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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람료 인상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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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람료 인상을 지지한다

[이슈인시네마] 영화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이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가지 전제를 밝힌다. 첫째, 나는 영화기자이지, 영화인은 아니라는 것. 동의 못하실 분도 계시리라는 것 안다. 내 생각과 달리 이 직업군조차 광의의 영화인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며 일부 영화기자들의 행태가 그러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 논리에 휘둘리는 한국영화계에 영화 예술의 공공재적 정체성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고 강도 높게 촉구해 왔다. 그래서 영화계 내에 나를 고깝게 바라보는 분들도 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넘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벽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지금 영화 관람료 인상에 대한 찬동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노릇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1~2년까지 상존해온 이동통신사 멤버십 할인 혜택에 힘입어 영화 관람료의 기준선을 매우 낮게 책정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지금 7~8천 원에 달하는 영화 관람료를 인상할 경우, 관객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 관람료 현실화가 절실하다고 믿고, 불법 다운로드 문제에 이어 다시한번 영화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한국의 영화 관람료가 그동안 지나치게 싸게 책정돼 왔으며, 그로 인해 영화 자본의 선순환 구조에 악영향을 미쳐온 사실을, 영화계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취재해온 기자의 양심상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대중의 생각만을 대변해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적합한 방향인지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 또한 기자로선 비겁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인들 스스로 과도한 제작비 상승 요인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제작비란 기본적으로 영화의 표현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욕망의 크기에 연동되기 마련이다. 어떤 제작자라도, 또 어떤 감독이라도 더 '때깔' 좋고, 더 우수한 비주얼을 구현하고 싶어한다. 음향과 프로덕션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제작비 상승을 부른 많은 요인 중에 거품으로 지적돼온 과도한 유통비용과 배우 개런티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영화인들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맞다. 여전히 그 노력은 충분치 않다. 영화 관람료 인상에 분개한 일부 관객들이 영화인들 스스로 변화의 몸부림을 보여주라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으라고 질타하고 있는 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영화 관람료 현실화를 촉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까지 눈 감아 버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영화계 단체들의 성명에서도 지적됐 듯, 한국의 영화 관람료는 각각 1만 원을 상회해 2만 원까지 바라보는 미국, 일본 등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낮다. 그 나라들은 선진국이니 단순 비교는 무리 아니냐는 항변이 나올 게 뻔하다. 예전엔 빅맥 지수라고 했지만 요즘엔 스타벅스 지수란 게 있다. 각 나라의 물가 현황을 비교할 때 자주 쓰이는 기준점으로 스타벅스에서 파는 까페라테의 가격이 얼마냐를 비교해 따지는 것이다. 이 지수로 보자면 일본보다 한국이 비싸다. 내가 경험하기론 스타벅스의 본고장인 북미와 비교했을 때도 한국이 더 비싸다. 공연 관람료는 어떤가. 유명 팝 뮤지션의 내한 공연은 기십만 원을 호가한다. 그래도 매진 사례다. 그래서 같은 뮤지션의 공연 관람료가 훨씬 싼 일본으로 일부러 원정 관람을 가는 분들도 있다. 다른 어떤 문화 상품의 가격을 비교했을 때도 유독 한국의 영화 관람료만큼은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런 비교 논리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많은 분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여전히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저항감을 부른 많은 책임은, 오히려 영화인들보다 멤버십을 앞세워 영화 관람료 할인 경쟁을 일삼은 이통사들에게 돌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영화 관람료의 체감 지수를 비상식적으로 낮춰 놓은 주범이기 때문이다. 극장에 들어가면 광고를 한다. 어떤 극장은 심지어 10개가 넘는 광고를 틀어댄다. 내 돈 내고 영화 보는데, 그에 앞서 생짜로 광고까지 봐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상식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80년대처럼 대한 뉴스나 애국가를 틀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유는, 낮은 영화 관람료를 광고 수입으로 대신하려는 극장들의 욕심을 관객들이 암묵적으로 추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의 영화 관람료가 지나치게 비싸다고 느꼈다면 극장에서의 광고 폐지 캠페인이 당장 벌어졌어야 옳았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 여기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수긍이 안되실 분들 많은 것 같다. 수긍 안되는 게 당연하다. 영화 관람료의 인상은 바로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주머니 사정 빠듯한데 영화 관람료마저 올린다면 당장 다운로드해서 영화보겠다고 작심하실 분들 적지 않을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내가 한달에 휴대폰 통신비로 지출하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점심 한끼 먹으려면 얼마나 써야 하는지. 그것에 비하면 영화 관람료 1만 원이 결코 비싼 것은 아니다. 하물며 뭔 콤보 어쩌구 하면서 극장 들어서기 전 먹거리 비용으로만 4~5천 원도 아낌 없이 쓰는 분들 많다. 좋은 영화를, 볼만한 영화를 먼저 만들라고? 맞는 애기다. 그러나 좋은 영화는 관객들이 흔쾌히 그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을 때 나온다. 창의력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온 가요계가 결국 허구헌날 리메이크와 샘플링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타산지석이다. 정말 볼만한 영화가 아니라면 관객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영화라면 7천 원 아니라 1만 원이라도 흔쾌히 쓰게 될 것이다. 까짓 커피 전문점 가서 까페라테 한 잔 덜 사먹어서라도 봐줄 것이다. 창의력과 독창성에는 그만큼의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적어도 문화 상품에 있어서는, 관객들이 내는 관람료는 단지 하나의 재화에 가격을 지불하는 것을 넘어 창의력과 독창성에 보내는 신뢰이자,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영화를 시장 논리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주문은 영화인들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관람료 인상에 따른 위험과 기회의 양면적 가능성을 모두 알고 있다. 어쩌면 위험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조차. 그래서 고양이 목에 감히 방울을 걸고 나선 것이다. 위험이 크지만 그만큼 절박하기에 방울을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금, 그것조차 재수 없다고 퉁겨 버린다면, 할리우드도 일본도 프랑스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담는 우리 영화들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많은 부분 최근의 한국영화가 한심하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영화가 걸려 있는 극장을 찾고 싶다. 수가 읽히는 얄팍한 상업 영화들의 행렬을 한탄한다 할지라도 <살인의 추억>과 <타짜><밀양>을 기다리는 설렘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또 돌 맞을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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