자 그대로 통상 개방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질적 산업 구조에 노출된다는 것은 각국의 기존 체제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더욱이 이 요구를 동반한 무력 시위는 충격을 넘어서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두 차례 참패를 겪은 뒤에야 일으킨 양무(洋務)운동이 전쟁도 없이 개항한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에 비해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수십 년 후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 지적이 많이 있다. 이 대응 태세의 차이는 두 나라가 처해 있던 상황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청조 치하의 중국은 18세기 후반의 판도 확장을 통해 복합적 천하제국 체제를 막 완성해놓은 상황이었다. 그 체제에는 상공업 발전의 추세도 상당 수준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조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오랑캐의 하나로 여겨온 유럽인에게 군사적 패배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중국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기 어려웠다. 거듭된 패전 뒤 양무운동을 일으켰지만, 그 의미를 가능한 한 축소해서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달리 일본은 구체제의 한계가 이미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서양의 충격을 맞았다. 1840년대 초의 덴포(天保) 개혁에서 바쿠후의 위기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 이 개혁마저 실패로 돌아가 바쿠후의 지도력이 신뢰를 잃고 각지의 다이묘(大名)가 독자적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개항 요구가 닥쳤다.
따라서 개항은 쇄국의 주체였던 바쿠후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고, 개항을 국가 변혁의 계기로 삼으려는 개혁 세력의 주류가 형성되어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것이다. 그들이 중국 지식층과 반대로 개항의 의미를 가능한 한 크게 보려 한 관점은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도 내부 구조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던 상태에서 개항 요구를 맞았다는 점은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죽은 후 반세기 넘게 계속된 세도정치 아래 현실 변화가 제대로 수용되기는커녕 국가의 기본 질서가 와해되어온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았다(1863). 농민 중심의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집권한 대원군은 국가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대원군 개혁의 핵심은 서원 철폐와 조세 평준화였다. 양반 신분이 사회 지도층으로서 애초의 의미를 잃고 개인적 권세와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원의 위상도 사림의 근거지로서 학술과 질서의 중심이라는 원래 의미를 잃고 집단 이권의 아성으로 타락하는 추세가 있었다. 대원군은 양반과 서원의 특권을 제한함으로써 서민의 부담을 완화하는 동시에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북경조약(1860) 이후 중국에서 서양인들의 활동이 늘어남에 따라 조선을 엿보는 움직임도 몇 차례 있었다. 대원군이 그 대응으로 쇄국 정책을 편 것은 국가 체제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깥바람을 맞으면 나쁜 영향을 받기 쉽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서양인들도 조선 개항을 집요하게 요구할 절박한 동기가 없어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에 그치고 있는 동안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큰 위협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유신의 깃발을 올린 후 조선 진출의 필요가 떠올랐다. 유럽식 산업화를 추진하는 일본에게 대륙 진출은 배후지 획득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그 길목에 조선이 있었다.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에 직면한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무력시위를 통한 개항 압박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20년 전 미국에게 당한 함포 외교를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1875년 운요호사건 후의 조선 개항은 중국과 일본이 앞서 겪은 것과 마찬가지로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시대 상황에 따른 부득이한 일이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개항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 누가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이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조선은 국가 차원 대응의 초점을 잃었다. 조정은 대원군 집권 전과 같은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로 돌아갔다. 어떤 과제보다도 체제 유지를 더 앞세우는 정치였다. 대원군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효과적인 대응책을 내놓았으리라고 꼭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대원군 집권 기간 중 내정 개혁에서라도 보였던 목표 의식이 그의 실각 후로는 그나마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할 뿐이다.
개항 후에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개화파'라 칭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청나라 모델과 일본 모델로 갈라져 화합된 힘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웃 나라 모델을 따르는 것을 넘어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닥쳐 있는 과제를 '나의 일'로 투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세도정치는 체제 유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새로운 과제의 인식과 해결 노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개화파가 세도정치의 틀을 깨뜨리려 시도한 일이 한 번 있었다. 갑신정변(1884)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일본 모델을 따른 것일 뿐, 하나의 정파를 넘어서는 폭넓은 동의를 모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진행한 정변이었기 때문에 길게 버티지도 못했고 남긴 효과도 미미했다.
개항 이후 효과적인 대응책 없이 상당 기간 혼란을 겪은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일본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장 성공적으로 대응했다는 일본도 메이지유신의 방향을 잡는 데 개항 후 14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유신의 선봉으로 나서게 될 조슈(長州) 한(藩)은 개항 후 10년이 지난 1864년까지 외국 함선에 제멋대로 포격을 가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유신의 주체가 될 전국의 시시(志士)들은 바쿠후에 '양이(攘夷)'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바쿠후를 타도한 메이지유신은 '존왕(尊王)'을 앞세워 '양이'의 열정을 새 국가 건설의 과제로 끌어들이는 과정이었다.
개항기 조선의 비극은 일본에게 주어진 14년과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데 있었다. 1860년대의 일본에 대해서는 독점적 야욕을 가진 열강이 없었지만 1880년대의 조선에게는 일본이 있었다.
또한 일본에게는 '존왕'이라는 제3의 돌파구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대응책을 여러 주체가 시도해볼 여건이 일본에는 있었지만 조선에는 없었다는 데서 개항의 명암이 갈라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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