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운동사가 북한의 역사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민중 운동사가 제시하는 대로 국정 방향을 설정하면, 국가의 장래는 지금의 북한 꼴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왜 한국 근·현대사의 주조를 민중 운동사에 두지 않고 대한민국사에 두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57쪽)
민중 운동사가 북한의 역사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이것이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라고? 물론 뉴라이트 역사관과 비교한다면 민중 운동사와 북한의 역사관 사이가 더 가깝겠지만, 그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극우의 입장에서 자기보다 왼쪽을 모두 좌파라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설령 민중 운동사가 북한의 역사관과 비슷한 것이라 치자. 그 역사관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면 지금의 북한 꼴이 된다고? 뉴라이트 주장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그런 국정 운영이 진행되어 왔다. 그 10년이 시작할 때 대한민국 경제는 IMF의 난장판에 빠져 있었다. 10년간 이른바 '좌파' 정권이 상황을 많이 호전시켜 놨다. 그런 식으로 해서 국가의 장래를 망쳐놓으려면 도대체 몇 백 년, 몇 천 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나라 꼴 망치는 데는 이명박 정부가 훨씬 더 뛰어난 소질을 보이고 있다. 민주 질서를 퇴행시키고 있는데도 경제조차 잘 돌아갈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월스트리트가 무너지면서 달러 가치가 추락하는 와중에 원화 가치가 더 앞장서서 곤두박질치는 까닭이 뭔가? '문명의 가치'를 내세우며 '국제 협력'을 부르짖는 뉴라이트의 '성공'이 이런 것인가?
"경쟁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보다 우월한 사회 운영 원리는 아니다"
뉴라이트가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공산권에 대한 승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성공을 확인한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앞서 (☞관련 기사 : "뉴라이트 '자유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밝힌 것처럼 1970년대의 경제 위기에 대한 반응 중 신자유주의가 반동적 방향의 것이라는 의견을 나는 가지고 있다. 경제학에 대해서도 경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지만, 산업혁명 이후 근대 세계사의 흐름, 특히 그 기술사 측면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눈부신 속도의 기술 발전은 18세기 후반에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초반 긴박한 전쟁 상황이 기술 발전에 극한적 자극을 주었다. 그 자극이 사라진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기술 발전의 추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기술 발전은 자원 공급을 확장해 준다. 한편으로는 종래 경제적 가치가 없던 자원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원 채취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 규모가 200년에 걸쳐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고, 그 확장 추세 속의 경제 운용에 적합한 체제로 자본주의가 나타났다.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는 '경쟁'이다. 경쟁은 '평등'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진다. 경쟁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보다 우월한 사회 운영 원리는 아니다.
연재 첫 회에 소개한 쿵족 같은 수렵·채집 사회를 생각해 보자. (☞관련 기사 : "뉴라이트에게 인간은 이기적 존재일 뿐인가") 식량 확보에 공이 큰 사람과 힘센 사람들이 너무 큰 몫을 가져간다면, 의욕을 키우는 사람보다 의욕과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 부족 전체의 활동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같은 분량 식량의 한계효용이 적게 받는 사람에게보다 많이 받는 사람에게 작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근대 사회에서 널리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파이가 커지고 있던 상황 덕분이었다. 적극적으로 경쟁에 나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큰 이득을 취하더라도 방관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의 생존이 심각한 위협을 받지는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승자의 독식이 패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
1945년 이후 인류의 기술 발전은 그 이전에 확보된 기술을 더 다듬어내는 범위에 그치고 새로운 원리를 개발한 것이 별로 없다. 얼마 동안은 기존 원리만 가지고도 응용의 확대와 적용의 확장을 통해 자원 공급의 증가 추세를 웬만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그때까지의 경제 체제를 그대로 지속할 수 없는 '성장의 한계' 상황이 닥쳤다.
사실 '성장의 한계'는 19세기 후반에도 한 번 닥쳤던 상황이다. 자원 공급의 확장 속도가 아직은 매우 빠르던 시기였지만, 그때까지의 워낙 철저한 자유방임 경제 체제로는 지탱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둔화되었다. 승자의 독식(winner-take-all)이 패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위기에 대한 대응은 세 갈래로 나타났다. 가장 급진적 대응은 경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공산주의였다. 중도적 대응은 경쟁을 허용하되 얼마간 제한을 두자는 제도경제학파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대세를 휩쓴 것은 반동적 대응인 제국주의 노선이었고, 20세기 초반 두 차례 세계대전의 파국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는 가운데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는 무한경쟁을 추구한 제국주의 노선과 함께 설 땅을 잃었다. 한 쪽 진영은 공산주의에 입각한 계획경제로, 다른 한 쪽은 제도경제학파의 제안을 받아들인 착근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 시장경제로 경쟁을 벌인 것이 그 결과 나타난 냉전 체제였다.
1970년대의 경제 위기는 두 진영 모두에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진영이 효과적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무기력한 침체에 빠진 반면, 자본주의 진영 일부가 미국의 주도 하에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나섰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상황의 문제점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격화시켜 파국을 앞당김으로써 추진 주체가 상대적 이득을 얻자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레이건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함께 추진한 군사 정책이 어떤 것이었던가. 그야말로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드는 '별들의 전쟁'이었다. 경제여건에 역행하는 군비 확장은 상대방이 먼저 손 들도록 압박하는 치킨게임이었다. 냉전의 대결 상황이 이 소모적이고 반동적인 정책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자본주의를 유일한 '문명'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 신앙"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책 노선으로서 그 성공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지금 진행 중인 미국 금융 공황을 포함해 더 많은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공산권 붕괴 역시 공산권의 '패배'라고는 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 경제의 '실패'라고 단언할 것은 아니다. 자원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방임 정책에는 문제가 있다. 향후 자원 공급 상황에 따라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의 타당성이 얼마든지 다시 검토될 수 있다.
당장 금융시장에 대한 국가 감독의 강화를 향한 미국과 유럽의 움직임부터가 신자유주의 자유방임의 퇴조를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미국은 소련에 대한 승리의 기세를 타고 세계화를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몰아붙였다. 미국 경제는 레이건 이래 국가재정 적자 등 구조적 문제를 키워 왔다. 그 문제를 덮어놓기 위해 거품을 키우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호랑이 등에 매달려 달려온 셈이다.
미국 금융위기의 실상을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신자유주의 노선 지탱을 위해서는 시장의 빠른 확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실물 차원의 자원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니 금융상품의 거품으로 대신해 온 것이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파이는 커지지 않는데 소수의 몫을 계속 늘리면서 다수의 눈을 환상의 부로 가려온 것이다. 우리의 부동산 거품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금융계의 비상한 공황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을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는 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재산세 등 다른 세원을 늘리지도 않고 세출 줄일 방안도 없이 종합부동산세를 없애겠다는 것은 기적을 불러오겠다는 뜻인가? 나는 이것이 공산권 붕괴를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믿는, 그래서 자본주의를 유일한 '문명'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 신앙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제도든 상황과 여건에 따라 효용성을 가지는 것이다. 근대 이전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서 자본주의 좋은 것을 모르고 다른 체제를 취했던 것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와 자본주의에 적합한 상황이 전개되니까 자본주의가 고안된 것이고, 한 번 만들어진 뒤에도 현실에 맞춰 조정을 가해 온 것이다. 지금도 현실에 큰 파탄이 일어나니 신자유주의에 앞장서 온 미국조차 뭔가 조정을 시도하고 있는 판에, 한국의 뉴라이트가 자유방임 깃발을 그대로 휘젓고 있는 것은 유사종교 수준의 인식이라 할 것이다.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해야 할 필요성"
자본주의 신앙이 역사 인식에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이영훈과의 대담 중 안병직은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대안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70년간의 실험 끝에 결국 실패로 귀결됨으로써 명백히 증명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자유와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인 것이므로, 이 이기심을 살려 두어야 거기에서 무한한 발전의 동력이 나옵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263쪽)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가 안병직에게는 자본주의의 절대적 정당성에 대한 증거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변하지 않는 정당성이다. 지금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건 말건 자본주의의 핵심인 자유방임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자본주의가 과거에도 언제나 우월한 체제였다는 믿음을 그는 굽히지 못한다. 1930년대 대공황 속에서 소련이 가장 적은 충격을 받았던 사실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북한 경제가 한 때 남한보다 우월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다.
안병직과 이영훈의 대담 중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흔히들 1970년대 초까지는 북한의 소득 수준이 남한보다 높았다고 합니다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지기에 일제가 북한에 건설한 중공업이 그 기반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안병직, 같은 책, 267쪽)
"해방과 분단에 따른 혼란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산업 시설의 파괴로 한국 경제는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 떨어졌습니다."(이영훈, 같은 책, 160쪽)
이영훈은 다른 책에서 이런 이야기도 했다.
"그 상당 부분이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만, 드러난 건물이나 저장 시설이야 그러했지, 분리 가능한 핵심 설비를 폭격의 대상으로 방치해 둘 정도로 북한의 지도부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사회주의 생산력의 덕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대한민국 이야기>, 171~172쪽)
손발이 척척 맞는다. 북한의 전쟁 파괴가 더 심했다는 상식 중의 상식 앞에서 이승만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폭격 피해를 부풀리고 북한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줄이는 고무줄 잣대. 그래도 뉴라이트 논설 가운데는 모처럼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대목이다.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적은 폭격에도 큰 피해를 입을 만큼 어리석었다는 얘기니까.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역사의 대목대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의 역사로만 해석하야 하는 편향성을 또한 피할 수 없다.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실패할 운명의 나라로, 자본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을 성공할 운명의 나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 쉽게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원리주의 성향의 유사종교가 떠오르는 것이다.
"몰상식한 역사관이 몰상식한 정책을 밀어주는 추세"
'승리'를 곧 '성공'으로 풀이하는 뉴라이트 세계관은 역사를 보는 눈만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도 한 쪽으로만 열어준다. 진보 진영의 선거 패배는 곧 그들의 실패라고 뉴라이트는 본다. 패배자들이 했던 모든 일을 승리자가 뒤집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 친일파도, 지금 '강부자'도 뉴라이트의 눈에는 승리자들이며, 따라서 성공한 자들이다. 성공했다는 것은 목표가 올바르고 노력이 충분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친일파 비판은 실패한 자들의 시기심일 뿐이며, 부자에게 세금을 더 물리려는 종부세는 "잘못된 세금 체계"인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종부세의 타당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 없다. (지난 주 이준구의 글 "MB정부, 최후의 안전핀까지 뽑았다"보다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성공한 자들을 대접해 주기는커녕 부담을 지우려 들다니, 올바른 세금체계일 수 없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 방안도 그렇다. 대기업 소유자들은 그들의 눈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능력이 입증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더욱 큰 성공을 돕는 것이 정치다. 범죄를 사면해 주고, 세금을 줄여주고, 규제를 풀어주고,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하게 해줘야 그들이 신나서 사업을 잘한다. 그렇게 해서 파이를 키워놓아야 열등한 인간들도 부스러기나마 얻어먹을 수 있다. 성공할 능력도 없는 자들을 배려한 전임 대통령은 어떤 보답을 받았나? 성공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보답도 할 줄 안다. 표로든, 돈으로든.
진행 중인 내 비판은 뉴라이트 정책이 아니라 '역사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몰상식한 역사관이 몰상식한 정책을 밀어주는 추세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민족도 국가도 안중에 없이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이용 대상인 하나의 주식회사일 뿐, 정체성과는 관계 없는 존재다.) 자기 정체성을 '이기적 존재'로만 규정하고 달려드는 자들이 사회 통합(social integrity)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가장 반동적인 제국주의 노선이 득세하던 사정을 생각하게 된다. 경쟁의 주체인 국가들이 목전의 득실에만 매달려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승리'를 곧 '성공'으로 보던 사회진화론의 시대였다. 그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는 집단이 21세기의 국가 하나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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