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이 목전의 화두가 된 이상 당분간 범여권의 대선 사령탑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최근 김혁규 의원,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김 전 대통령을 찾은 데 이어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 박상천 민주당 대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김근태 전 의장 등도 조만간 DJ와 만날 예정이다. 이들이 숫한 비판을 무릅쓰면서도 동교동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DJ와의 회동 자체가 '대통합'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DJ 역시 범여권의 제정파를 만나 양당체제 구축과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통한 여야 1 대 1 대결구도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할 게 확실하다. '훈수정치'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생결단"이란 표현까지 동원한 DJ의 메시지가 통합파에게는 절박성을 대변한 복음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범여권 대통합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6월까지는 DJ가 쥐락펴락하는 국면이 강하게 부상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남북정상회담 7주년 기념식도 성대하게 예정돼 있다. 6월은 누가 뭐래도 'DJ의 달'이다.
하지만 DJ의 직접적인 현실정치 개입이 범여권 단일대오 구축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또 다른 지휘봉을 쥔 노무현 대통령이 DJ식 대통합에 궁극적으로 손을 들어줄지 장담하기 어렵고, 대선과 총선전략이 제각각인 범여권 각 세력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기도 쉽지 않은 탓이다.
盧-DJ 갈등은 휴화산
DJ의 메시지는 다분히 노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 지역주의에 대한 반박과 대선 1대1 구도 정립 촉구, 8월15일 이전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대한 압박 등은 한결같이 청와대를 향한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단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이지만 대세를 잃는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한 발짝 물러서긴 했다. 친노(親盧)계로 분류되는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김혁규 의원 등도 통합론에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친노-반노 갈등의 핵으로 꼽혔던 유시민 전 장관은 당분간 여의도 정치에서 벗어나 있다.
영남 신당이니 친노 독자후보니 하는 자극적인 정치언어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한나라당 대선후보들의 분열 가능성이 봉합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박근혜-이명박-친노-비노 후보가 모두 출마하는 대선 다자구도 전망이 낮아진 것과 무관치 않다. 노 대통령과 친노 세력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DJ의 훈수정치가 국면을 점령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역주의 회귀에 대한 비판과 퇴임 이후의 자기 세력에 대한 애착을 가져 온 노 대통령이 호남을 중심으로 '집토끼 잡기'에 기반한 DJ식 대통합을 끝까지 용인하리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DJ의 메시지는 호남 유권자들이 노 대통령의 노선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지분을 모아보자는 절박감의 표현"이라며 "그렇다고 지역주의에 대한 명분을 쥔 노 대통령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특히 "지난 재보선에서 당선된 김홍업 씨가 두고두고 김 전 대통령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라며 "이는 결정적으로 김 전 대통령이 노 대통령에게 명분을 빼앗긴 일"이라고 지적했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전술적 제스츄어 정도로 볼 수 있다"며 "노 대통령이 지금까지 취해 왔던 스탠스의 본질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권력 관리'의 문제에서 DJ와 노 대통령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고 연구원은 "남북문제를 포함한 임기 중 치적의 보존 측면에서 정권재창출이 절박한 DJ와 지역구도를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고자 하는 노 대통령의 생각은 권력 갈등과 같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분석은 친노-반노 갈등, 특정인사 배제론 등 크고 작은 걸림돌에 부딪혀 대통합 작업이 난항을 겪을 경우 노 대통령의 반격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적어도 30%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한 노 대통령의 대선 개입력은 여전히 막강한 변수로 작용할 게 확실시 된다.
"후보단일화도 장담 못해"
김 전 대통령의 대통합 메시지가 과거와 달리 일사분란하게 먹히지 않는 하부구조의 현실도 있다. 무엇보다 민주당이 응하지 않는 이상 범여권의 대통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민주당 박상천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자칫 민주당 당론과 다르게 비칠 가능성이 있다"고 불만을 표하는가 하면, "내일 김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당 당론의 구체적 내용과 배경을 말씀드리고 열린우리당이 주장하는 대통합과 어떻게 다른지, 또한 대통합으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박 대표와 온도차이는 있지만 중도개혁통합신당 모임도 친노계까지 아우르는 대통합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염동연 의원은 최근 일부 기자들과 만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먼 훗날에는 에이플러스를 받을 것으로 확신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대선까지는 철저한 거리두기를 주장했다.
여기에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범여권과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하며 외곽을 맴도는 것도 DJ의 절박함이 당장 대통합신당으로 구체화되기는 힘든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같이 대통합의 걸림돌인 셈이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이 최선으로 손꼽은 양당체제보다는 각 세력의 선거연합 형태의 후보단일화라는 차선책이 그나마 기대해 볼 수 있는 카드라는 분석이 많다.
고원 연구원은 "노선의 스팩트럼이 다르고 권력에 대한 욕구의 수준이 정파별로 너무 달라서 나중에 선거연합식 후보단일화를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지금 같은 지리멸렬한 상태가 지속되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성민 대표도 "노 대통령과 DJ의 갈등을 '적대적 갈등'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당을 같이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일정당 구축론을 비관적으로 봤다. 그는 또한 "(참여정부평가포럼 등) 친노세력이 다당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고 손학규 전 지사로 대표되는 비노세력 역시 독자행보를 할 수 있어 후보단일화 역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반신반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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