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화가 임옥상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기 프레시안에 내가 쓴 글을 보고 그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같은 동네 북한산 자락 이웃에 살다가 나는 그 동네를 떠나 나라 밖으로 떠돌아다니느라 한동안 그를 보지 못했는데, 불쑥 걸려온 그의 전화를 나는 좀 시큰둥하게 받았다. 솔직히 반갑다는 느낌보다는 불편했다. 전화를 끊고 조금 후에 이번엔 내가 전화를 걸었다. 안 본지 만 이년이나 지났는데, 전화를 성의 없이 받은 것 같아 안부를 물었다. 요즘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화가 임옥상과 나는, 언젠가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 그가 얘기한,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한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10년도 더 이전인 처음에는 서로의 글과 작업으로 먼저 만났고 이후에는 사는 곳이나 작업실이 같은 동네고 이래저래 비슷한 관심 이상으로 자주 만났다. 만남의 초창기에는 '민중화가'인 그에게 나는 신뢰를 가졌다.
신뢰의 출발은 내가 보는 우리나라의 현대 미술, 특히 문화 예술 일반에 기형적인 풍토, 즉 한국의 현대미술이나 현대예술이 서구 일방의 미술이론을 '찌그러진 의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절름발이 이론 위주로 현대 미술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졌고, 미술의 표현도 어설픈 바깥의 시선 위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신식민주의적 현실에 나는 지독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미술, 넓게는 현대의 예술이란 당연히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현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기본으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이 시작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과 비슷하게, 임옥상도 치우쳐있는 잘못된 현실의 현상들에 너무나 당연하게 반발하고 있었고, 그의 반발은 거리예술이니 벽화운동이니 사회미술환경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임옥상의 이 당연한 반발이 워낙 희소하게 느껴지는 미술 사회의 풍토인지라 나는 그의 작업에 엄격한 완성도나 미적 가치나 미적기준은 차치하고 우선 그를 지지하고 성원했다.
예술과 자기배반
그러나 2000년 5월부터 나는, 미술가 또는 예술가로 그에게 지니고 있던 신뢰를 조금씩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임옥상이 화가로 미술운동가로 또는 시민운동가로, 그가 하는 말과 글과 실재로 보이는 그의 미술표현과 그의 행동에서 오는 괴리감이 너무 크다고 느꼈고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직접적이고 실례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제 임옥상은 민중 예술가에서 대중예술가가 된 지 이미 오래고 무엇보다도 그는 공인(公人)이다.
나는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지사(志士)연 하는 일관된 신념과 행동양식까지 기대하진 않지만, '예술은 시대의 정신과 눈이고 인식의 소산'이라고 평소에 생각하는 내 입장에 비추어볼 때, 그리고 부당한 권력과 제도에 맞서서 공공의 가치로 미술의 영역을 넓히고자 주장하기까지 하는 그의 노력이 진실한 것이라면, 과정과 결과에까지 본래의 취지나 목적에 답하는 반듯함에 대한 자기정직성만큼은 스스로 치열하게 다스리는 게 기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툭하면 떼(衆)를 만들어 모이고, 떼로 떠들면서 '민중'을 들먹이고 챙길 건 다 챙기는 그런 예술운동이란 나는 믿지 않는다. 외롭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중미술을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다.
이는 제대로의 예술이라면, '예술은 시대의 정신이고 눈'이기 때문에 미디어에 기생하고 출세와 유명세와 돈에 노예가 되어 명분과 실리의 잦은 배반이나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과 과장된 너스레와 자기 모면으로 대강대강 치울 수 있는 엔터테이너의 현실이어서는 안 된다는 내 완고함에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은 가시밭길의 도(道)이고, 절망이고, 죽음이고, 삶의 사투(死鬪)이고, 매일매일 죽었다 다시 깨어나거나, 못 일어나고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상태일 수도 있다, 화가가 자기 눈을 찌르고 미쳐서 헛소리를 하면서도 그려냈던 끈덕지고 무서운 '사실'의 리얼리티란 '정신과 눈'으로의 정직한 자기 대면의 결과였고 비로소 꼼짝없는 예술가의 최소한의 리얼리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시절 민중미술의 개념과 이해에 동의하고 지지하면서도 한국에서 보았던 숱한 민중미술 중에서, 정말 미술 자체로, 미술로, 작품을 대하는 순간 즉시 살아있고 감동으로 파고드는 미술은 극히 적었다. 심지어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 독일)와 같은 민중미술을 한국의 민중미술 작가들에게서 본 사실은 거의 없거나 희소하다. 콜비츠는 미술을 관념이나 말이나 글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과 글이 미술작품으로도 생생하게 감동의 전극(電戟)을 일으켰고, 그녀가 얘기한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라는 너무나 간명한 그녀의 말처럼, 그렇게 엄격하고 냉정한 것이 어쩌면 예술 작업이라고 나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으로 이를 믿고 있는 것이다.
워낙 왕성한 활동가라 임옥상의 미술활동에는 경계가 없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정작 임옥상에게 미술은 없고, 안 보이고, 미디어 앞에 자주 등장하는 활동가 또는 미술사업가로 임옥상만 남았다. 그가 그의 미술을 성취하기 위해서 관계하는, 또는 동원되는 스펙트럼의 넓이는 그가 평소에 주장하는 이념이나 가치와는 무관하고 심지어 별개인 듯, 정당의 정치인은 한나라당부터 민주당 민중당 진보신당에 이르고, 역대정권의 고위직에서부터 중소기업 외국인기업 심지어 대우 등 대기업, 재벌 삼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미술 사업 대상은 폭 넓고 다양하기 그지없다.
때때로 내 눈엔 임옥상이 미술을 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술을 통해 탐욕의 정치를 하는 것인지의 구분도 애매모호할뿐더러, 그가 재벌 회장 일가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벌었던 건 차라리 나는 넘어갈 수도 있지만, "친미 독점지본가들의 나라", "수탈의 나라" "재벌나라"(임옥상 저 '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 한 그림쟁이의 영혼일기, 폐이지191-생각의 나무 출간) 등으로 재벌을 악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재벌 초상화를 그리는 부지런함은, 그가 민주주의와 민중을 미술로 말하고 슬픔과 가난과 억울함과 사회정의와 연대와 실천을 주창할 때는, 원래 지녔다고 말하는 자기 진정성은 자기 입신(立身)과는 어떤 구분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 옆에서 보기에도 너무 정신이 사납고 마구 헷갈렸다. 따라서 민중미술계의 후배들에게 마구 씹히는 모습이란 그의 이중성이나 다중성을 후배들이 간파한 것이고 그의 말과 글과 미술이, 그의 몸에서 나오지 않음을 예민하게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해가 지날수록 그의 말마따나 '불가근불가원'이 아니라, 그를 안 보고 안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느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빡빡해지는 내 성미 때문이리라.
이년 만에 다시 만났다.
전화통화를 하고 며칠 뒤, 내 살던 북한산 자락 동네에 볼일도 있고, 또 오랜만에 새롭게 좀 진실하게 만나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까지 하면서 그의 작업실에 들렀다. 그의 최근작인 쇠 부처가 작업실 입구에 서있었다. 마침 같은 동네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 중인 그의 최근작인 쇠 부처도 볼 수 있었다. 이년 만에 화가를 만나니, 못 보던 사이에 그는 부처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 글자인 한글을 철판에 새겨 그 글자를 조각으로 끊어서 하나하나 용접으로 이어 붙여 안에는 텅 빈 불상(佛像)을 만든 것이다. 그가 만든 부처는 하나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형상을 빌었고, 또 하나는 어디에 있는 어떤 불상을 모사(模寫)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대불(大佛)이었고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쇠로 만들었지만 무겁거나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가는 선의 부드러움이 쇠의 물성(物性)을 잘 다루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왜 임옥상은 부처를 만들었지? 혹시 부처를 만났나? 새로 탈각한 중(僧)하고 친구라도 됐나? 그에게 부처는 무슨 의미가 있지? 부여박물관에서 무슨 전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부처가 눈에 띄어 부처를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단다. 그의 답변은 명료하게 내 심중에는 와 닿지 않았다.
아하, 임옥상이 이제부터 진짜로 민중미술을 새로 시작하는 건가?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혼자 생각하다가 내 생각을 화가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작가가 만든 이 부처가, 그저 부자 집 정원이나 레스토랑 실내 장식물, 아니면 눈을 반쯤 뜨거나 감은, 돈 많은 절간에 중이 전시품으로 또는 '캐릭터 팬시'로 절간에 옮겨도 용도야 무방하겠지만, '팬시상품' 이상의 의미를 담겠다면, 오로지 작가정신(作家精神)이 투철하게 형상에 용해되어 있어야할진대, 그건 과연 무엇일까? 작가는 앞으로 만들 부처의 형상이나 입체설계에 대한 얘기를 내게 많이 했다. 나도 보탰다. 불경(佛經)을 한자로 새기거나 영문으로도 새겨 중국이나 일본, 서구 국가들에서도 전시된다면 어떤 반응이 있을까도 얘기했다.
그러나 여전한 물음은 부처를 만드는 작가 임옥상의 세계 인식의 내용이나 방식이, 또한 세상 인식의 근거가 무엇이기에 지금 부처를 만들고 있는가가 나는 궁금했다. 그가 입으로 얘기하든, 보이는 작품인 임옥상의 부처에서 볼 수 있든 간에, 나는 본질에 대한 물음을 묻고 싶었다. 물론 미술작품이니 작품 자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하겠고, 한글을 새긴 철판을 용접해 입힌 모사로의 형상인 부처가 아닌, 임옥상이 만든 고유한 예술 세계의 세계 인식으로 형상인 부처 말이다.
민중의 피눈물과 고름 덩어리인 부처
13년 전인 95년에 나는 어느 출판사와 책 출판을 앞두고 책 쓰는 작업을 위해 전라남도 깊은 산중에 이름 있다는 암자에 한 보름간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암자는 1101년에 세상을 떠난 고려시대 큰 스님이 기초한 암자였는데, 95년 그 무렵에는 원래 있던 부처는 도둑을 맞은 지 오래고 플라스틱 금칠 부처가 놓여 있었고, 스님은 아니고 나이 육십 넘긴 중이 있었는데, 염불은 못 외우는지 안하는지, 부산서 단체로 관광버스에 실려 신도들이 왔을 때는 불경을 전용으로 외우는 젊은 중이 목탁을 들고 절 밖에서 찾아와서 제불을 지내고 절 주인한테서 돈을 받고 다녀갔다.
내가 있는 암자라는 데가 사회의 축소판이 산으로 옮겨진 곳이라는 걸 이내 알게 됐다. 감방에서 막 나온 인상이 험악한 오십 넘은 사내가 있었고, 판 검사되겠다고 고시 공부하는 고시생이 셋, 선임하사로 제대해서 연금으로 산다는 정신 사나운 제대군인, 몸 요양한다고 중년 여성이 둘, 그 여성 중에 화장이 짙은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제대군인과 감방사내가 치정에 얽혀 칼부림을 하는 날도 있고. 나는 그 싸움을 뜯어 말리고, 암자가 산중 암자가 아니라 대처 도시 변두리 뒷골목에 소요스런 하숙치는 골목집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매일 부처님들이 암자에 있는 부처에게 공양(供養)을 드리러 왔다. 부처는 산간 아래 마을들에 사시는 바로 가난한 할머니들이었다. 지극 정성이라고 이고지고 귀한 쌀을 포대에 담아 험준한 산길을 불편한 몸으로 꼬박 반나절 이상 걸려 겨우 올라와서는, 금칠한 플라스틱 부처상 앞에서 향을 피우고 손을 비비고 절을 했다.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쌀을 이고 암자를 찾았다. 돈이 없으니 뼈골이 다 지도록 농사를 지은 귀한 쌀을 들고 암자를 찾아, 부처님 상에 올리고 있었다. 그 때 내 눈엔 할머니가 지고 오는 쌀은 쌀이 아니었다. 눈물이고 피고 고름이었고 그 할머니들이 바로 부처였다.
사단(事端)은 내가 암자에 온지 삼일 째 터졌다. 산책을 하고 암자로 들어서는데 오토바이한 대가 뒤 짐칸에 큰 부대자루를 아슬아슬하게 메고 스쳐 지났다. 경내로 들어서자 연기가 피어오르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암자에 기숙하는 남녀일행 전부가 부엌 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고 연기를 치운다고 부채질하는 여자도 있었고, 고기 자르는 놈, 숯불에 굽는 놈, 소주병 마개를 따는 놈, 역할들이 있었다. 제대군인이 먼저 나를 보고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간단하게 한 잔 하자고 했다. 그 땐 어리둥절했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니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감방에서 나왔다는 사내였다. 한 잔 하잔다. 사흘 후에 알았지만 이들은 나흘에 한 번은 술과 고기로 허한 기운을 달래야만 한단다. 암자에 들어오는 할머니들이 지고이고 온 쌀은 오토바이 사내들에 의해서 소주 댓 병과 육 고기로 맞교환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임옥상의 부처는 그 때 그 암자에 금칠 플라스틱 부처와 어떻게 다를 수 있나? 화두(話頭)인가? 할머니들이 쌀을 이고 와 절을 하던, 그 플라스틱 금딱지 부처와 임옥상의 쇠 조각 부처는 어떻게 다를 수 있나?
이런 물음의 동기는 곧 사회의 사실, 슬픈 삶의 애환, 그것들을 씨줄 날줄로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혼(魂)으로 임옥상의 부처는 우리와 만나질 수 있는가를 나는 질문한다. 미술사업가 미술정치가 임옥상이 아닌, 미술 작가로 그것도 민중에 의한 민주주의를 주창했던 민중 작가로 임옥상의 부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임옥상 부처에 사실성과 진정성의 힘이 있다면, 우리들 삶을 직시하게 하는 예술적 상상력이 빚어내는 시(詩)의 관점으로 부처일 수도 있는가를 나는 되묻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플라스틱 부처처럼 공장에서 막 찍어내는 그냥 그런 막 부처를 만들어 댈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술이 빠지기 쉬운 허위의식이란 정직한 삶으로부터는 단절될 때는 썩은 냄새나는 지독한 사기(詐欺)이기 너무 십상이기 때문이다.
임옥상이 민중화가로 민중작가로 작업한 바탕에는 사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라 전제한다면, 관객인 우리들에게 부처를 만들어 보일 때는, 우리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부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버리는 일과도 연관되어야만, 그나마 그가 만들고 내보이는 임옥상 부처에 어떤 가치라도 부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된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부처
오늘의 사람들은 어디에 누구를 막론하고 전체성(Unitity)과 정체성(Identity)의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러 먼 고행 길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옛날 중국에 큰 스님 임제(臨濟) 왈(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까지 했다. 살벌한 역설이다.
편견이나 무지에 의해 왜곡되고 비뚤어진 상을 없애라는 얘기이고, 자신의 몸뚱아리로 자신의 정신으로 온전하게 세상을 보면서 걸어 나가라는 얘기로 나는 들었다. 잘못 곡해된 부처를 죽이고 새로운 부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삶을 생기 있게 하는 부처를 따르며 이런 부처가 되려는 우리들 이웃을 더욱 깊이 이해하라는 뜻일 거다.
부처는 '불타(佛陀)'가 부처가 됐고 '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이다. 부처가 '나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함께'의 구원이라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임옥상의 작품 부처가 자리하기를 나는 기대해 본다. 그래서 진짜로 민중의 화가로 그가 피어나기를, 나는 작가 임옥상에게 정말 진실할 것을 고대한다. 너무 늦었을까? 하긴 살아 온 방식이란 여간해선 잘 고쳐지진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예술에 기생하기엔 너무나 짧고 또 예술은 턱없이 무용한 삶을 기만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예술을 빙자하여 삶에 방만할 이유도 없고 예술에 빠져 익사(溺死)할 이유도 전혀 없다.
나무에 붙은 잎사귀가 바람에 지는 것을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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