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연재를 시작하며 페리스코프를 다시 찾아주신 독자들, 반갑습니다.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를 끝내고 여러 분 곁을 떠난 지 벌써(?) 한 주일이나 되는군요. 사실은 여러 분 앞에 다시 나서기까지 사이가 훨씬 더 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상머리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뒤적이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이미 써 놓은 글을 독자들께 보여드리면 안 될까?" 바로 돌베개와 <프레시안>에 생각을 알렸습니다. 양쪽 다 동의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독자들 곁에 빨리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는 교과서포럼의 <대안 교과서>와 같은 지난 3월에 나왔습니다. 그 책을 쓸 때, 나는 뉴라이트에서 어떤 역사관을 내놓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책의 근·현대사 부분을 10회에 걸쳐 페리스코프에 옮겨 놓으면서, 각 회의 주제에 대한 뉴라이트 관점과 내 관점의 차이를 설명하려 합니다. 뉴라이트 얘기를 하던 중 저 자신이 보수주의자임을 밝혔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 역시 보수적 한국사관을 담은 책입니다. 기존 교과서와도 다르고, 뉴라이트 역사관과도 다른 이 관점을 근·현대사 범위에서 저 자신 다시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헌 글 게재를 허락해 준 <프레시안> 관계자들, 그리고 책 일부의 전재를 쾌히 승낙해 준 돌베개 관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의 보완으로 독자들께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합장. |
개항기 조선의 위기는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
<대안 교과서> 도입부(1부)는 2개 장으로 되어 있다. "1.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와 "2. 전통 사회의 구조와 유산"이다.
1장에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의 공부 내용을 △자유민주주의의 도입과 발전 △경제 성장의 의미 △국제 관계 속의 한국 △바람직한 통일의 모색, 네 가지로 제시했다. 과연 이 네 가지 주제를 어떤 각도에서 추구하는지는 앞으로 구체적 소재를 놓고 따져볼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어떤 주제가 제외되어 있는지 짚어 둔다.
한민족의 문화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 분야는 구색을 위해 붙여놓은 부속물로밖에 취급받지 않는다. 그나마 외래문화의 도입에 서술이 치중되어 있고 민족문화의 전통이라는 측면은 완전한 외면을 받고 있다.
뉴라이트 필진의 역사의식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식민지 정복자가 식민지 원주민 집단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런 시각으로는 전통시대와 근대 사이의 연속성을 충분히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개항기 이전의 상황을 개관한 2장에서는 3개 절 중 마지막 절에서 국제 관계를 다뤘을 뿐, 앞의 두 절은 '소농사회'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소농사회'는 뉴라이트 계열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하나의 학설로 제기한 것일 뿐, 역사학계에서 아직 본격적 검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농사회' 학설의 타당성을 앞장서서 논할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뉴라이트 외의 역사학자로부터 이 학설에 대한 반대만이 있을 뿐, 찬성이 없었다는 사실은 지적해야겠다. 또한 이 학설이 뉴라이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캐치업' 이론으로 해석하기에 편리하도록 끼어 맞춰진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정황도 지적해야겠다.
근대사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 상황을 최소한의 검증도 안 된 학설만으로 설명한 점에서 이 책이 교과서가 아니라 선전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도입부에서 확인해 놓은 덕분에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놀라 까무러칠 일을 면할 수 있었다.
내 서술로 눈을 돌려보자. 상공업 발달이라는 탈중세적 현상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농업국가의 경직성을 나는 조선 왕조 쇠퇴의 기본 원인으로 제시했다.
"기본 원인"이라 하는 것은 유일한 원인이란 뜻도 아니고, 궁극적 원인이란 뜻도 아니다. 하나의 역사 현상 속에는 여러 부문의 서로 연관된 요인들이 뒤얽혀 나타나고,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 중 어느 요인을 앞세워 내놓는가 하는 결정에는 그 현상의 전후 관계를 조명하기에 편리한 위치에 있는 요인이 어느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개항을 앞둔 조선의 상황을 설명함에 있어서 종래 유행한 관점에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동양적 원리의 필연적 패망을 말하는 정체성론. 지도층의 도덕성을 지탄하는 민족사관. 그리고 근년 많은 연구자들이 제기해 온 내재적 발전론.
나는 내재적 발전론에 마음이 끌리기는 하지만, 아직 일반인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연구가 숙성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차원에서 설명을 시도한 것이 농업국가의 경직성이다. 앞으로의 연구 진척에 따라 더 효과적인 서술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개항 이후에 닥칠 산업-경제 분야 변화의 배경으로 이것을 내놓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생각했다.
뉴라이트의 '소농사회' 학설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항해 나온 것이다. 아직까지 학계의 승인을 받은 범위가 좁을 뿐 아니라 너무 독단적인 내용이어서 앞으로도 별 발전의 소지가 없는 학설로 보인다. 그런 초보 단계의 가설로 교과서의 발판을 삼으려 하다니, '교과서'의 의미를 너무 우습게 보는 사람들 같다.
개항 이후 드러난 위기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이 문명의 위기가 아니라 왕조의 위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의 위기가 아니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내재적 발전론에 그래서 끌리는 것인데, 내가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는 아직도 명쾌하지 못한 구석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왕조국가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문명의 위기가 아니었다는 개연성을 제시하는 정도의 서술을 택한 것이다.
조선은 어떻게 기울어져 갔는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군 지휘관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 한 가지는 물자 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대규모 군대가 장기간 출동할 때,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일반 물자는 현지에서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화폐도 별로 쓰이지 않고 있어서 돈을 가지고도 물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왜란 전 조선의 경제 발전은 농업 생산력 향상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 생산력 향상에 힘입어 중소지주층이 양반관료층으로 성장하면서 정통적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조정에서 향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구축했다.
이 정연한 질서가 왜란으로 인해 깨졌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와 인구 이동만이 아니라 주둔 명군을 통한 화폐경제 학습 같은 새로운 경험들도 조선 사회의 유동성을 늘리는 데 작용했다.
왜란 후 조선의 경제 변화는 사회유동성을 더욱 늘리는 상업 발달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중국과의 사이에도 사(私)무역이 자라나 공(公)무역을 능가하게 되었고, 관영(官營)에 얽매여 있던 수공업도 시장을 상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밭에서도 상품작물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그에 종사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관청의 통제를 받던 조선 전기의 상업 제도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업 팽창이 17세기 이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 체제는 농본국가의 틀을 바꾸지 않았다. 모든 정책은 농업 위주로 논의되었고, 상업 활동의 확대는 억눌러야 할 병리적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위정자들은 인구 감소와 농민의 유망(流亡)을 늘 걱정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상업 활동으로의 이동이었다. 상업을 국부(國富)의 새로운 원천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상업 발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적극적 정책이 없었다.
현실 변화에 대응한 17~18세기 재정 정책으로 대동법과 균역법이 있었다. 둘 다 인두세(人頭稅)에서 토지세로 비중을 옮기는 방향이었다.
영세농의 부담을 줄여주면서 상업 발달에도 기여하는 정책들이었지만, 경제 구조의 변화를 재정 구조에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상업에서 발생한 재부는 국가 재정에 효과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토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 등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검은돈이 되어 정치구조를 왜곡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정조가 죽은 후 현실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상업 발달은 전국적 현상이었지만, 역시 서울과 그 주변지역의 변화가 제일 크고 빨랐다. 18세기 중엽 이후 근기(近畿)지역의 성호(星湖, 이익)학파와 서울의 북학파가 실학의 흐름에서 두드러졌던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농업 구조의 붕괴를 목도하던 성호학파 학자들은 농업 체제 회복에 개혁의 일차적 목표를 두었고, 상업 발달을 가까이서 체험하던 북학파 학자들은 능동적 상업 진흥 정책의 필요를 절감했다.
성호학파의 중농정책과 북학파의 중상정책 사이에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었지만, 진취적인 정조의 조정에서는 함께 논의되어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될 기회를 누렸다. 1791년과 1794년 시행된 통공(通工) 정책은 제도권 상인의 특권을 줄임으로써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농업국가의 기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중상정책을 서서히 도입하는 방향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은 후 현실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체의 노력이 조정에서 추방되었다. 왕실 외척 등 좁은 범위 권문세가에서 권력을 독과점하는 세도정치의 양상으로 접어들면서 조정의 논의가 공허한 명분론으로 좁혀졌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 안보상의 불안은 정국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계속 확대되는 상공업의 이권은 정경유착 현상을 부채질해, 정권을 지탱하면서 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상공업의 대부분은 국가에 파악되지 않는 음성적 경제 활동이 되었다"
생산물의 교환은 모든 문명의 기본 현상이다. 교환 활동은 몇 가지 양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처럼 선물과 증여의 형태로 이뤄지는 자발적 교환양식, 약탈과 분배를 통해 이뤄지는 강제적 교환양식, 시장에서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상업적 교환양식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전반기 조선과 같은 농업사회에서는 국가의 강제적 교환양식과 민간의 자발적 교환양식이 어울려 경제의 틀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업적 교환양식의 비중이 커졌다. 태평한 세월이 인구를 증가시켰고, 인구 증가가 산업다각화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상업적 교환양식 증가의 의미를 무시했다. 국가가 수행하는 강제적 교환양식에 지장을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상업적 교환양식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지도 않고 국가정의 수입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국가가 파악하는 경제활동은 거의 농업생산뿐이었다. 상공업의 대부분은 국가에 파악되지 않는 음성적 경제활동이 되었다. 이 음성적 경제활동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던 터에 왜란과 호란이라는 외부의 충격을 받자 경제 구조가 뒤바뀌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한 가지 측면이 농업 인구의 감소였다. 종래의 노동집약적 경작방법 대신 노동력 대비 생산성이 높은 기술과 농법이 개발되고 채택되면서 1인당 경작 면적이 커지고 상당수 농민이 다른 경제 활동으로 빠져나갔다. 인두세에서 토지세로 방향을 바꾼 조세 개혁은 이 변화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라 할 것이다.
농업 인구 감소의 뒷면에는 상공업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 상공업을 국가경제의 틀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 17-18세기 조선에 닥쳐 있던 최대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향으로는 정조의 통공 정책 외에 뚜렷이 보이는 정책적 노력이 없었다.
조선의 경제 구조 속에서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상공업의 비중이 늘어나는 동안 국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농업국가 체제에만 매달려 있었다. 때문에 상공업에서 발생한 재부는 국가재정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검은돈이 되어 국가질서를 와해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에 성행한 매관매직도, 양반 인구비율의 급격한 증가도 모두 이 검은돈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임금을 대신하는 목민관이 아니라 권력자를 대행하는 사업자"
조선 국가 체제의 기반이었던 양반관료층은 19세기 들어 와해상태에 빠졌다. 인구의 절반을 넘게 된 양반층은 조세 회피의 수단일 뿐, 사회지도층으로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정조 때 박지원의 글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제 또한 관료 인력 수요의 열 배를 합격시키는 학위 인플레이션 속에 등용문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수없이 적체되어 있는 자격자 중 누구에게 어떤 자리를 주느냐가 권력자의 자의에 맡겨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관 자리를 놓고 매관매직이 성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향촌에 뿌리박은 사림의 정치적 의미가 사라졌으므로 수령들은 공론의 견제 없이 이권만을 목표로 마음껏 뛸 수 있었다.
'별장(別將)'이란 원래 무관 관직 이름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관변의 이권을 도급받는 사업자들에게도 이 칭호가 주어졌다. 사행을 따라가는 무역상 두목들을 '무역별장'이라 불렀고, 은점(銀店) 등 광산 경영을 도급받는 별장들도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지방관도 마치 별장처럼 고을의 이권을 도급받아 뇌물로 자리를 얻고 상납으로 자리를 지켰으니, 임금을 대신하는 목민관(牧民官)이 아니라 권력자를 대행하는 사업자가 된 것이었다.
총체적 위기가 분명해진 상황 앞에 조선 조정에서 고작 대응책이라고 매달려 있던 것이 3정(三政), 즉 조세 제도를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농업 인구의 감소에 따른 세입 축소의 위협은 진행되어 온 변화의 한 작은 갈래일 뿐이었다. 경제 구조 속에서 비중이 크게 줄어들어 있던 농업 분야에만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으려니 각종 모순이 깊어지기만 하고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학술계에서는 원리에만 매달린 명분론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자는 실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경제 구조를 비롯한 변화에 적응할 필요에 자극받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국가 정치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왜란 이후 사회경제 조건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왕조는 19세기 초에 이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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