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은하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행성의 종족들 또한 대뇌피질은 고목나무에 쇠털 꽂히듯 흔적만 있고 해마(hippocampus)는 손상을 입었으며 측두엽과 변연계를 잇는 신경 및 연수만 이상 발달하여 6일의 마지막 날인 7일째가 되면 질 좋은 겉옷을 몸에 감은 암수들이 모종의 장소에 집결하여 두 손을 위로 쳐들고 눈물 콧물 침 등 체액을 흘리며 간질발작 하듯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어가며 고함을 지르는 행동을 반복한다.
특히 정치와 재벌계급은 항성이 뜨는 대낮에는 서로 공격하고 비판하는 척 하다 하나밖에 없는 달이라는 위성이 뜨는 어두운 밤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끼리끼리 알콜 시음장에 들어간다. 이곳은 적당히 작은 체구의 암컷 노예들이 화폐를 받고 알몸으로 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치하는 휴머노이드들 뿐만 아니다. 권력과 막대한 금전을 지닌 상류계급들은 서로 결탁하여 영원한 힘을 얻어 영생하기 위해 결속을 다짐하는 파티를 밤낮으로 열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매우 기괴하고 특징적인 것은 이 행성의 종족들이 측두엽만 터무니없이 이상 발달한 탓에 일찍부터 실체가 불분명한 신화를 가지고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가진 것 없는 계층을 단죄하고 노예화 하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끝없이 광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 중 화폐를 많이 모은 자들은 화폐 권력자가 되어 사체 부활교라는 교육재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암흑행성에서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이 행성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종교교육재단은 거대한 힘을 지니고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갖은 횡포와 장애인 차별 등을 일삼고 있다. 특히 여근곡은 한 때 '절름발이'라는 차별발언으로 불렸던 지체장애인은 동종으로 분류하고 '귀먹쟁이'라고 불렸던 청각장애인만 하류층으로 취급하여 '월급도둑놈'으로 여기며 학대하였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행성의 교육재단 중 하나인 '여근곡'에서 진보정치권력과 종교교육재단의 비리 폭풍에 강타당해 사막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비리폭풍은 복합적인 사안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 행성의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권력형 부조리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원래 나는 이 행성의 계급구조 중 최하층민이었으나 온갖 역경을 딛고 상류층의 '딱가리' 계급인 교수가 되었다. '딱가리' 일지라도 엄연한 상류층 행세를 할 수 있는 신분 증명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조금 으시대고, 조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수직에서 잘리고 말았다. 진짜 상류층이었던 여근곡 교육재단의 권력자에게 손가락의 지문이 희미해지도록 열심히 비비며 아부를 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분견(糞犬)의 꼬랑지를 잘라 내 미추뼈에 붙이고 살랑살랑 흔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미움을 산 것이 원인이었다.
상류층에서 다시 하층민 계급으로 떨어진 뒤 나는 자신이 최하층 계급인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구화(들리지 않지만 말을 할 수 있는)를 할 수 있는 선천성 청각장애인으로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고아로 성장하여 하층계급인 '공돌이' 생활을 하며 들리지 않아 대답을 안 한다는 핑계로 그야말로 '존나게' 얻어터지며 살아왔다. 나는 하류층을 벗어나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악전고투 하던 중 진로를 틀어 미대를 갔고, 41세에 여근곡 전임교수가 된 후 2007년 2월 28일 자로 해직되었다.
결혼한 후 아내가 보청기를 구입해주어 이후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녔던 나는 말투가 약간 어눌하여 일반인, 특히 학생들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교수'로 인식했다.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알아듣지 못해 바짝 다가가 "응? 무슨 말인가?"하며 되물어 일부 소수의 창의적인(?) 학생들의 짜증을 유발시키는 장애인 선생이었다.
다른 동료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이야기 하다 한바탕 웃으면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왜 웃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거의 항상 "교수님,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끼리 그냥 한 얘기"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고 심지어 어눌한 말투를 흉내 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풍자 만평 그리는 시간에는 귀가 잘 안 들리는 나를 그려놓고 말풍선 속에 "모라고? 잘 안 들려?" 라고 귀에 손을 대고 말하는 나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듯 표정 관리(?)를 했지만 마음은 항상 우울하고 배척당한 듯 좋지 못했다.
그러나 상류층 '딱가리'일지라도 교수 계급이었기 때문에 귀가하여 마누라와 자식에게 간혹 으시댄 탓에 아들 녀석은 장래 교수가 될 꿈을 갖기도 했다. 지금은 교수보다 청소부나 요리사가 될까 고민 중이지만.
선천적으로 청각에 이상이 있던 나는 여섯 살 무렵까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의 공통적인 증상 중의 하나인 '언어장애'였지만 다행히 경증에 그쳐 말(口話)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잘 들리지 않거나 이상한(?) 말투는 고칠 수 없었다. 청강대 신임 교수 최종 면접에서 이사장은 말투가 원래 그럽니까? 라고 묻기도 했는데 이것들이 사실은 청각장애인의 특징 중 하나였다.
우주력 2001년 나는 드디어 활동사진 만화과에 종속된 만화창작전공을 만화과로 독립시키고 초대 만화과 학과장이 되었다. 상류층 딱가리 계급 중에도 약간 높은 계층이 된 것이다. 그러나 "1"을 "7"로 알아듣거나 다른 학과장의 메모를 보고 받아쓰기를 하던 나를 상류층에서는 '월급도둑'으로 보았던지 그 해 몇 명의 인사를 만화과 교수로 채용했는데 모두 공개강의와 정식면접도 없었다. 또한 부적법자 거의 모두 행성만화연대라는 진보만화미술정치단체 회원들이었다. 이 단체는 암흑행성의 모든 대학에 자기 조직 회원을 교수로 앉히는 것이 암묵적인 목적이었다.
이런 부적법한 교수 채용에 항의하자 상류층은 암흑행성의 공기에 익숙한 휴머노이드가 있는 그들의 본부로 나를 자주 소환하여 윽박질렀다. 상류층의 대리인이자 '딱가리' 관리자인 휴머노이드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으르렁거렸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천박한 하류층 계급이 어떻게 교수를 할 수 있느냐? 다른 대학에 지원서를 냈다니 이참에 교수질 그만두고 나가서 그림쟁이나 하라!"
"이 곳에도 귀가 잘 안 들리는 하류인이 하나 있는데 답답하더라. 조만간 좌천시킬 생각이다."
또 다른 관리자인 흠차대신 대두 골초(大頭 骨草) 휴머노이드는, "창조주께서 학과장인 안교수가 비록 귀가 잘 안 들리지만 지체장애인 교수도 운전을 하는데 학과장이 기동성이 없으면 안 되니 운전면허를 따야한다고 천명하셨다, 이 학기가 끝나기 전에 비행선 면허를 따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학교를 떠나지 않고 비행선 면허조차 따지 않는 등 말을 듣지 않자 본격적으로 산소공급을 서서히 중단하며 이산화탄소를 강제로 마시게 하는 등 고통을 주더니 마침내 다음 해 전격적으로 업적평가 점수를 전 교수 중 '꼴등'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해 신입 교수가 몇 명 있었는데도 고참인 나는 '꼴찌'가 된 것이다.
2008년 4월에 발효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장차법)'에 따르면 이런 비열한 행위들은 청각장애인에 대한 제한, 배제 등의 차별행위로써 준 차별행위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 휴머노이드들은 나를 아무렇지 않게 이런 식으로 탄압을 했다.
그런 후 우주력 2005년 불법적으로 강의전담이란 비정규직으로 쫓아냈다. 이유는 업적평가 점수가 꼴찌를 달렸고 '인화단결'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인화단결'이란 이 행성을 한 때 지배했던 군벌시대에 횡행하던 지배체제 표어 중 하나였다.
참고로 최하류 노예인 장애인 계급 중 청각장애인은 지구라는 지옥행성에서 가장 많은 차별을 당한다. 지체 장애인은 목발이나 휠체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곧바로 장애인이라는 것을 식별 할 수 있지만 청각장애인은 멀쩡한 외모 때문에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나 단 한 시간이나 10분 정도라도 대화를 하다보면 금방 식별할 수 있는 것도 청각장애인의 특성이다.
그런데 암흑행성의 여근곡 재단과 진보만화미술정치단체 회원들인 학과 교수들은 내가 해직된 후 '청각장애인'이라는 보도기사를 보고 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내가 여근곡 교육재단에서 재직 중 일어난 사건개요로서 이 행성의 문장으로 풀어 쓴 것이다.
△ 사건 개요 - 1999년 9월 1일 경기도 이천 소재 여근곡 무뇌아산업 애니메이션과 전임강사로 임용, 학교 측은 전임강사'대우'로 임명장 줌(6개월) - 2001년 3월 만화창작과 초대 학과장을 역임하고 2005년 3월부터 강의전담으로 강등된 후 2007년 3월 강의전담직 거부하여 해직. - 2007년 3월 해직된 후 2007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 현재 심리 진행 중. -여근곡에 재직 중인 7 여년 동안 각종 압력과 비인도적인 인권유린 및 인권침해와 차별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본인을 배제한 뒤 많은 교수채용 부정이 자행됨. -2008년 1월 10일 행정소송 1심 승소. 곧이어 2심도 승소함. 이 결정으로 명예를 회복했으나 상류층은 곧 대법원에 항고함. △ 보청기 사건 2001년 탐라 세미나 발표 시 보청기 약이 떨어져 학장과 교수들 앞에서 보청기를 빼고 귀가 전혀 안 들리니 질문을 삼가달라고 양해를 구함. 이 사건으로 여근곡의 많은 교수들이 본인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나 여근곡 측은 해직 후 신문보도로 알게 되었다고 주장함. △ 2002년 2월 부학장과 기획실장이 귀가 먹었으니 학교를 나가라는 발언을 함. 이때 다른 대학에 이력서를 냈다며 학과장도 사퇴 당함. -전년도에 임용절차를 무시하고 2명의 부적절 교수채용을 반대한 후 왕따가 시작됨. 현재 만화창작과 교수 5명 전원은 학과장부터 모두 진보만화미술정치단체 회원, 부적격자 등으로 채워져 있음. 이런 사실을 기자와 블로그에 발표했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음. △ 중국 해남도 연수배제 사건 2006년 6월 15일 당시 여근곡 측은 개교 10주년 기념으로 전교직원 및 조교들까지 4박 5일간의 중국 해남도 연수를 갔으나 학장은 최모 당시 기획실장을 본인의 연구실로 보내 가지 못하게 배제함. 혼자 남아 수업 진행함. △ 교문 앞 학장의 장애인 차별 발언 사건 해직 후 2007년 3월 셋째 주에 여근곡 교문 앞 시위 중 학장이 느닷없이 나타나 많은 학생과 직원 등이 보는 앞에서 "안 교수님이 처음 이 학교에 들어올 때 면접이나 이력서에 왜 청각 장애인이라고 표시하지 않았죠? 면접 때나 이력서에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안했죠?"라고 물었다. 이 일을 지켜보던 두 명의 기자는 학장의 차별발언에 대하여 법적으로 고소를 할 경우 자신들은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 학장주재 학과회의에 참석하려고 음악을 크게 틀은 사건 당시 본인은 귀가 안 들리므로 학장이 오면 불러달라는 신호로 문 밖까지 들리도록 음악을 틀었으나 아무도 학장과 교수들 간의 회의에 부르지 않고 오히려 학장으로부터 음악을 크게 틀어 회의를 방해했다고 면박 당함. 이에 본인은 청각장애로 인해 음악을 틀었다는 사유를 자세히 작성하여 학장과 실,처장 및 바기나 학과장에게 보내기도 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음. 그럼에도 학교 측은 해직된 후에야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주장함. △ 청각장애인인 본인에게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워 계약을 강요함. 2004년 6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당시 기획실장이던 고모 기획실장이 소환하더니 "교수업적 평가 점수가 650점 이상이 되어야 하고 학과 교수 간 상호'인화단결'평가에서 30점 이상을 맞지 않으면 2005년부터 강의전담으로 좌천 시키겠다"고 정관과 규정 및 절차 등을 모두 무시하고 협박까지 받음. △ 청각장애인인 본인에게만 근거규정에 없는 강의전담직을 실험적으로 강요함. 2005년 2월 업적평가 점수가 0.7점 부족하다며 강의전담으로 강등함. 그런데 2007년 2월 세미나시 강의전담제를 2007년부터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같은 행태는 내가 청각장애인으로서 다른 대학으로 이직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잡아 본인에게만 2년 앞당겨 소급 실시한 것으로 일종의 실험쥐로 여긴 학교 측 만행이라 할 것임. △ 2007년 또 다시 강의전담직을 강요함 정년트랙 기간제 교수인 본인을 2005년 비정년트랙으로 강제 전환시키고 이후 조건을 완수했는데도 2007년 또 다시 강의전담직을 강요함. 2005년 당시 강의전담직에 싸인 할 때 학교 측은 교수 강의평가 점수가 2년간 평균 4.0 이상이 되면 6개월, 또는 4개월 전에 원직인 조교수로 복직 할 것인지 아니면 강의전담을 계속 맡을 것인지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한다고 언급하였으나 2007년 2월 23일 이를 무시하고 계속 강의전담으로 근무하라고 강요함. △ 2004년과 2005년, 2007년도 계약은 교원인사위원회에서 소명 절차도 없었으며 이사회 의결도 없는 불법. 학교 측은 안태성이 강의전담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조교수"라는 말을 계속 사용 함. 그러나 월급은 강의전담용으로 줌. △ 교육부 담당자는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갈 때는 사표나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런 절차가 없을 경우에는 불법"이라고 말함. △ 2002년 여근곡은 교육부 감사를 대대적으로 받음. 교육부 감사 결과 셀 수 없는 많은 불법비리가 적발되었으나 후속조치를 하지 않고 교육부 담당직원들이 도피성 해외이직을 하는 바람에 학교 측은 현재도 감사에서 지적받은 사항들을 고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불법을 자행함. △ 여근곡의 모든 교수들이 졸업생의 명단 중 취업이 되지 않은 졸업생 수십명을 취업했다며 사업자 등록이 있는 출판사나 회사의 명칭 등을 임의로 적어 가짜 취업생 명단을 만드는 사기행각을 저지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취업이 안 된 졸업생들은 자신도 모르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 있으며 이런 불법적인 사기행각으로 취업률을 높여 교육부로부터 특성화 지원금을 받아 챙기는 전대미문의 사기조작을 벌이고 있음. △ 지금까지 사항은 일부만 요약발췌 한 것. |
에필로그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에 선 경계인이다. 또한 청각장애인으로서 구화가 가능하여 멀쩡한 외모와 건강한 신체 탓에 청각장애인계에서도 어중간한 중간지역의 경계인이다. 경계인은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건, 완전한 농아나 건청인(청각에 이상이 없이 잘 들리는 사람)이건, 중간지역의 위치 탓에 활동하고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다.
상류층이 만들어 놓은 이 위치는 나를 이상한 인간으로 보게 만든다. 더구나 잘 안 들리면서 들리기도 하며, 말도 잘 하는 청각장애인의 중간 입장은 더욱 이상하다. 나는 수화도 못하고 그렇다고 건청인처럼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더욱 답답하고 때로는 화도 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상류층도 나를 보면 화가 났을 법 하다. 마누라도 가끔 답답하다고 화를 낸다. 자식 놈도 의사소통의 오해가 생겨 서먹서먹해질 때가 있다. 경계가 애매한 이런 처지 때문에 어떤 제자 녀석은 나를 '장애를 팔아먹는 인간'이라고 매도했다. 마치 박쥐 인생과 같다.
나는 박쥐가 되고 싶지가 않다! 나는 귀가 잘 들려 거리를 지나는 멋진 아가씨를 발견하고 재빨리 뒤따라가 매끄러운 말소리로 "우리 차 한 잔 합시다"라고 바람도 좀 피워보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내 자신이 혐오하던 더러운 사기꾼도 되보고 싶었다.
나는 50여 인생을 살아오면서 끝없이 분쟁, 분투, 항의, 항거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 소위 '장애인'들은 교수가 된 나를 부르주아로 보고 있고, 비정규직 교수들은 나를 '표본'으로 인지하며 희생제물의 향방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구경한다.
정규직 교수들은 나를 불쌍하고 껄끄러운 놈으로 멀리하며 구경한다. 내가 해직 된 후 그동안 일하고 관계를 맺고 있던 각 출판계 인사들은 더러운 거지 보 듯 슬슬 피한다. 이 행성은 친하지 않아도 친한 척 하며 자신의 간을 꺼내 보여줄 듯 행동해야하는 '인화'가 제일의 미덕이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나는 어디에서도 찬밥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장을 채워야 다음 날 일어날 수 있는 해부학적 인간인 나는 밥벌이조차 못하는 '무위도식'하는 무전취식자로 변했다. 어떤 나이 지긋한 4년제 교육재단 교수님은 내가 무위도식한다고 말하자 교수가 무위도식하면 되겠느냐고 나무랐다. 맞는 말이다. 교수 신분이었던 부르주아 계급이 무위도식하면 안 된다. 그러나 공사장에서 노동도 잘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30여 년 전 했던 공장에 다시 취직하여 '공돌이' 계급이 되자니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
요즘은 마누라가 다시 꼬마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 위해 지하실을 개조하여 화실로 만들어놓고 나를 대학원까지 뒷바라지 했던 과거 13년간의 유치원 미술학원을 운영한 경험을 살려 코 묻은 돈이라도 착취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다른 해직교수들은 비정규직인 시간강사라도 뛰는데 나는 불러주는 곳조차 없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일을 주시면 8:2나 7:3으로 나눠 먹자거니 아니면 6:4나 5:5로 나누자고 떠들어댄다.
나는 이 암흑행성이 싫다.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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