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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국, 보이지 않는 스포츠스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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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국, 보이지 않는 스포츠스타들

[정희준의 어퍼컷] "꼬리곰탕 없이 승리할 수 있나"

아래 사진은 1967년 6월 4일 무하마드 알리가 베트남전쟁 참전을 위한 징병을 거부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 그를 지지하는 미국의 흑인선수들이 함께 한 모습이다.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자 최초의 흑인 감독(보스턴 셀틱스)이었던 빌 러셀, 불세출의 미식축구 스타 짐 브라운, 그리고 LA레이커스 왕조를 이끌었던 카림 압둘 자바의 모습이 앞줄(왼쪽부터)에 보이고 뒷줄엔 마틴 루터 킹 목사(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챔피언 벨트보다 반전의 신념 택한 무하마드 알리
▲ (왼쪽부터) 빌 러셀, 짐 브라운, 카림 압둘 자바, 무하마드 알리. 마틴 루터 킹 목사(왼쪽에서 세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고향에 금의환향 했지만 동네 식당에서조차 식사제공을 거절당하며 변함없이 '깜둥이'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울분을 느껴 금메달을 오하이오강에 던져 버린다. (IOC는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 때 새로 제작한 금메달을 그에게 선사한다.) 그는 '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길 거부했다.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언제나 직설적이었기에 그에겐 '루이빌의 입(The Louiville Lip)'이란 별명이 붙었다. 우리에겐 '떠벌이 알리'로 알려진 그다.

그는 1964년 도박사들의 1대7 열세를 비웃으며 소니 리스튼을 KO로 누르고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1960~70년대 그의 인기는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던 (그러나 사실 서구세계에 한정된) 비틀즈의 인기를 뛰어 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당시가 미디어의 유아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전지구적 인기는 가히 괴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작가 노먼 메일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로 찰리 채플린과 그를 꼽았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던 그의 경기 모습은 예술의 차원에서 논해야 할 그런 것이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던 1967년 징집되자 그는 죄 없는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그런 전쟁에 내가 왜 가야 하냐면서 기자들을 향해 "이보쇼, 난 베트콩하고 싸울 일 없어요(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 댈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징병 거부가 불량한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죄악시 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알리의 징병 거부는 반전운동의 불씨가 된다. 그는 영화, 음악, 스포츠계를 망라해 징병반대와 반전의 기치를 내걸었던 최초의 인물이었고, 결국 반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다. 그 댓가는 엄청났다. 챔피언벨트는 물론 선수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무려 3년 6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징병거부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 끝에 결국 무죄판결을 받는다.

링에 복귀한 알리는 1974년 자이레 킨샤샤에서 26세의 챔피언 조지 포먼과의 '세기의 대결'을 벌인다. 당시 전문가들은 알리가 포먼의 주먹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염려했고 알리의 담당의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스페인의 뇌수술전문병원으로 알리를 실어 나를 비행기를 킨샤샤공항에 대기시켜 놓기도 했다. 그러나 알리는 로프에 기대어 포먼을 탈진시킨 뒤 8회 불꽃 같은 원투펀치를 포먼의 얼굴에 작렬시켜 격침시켜 버린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스타의 탄생이었다.

미국의 인종차별을 세계에 고발한 선수들

알리가 징집을 거부하며 미국 정부와 한판 승부를 벌이던 1967년 미국의 흑인선수들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사회학과 교수인 해리 에드워즈의 주도 하에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PHR)'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에드워즈 교수는 그 자신 대학시절 풋볼, 농구, 육상스타로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스카우트 지명을 받기도 했지만 학업을 계속해 교수가 되었고 미국의 인종차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흑인선수들의 올림픽 보이콧을 위해 OPHR를 결성케 된 것이다.

논란이 있었지만 올림픽 메달 외에는 지옥과도 같은 미국사회를 돌파할 방도가 없었던 이들 흑인선수들은 결국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 참가하지만 '화이트 아메리카'의 광대가 되길 거부했다. 이들은 대회에 출전하며 세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인종차별주의자였던 당시 IOC 위원장 에이브리 브런디지의 퇴진, 둘째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올림픽 출전금지,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의 복권이었다.
▲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은 백인에 행해지는 흑인에 대한 린치와 빈곤을, 검은 장갑은 '블랙파워'의 위대함을, 오른손은 흑인의 힘을, 왼손은 흑인의 단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00m 우승자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목엔 검은 스카프를 두르고 양말 차림으로 시상대에 올라 성조기가 오르고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주먹쥔 손을 들어올렸다. 신발을 신지 않은 것은 백인에 행해지는 흑인에 대한 린치와 빈곤을, 검은 장갑은 '블랙파워'의 위대함을, 오른손은 흑인의 힘을, 왼손은 흑인의 단결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시상대에서의 행동은 당연히 IOC와 미국사회의 격한 반응을 불러왔다. 그 소중한, 그들이 인생을 걸고 얻어낸 메달을 박탈당했고 선수촌에서도 쫓겨났다. 미국에 돌아와선 직업을 구할 수도 없었고 살해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편 미국사회의 지지와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400m 계주 우승자인 와이어미아 타이어스는 자신의 금메달을 이들에게 바친다고 발표했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미국 조정팀은 "우리의 동료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리기 위해 한 행동에 지지를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영문 모르고 시상대에 오른 은메달리스트 호주의 피터 노먼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관중석에서 동그란 OPHR배지를 얻어 가슴에 달고 시상대에 올랐다. 이들의 시위는 미국의 인종차별문제를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스미스는 "우승을 하면 미국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검둥이'가 되는 현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경기장에서는 미국시민으로 미국을 위해 뛰지만 집에 오면 시민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그런 거짓과 기만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듯 스포츠는 그 환경으로부터 단절된 무인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2005년 캘리포니아대 산호세 캠퍼스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했다. 학생회는 "두 사람의 행동은 세상에 밝히고 알려야 한다"고, 스미스는 "우리가 죽더라도 역사는 남는다"고 말한다.

"르펜을 택할 것인가, 나를 택할 것인가"

2002년 4월 치러진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극우파 정당인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은 사회당의 조스팽을 누르고 결선에 진출했다. 인종차별주의자 르펜은 지단을 비롯해 드사이, 비에이라, 앙리 등 아프리카계 선수들을 대표팀에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었다. 이에 드골에 견줄 프랑스의 영웅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은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만 요즘 일어나는 일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프랑스의 가치와 동떨어진 당에 투표하는 것이 가져올 심각한 결과를 직시해야 한다. 르펜에게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르펜을 택할 것인가, 나를 택할 것인가" 물은 뒤 르펜이 당선된다면 2002월드컵에 출전치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또 투표기권율이 30%에 달하게 될 경우 매우 위험하다면서 투표장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국민전선을 찍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경고하기까지 했다. 극우 인종차별주의자 르펜에 대항해 중도파와 좌파의 결집을 촉구한 것이다. 지단의 뒤를 이어 대표팀 동료인 마르셀 드사이는 '르펜은 파시스트'라고 비판했고 로베르 피레스는 지단과 마찬가지로 '르펜이 집권하면 월드컵에 불참할 것'이라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 뿐 아니라 럭비국가대표팀도 극우파집권반대운동에 동참했다.

2005년엔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의 대규모 소요사태 당시 도미니크 빌팽 총리는 이를 '치안'차원에서 접근했고 현 대통령이자 당시 내무장관인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인간 쓰레기'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표팀 수비수인 릴리앙 튀랑은 "나는 인간 쓰레기가 아니다"면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치안부재가 아니라 실업"이라면서 정부는 "이번 소요사태에 참가한 사람들을 단순 폭도로 몰고가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만 '똘레랑스'를 외치면서 실상은 1998월드컵과 2000유러피언컵을 우승한 축구대표팀을 내세워 상징적이면서도 허구적인 국민통합을 '즐기는' 프랑스의 국가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사회문제의 실질적인 본질은 외면한 채 폭도, 치안, 인간쓰레기 차원으로 몰고 가려는 정부의 꼼수에 제동을 건 것이다.

촛불정국, 어떻게 체육인은 한 명도 안 보이나

스포츠 역시 사회를 반영하기에 종종 투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스포츠를 통해 억압하기도 하고 스포츠를 정치도구화 하기도 하며 평등과 통합을 가장하기에 스포츠인들은 저항한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여자마라톤도 수십년간 여성선수들이 남성주의에 저항하고 투쟁한 결과물이다. 체제에 저항하기도 한다. 테니스의 여왕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체코 공산정권에 맞섰다. 당연한 것에 도전하기도 하고 포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알리는 "나는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사이클의 랜스 암스트롱은 "나는 내 삶의 스타일에 있어서나 옷을 입을 때나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물론 마이클 조던처럼 백인들의 품에 안겨 '백인 같은 흑인,' '백인이 원하는 흑인'이 된 이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어느 인종이든, 어느 종목이든 주변을 돌아보고, 변화를 꾀하고, 사회정의를 추구하고, 때론 희생까지도 감내하는 체육인들이 있어왔다.

운동선수들, 앞으로 소꼬리 안 먹을 건가

작금의 촛불정국엔 많은 유명인들이 함께 하고 있다. 젊은 연예인들은 자신의 블로그에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대한 의견을 올려 놨고 또 다른 많은 가수, 배우, 영화인들은 촛불문화제에 참가하고 또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체육인, 스포츠스타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선수도 없고 감독도 없다. 너무 바쁘셔서들 그런가. 너무 귀한 몸이라서 그런가. 원래 체육쪽이 보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단 한 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스타' 중에서도 '스포츠스타'는 별도로 쳐야 하는 것인가.

지금의 문제는 다름아닌 쇠고기 문제다, 쇠고기. 운동선수들 힘낼 때 먹는 게 쇠고기 아닌가. 열심히 뛰어 승리하고 메달 따려면 쇠고기는 필수 아닌가. 운동선수에게 먹는 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또 있을까. 태릉선수촌엔 한우만 골라 들여보낼 자신이 있어서 그런가. 선수들은 내장 안 먹어 문제가 없는 것인가. 아, 그리고 힘낼 때 보양식은 꼬리 아니던가, 소꼬리. 꼬리곰탕 없이 어떻게 금메달을 딸 것인가. 그런데도 광우병 걱정은 도통 안 하는가. 혹, 미친소 먹고 '미친듯' 달려서 메달 따려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 모든 게 이들을 세상과 단절시킨 채 운동만 시킨 우리 선배들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스포츠는 더 자유로워야 하고 더 발랄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둘러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소신과 신념에 따른 자신의 발언을 해야 한다. 조직이 요구하는 '금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 한국사회의 미래에 관심을 갖는 박지성, 친구들과 함께 청소년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김연아,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발언하는 박태환, 물대포에 맞서 시위대의 선봉에 선 최홍만…. 이런 그림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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