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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 모르는 잡것들이…"

[김상수 칼럼]다산 정약용의 전라남도 강진에서①

마음이 산란했다. 전라남도 강진으로 불쑥 내려갔다. 지난 초여름에 강진 출신 친구의 안내로 강진을 찾은 이후 이번에는 혼자서 카메라를 챙겨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10월 중하순의 남쪽 바닷가 끝자락으로 나갔다. 월출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강진의 산하를 계곡마다 다른 빛깔로 수놓고 있었다. 서서히 가을의 기운이 퍼지고 있는 산중턱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들녘에는 질펀하게 황금색으로 벼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이 계절에 강진 사람들은 '풍년도 재난'이라고 했다. 농사가 안 되도 걱정이지만 잘 되도 시름이라고 했다. 추곡가 6만 원 쟁취라고 쓴 현수막이 시골 도로 도처에 나부꼈지만 5만 원 조금 넘기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비료 값이나 농기계에 드는 연료 값이 몇 곱절이나 크게 뛰었지만 쌀값 수매가는 그대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 때 처음 거처였다는 주막(酒家) 툇마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다산은 이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그곳에서 유배생활 중 4년 간 머물렀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단정해야 하고', '언어는 마땅히 정중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 '사의지재'(四宜之齋)라고 정했다. 그 사의재 툇마루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뒷머리를 잡아챘다.

돌아봤다. 다산이다. 200년도 더 이전 사람인 다산이 화난 얼굴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너 단풍 구경 왔냐? 아닌데요. 술 좀 그만마시고 읍내로 나가봐라! 왜요? 이놈아! 사람들 비명소리가 안 들려? 뭔 비명이요? 쌀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도 쌀 직불금을 챙기는 잡놈들이 네 눈엔 안보여?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이놈아! 200년이 지나도 내가 눈을 제대로 못 감아. 팔자지요, 뭐. 더러운 팔자다. 난 눈도 못 감고 잠도 못 잔다. 세상이 하나도 안 변했다. 발전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데요. 뭔 발전이냐? 그런데? 그 대가를 하필 농민이 져야만 하냐? 만만하니까요. 눈을 뜨고 세상의 주위를 둘러본다는 게 이젠 고역스럽기가 그지없다. 그냥 못 본체 하시오. 너하곤 말이 안 통한다. 저는 벼슬아치 아닌데요. 이놈아! 꼭 벼슬이나 감투 쓴 놈한테만 책임이 있냐? 너도 책임 있다! 뭔 책임이요? 책임질 일 없는데요. 있다! 없어요! 모두 한 통속이다! 나는 빼주시오. 밥알이 넘어가더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끝없는 탐욕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상상을 넘어서는 부패의 사슬에 나라가 칭칭 감겨있다. 농민, 그들은 사람으로서 취급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인간적 비용은 계산되지도 않고 있다. 수고하는 노동은 업신여김을 당하고 소작농은 농사진 쌀을 지주에게 바쳐도 돌아오는 건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 뿐이다. 충격적인 것은 제도의 부실과 부정한 직불금 수령 실태도 상식을 뛰어넘지만, 실상과 문제를 파악하고도 은폐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타인의 절망과 불행을 먹고 사는 놈들이 지천으로 늘렸다는 얘기다. 어디서부터 다 잡아야 하나? 지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부터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 상식적인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고 있는 지경인데, 이런 이명박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나 있겠는가? 벌써 지난 노무현 정권 탓으로 돌리려 안간힘이다.
▲마흔 살의 농부 강광석 씨. ⓒ김상수

성전면 영풍리 마을 어귀에 이르렀다. 오이농사를 짓는 이제 마흔 살의 농부가 오이를 깎아 건넸다. 오이 맛이 달았다. 1970년생 농부 강광석 씨는 서른다섯 마지기 일 년 벼농사가 겨우 1000만 원 수입이고 비닐하우스 오이농사는 치솟는 기름 값에 도대체 방도가 없단다. 그래도 자기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라고 했다. 남의 땅에 농사짓는 이곳 사람들 평균 수입이란 게 일 년 500만 원 보면 된단다. 어떻게 사냐고? 안 먹고 안 입는단다. "경자유전 법칙이 무너진 거지요. 농업을 그저 산업으로 보는 사람들이 선진국이다, 자유무역이다, 헛소리 하는 동안에 농업은 대책 없이 무너졌지요." 그래도 농촌을 떠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지켜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를 회피하거나 체념만 하고 있을 이는 아닌 듯 했다.

1960년생 농부 조윤식씨는 비닐하우스 딸기농사를 짓고 있었다. "발등을 찧은 기분입니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질 줄 알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는데, 15만 원하던 기름 값이 26만 원, 2만8000원하던 비료 20kg 값이 9만8000원이니 몇 배가 뛰었잖아요. 900평 수경재배 딸기농사에서 수지를 맞출 도리는 없고, 이걸 그냥 이대로 팽개치고 치울 수는 없고, 내 발등을 찧은 거지요"

작천면 평기리 삼거리 다농수퍼 앞에서 마을 농민회를 이끌었던 문경숙(45세) 씨와 또래 나이의 몇 분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분들도 농사를 저버리거나 고향을 떠날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든 농촌을 지키겠다고 했다. 농협이라도 농민 편에서 제대로 일을 해준다면, 농산물 유통 문제라도 확실하게 해 준다면, 절대 절망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끊임없이 습관처럼 반복되는 부패를 끊지 못하면 농정은 더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읍내로 들어섰다. 한 농부와 마주쳤다가 헤어지는데 그의 말이 오랫동안 귓전에 머물렀다. "세상물정 모르는 잡것들이 힘을 가지고 도둑질하면서 세상을 망치고 있소."

딱 207년 전, 다산이 머물었던 주막 뜰에는 다산이 마셨던 우물의 샘은 마르지 않았고 그가 툇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다 본 바깥 풍경도 그대로인 듯했다. 그 무엇보다도 나라의 어지러움이 예나 지금이나 판에 박은 듯 그대로니 안타깝다.

당시 조선의 민중은 도탄(塗炭)에 빠졌고 법(法)과 령(令)은 혼돈이었다. 오늘날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처럼 200년 전 조선시대 때도 권력과 돈이 세상살이의 기준이었으니 민생은 가히 지옥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머릿수로 세금을 매기는 당시 현실을 피하고자 자신의 성기(男根)를 잘라 아예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한 남편, 그 남편을 서러워하며 통곡하는 아낙을 보고 지었다는 시 애절양(哀絶陽)을 당시 다산은 다 남겼겠는가.애절양이란 양(陽), 즉 남성의 성기를 스스로 자른 것을 슬퍼한다는 기가 막힌 의미 아닌가.

丁若鏞, 哀絶陽

갈밭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처절코나 蘆田少婦哭聲長

관문(官門) 향해 울부짖다가 하늘 보며 통곡하네 哭向縣門號穹蒼

전쟁 나가 못 돌아오는 일이야 있을 법도 하지만 夫征不復尙可有

그걸 자른 남자 이야긴 옛날에도 못들었어 自古未聞男絶陽

벌써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배냇물도 안 마른 어린 자식을 舅喪已縞兒未澡

황소같은 장정이라고 삼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네 三代名簽在軍保

이장 놈 호통 치며 소마저 끌어가는데 里正咆哮牛去皁

달려가 하소연해도 버티고만 서있는 저 문지기 薄言往愬虎守閽

칼 갈아 들어가선 피바다가 웬 말이요 磨刀入房血滿席

이 놈 땜에 아이 생겨 이 고생 치른다고 自恨生兒遭窘厄

궁형(宮刑) 당한 환관(宦官)들이야 무슨 죄가 있더냐 蠶室淫刑豈有辜

민(閩) 땅 사람 자식 거세도 기차는 풍습이지 閩囝去勢良亦慽

종자를 퍼트리는 건 하늘이 낸 이치이니 生生之理天所予

음양이 부딪치면 아들 딸 낳게 마련 乾道成男坤道女

말, 돼지 불알까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인데 騸馬豶豕猶云悲

하물며 사람이리요, 후손도 이어가야지 況乃生民思繼序

한 평생 잘난이는 풍악이나 즐기면서 豪家終歲奏管絃

한 톨 쌀, 한 치 베도 바치는 일 없다네 粒米寸帛無所捐

다 같은 백성들인데 왜 이렇게 다릅니까 均吾赤子何厚薄

시구편만 객창에 앉아서 거듭 읊조리노라 客窓重誦鳲鳩篇


다산은 이 시작(詩作)의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 추수가 한창인 논. 200여년 전 다산이 슬퍼했던 농촌의 현실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상수

"이것은 가경(嘉慶) 계해년(순조3-1803) 가을에 내가 강진(康津)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그때 갈밭마을에 사는 어떤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적(軍籍)에 오르게 되어 이장(里正)이 군포(軍布)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가버렸다. 그 백성은,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른다' 하고는 칼을 갈아 가지고 자기 양경(陽莖-남자 생식기)을 잘라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듣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들고는, 관청을 찾아가서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했으나, 문지기는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고 한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이즈음 피폐(疲弊)한 마을의 가난한 집에는 아기를 낳기가 무섭게 홍첩(紅帖)이 벌써 와 있다. 음양의 이치는 하늘이 낸 것이니 교접(交接)하지 않을 수 없고, 교접하면 낳게 되어 있는데, 낳기만 하면 반드시 병적(兵籍)에 올려서 이 땅의 부모(父母)된 자로 하여금 천지(天地)의 생생(生生)하는 이치인 끊임없이 자손을 낳아 기르는 이치를 원망하게 하여, 집집마다 탄식하고 울부짖게 하니, 나라의 무법(無法)함이 어찌 여기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심한 경우에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지어 군적에 올리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올리기도 하고, 더욱 심한 경우는 강아지 이름을 군안(軍案)에 올리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개의 이름이며, 절굿공이의 이름이 가끔 군첩(軍帖)에 나오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절굿공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죽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고위관료들과 배웠다는 자들이 높은 자리와 지식도둑으로 이명박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같이 춤추고 있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다산이 머물었던 강진 땅 기운은 아직 쇠락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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