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꽤나 즐겨 봤던 '느낌표'의 주요 캠페인이었던 "책·책·책을 읽자"에서 지정한 최초의 3개의 어린이 도서관 중에서도 1호 기적의 도서관이다. 독서 캠페인을 방송사의 아주 대중적인 감각과 정서로 풀어낸 아주 탁월한 TV프로그램 '느낌표'를, 그리고 그것의 중요한 내용이었던 '기적의 도서관' 사업을 나는 여전히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았던 그 도서관을 현실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TV스타를 좋아하는 젊은이마냥 기대가 부풀었다.
기적을 이룬 '기적의도서관'
직접 본 순천 기적의 도서관은 정말로 달랐다. 그 취지에 맞게 어린이 도서관으로서의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바닥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고 동굴같이 꾸며진 곳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야외에서도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다양한 색상의 의자와 소파들이 잘 배치되어 있었으며 책도 답답하지 않게 그러나 종류별, 연령대별로 잘 분류되어 꽂혀 있었다.
"어린이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오고 싶고, 탐구하게 만드는, 어린이들의 호기심 천국 자체여야 한다"는 게 순천기적의 도서관 허순영 관장의 지론이다.
순천과 함께 처음으로 '기적의 도서관'으로 지정된 나머지 2곳은 어떨까.
"저희를 포함해서 3곳이 최초로 지정됐었는데 나머지 2곳은 잘 안됐어요. 추진주체의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순천의 경우는 시에서 잘 협력했고 시민단체와 시민의 호응도 높았기에 가능했죠. 순천시가 토지와 5억 원을 기부했고 '책읽는 사회'에서 나머지 건축비 등을 모두 부담해 이뤄졌지요. 지금까지는 보통 시가 건물을 만들어 시민단체에 운영위탁을 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건물을 지어 콘텐츠, 집기까지 만들어 순천시에 운영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은 처음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의 도서관'이죠. 특히 1호점이기 때문에 규모있게 잘 지었어요. 사실 너무 크죠. 어린이들이 오기 쉽게 작은 도서관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도서관 관장으로서, 아이를 둔 엄마로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적의 도서관이 성공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아쉬움으로 첫 운을 뗀 순천 기적의 도서관 허순영 관장. 내가 찾아갔을 때 허순영 관장은 한참 바빴다.
파주 출판문화단지 주최의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발제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기조발제의 또 한 사람의 주역은 프랑스 어린이책센터인 '책을 통한 기쁨'을 만들어 전파했던 즈느비에브 파트(Genevieve Patte)였다. 후덕한 어머니 같은 인상의 허순영 관장은 한국의 즈느비에브 파트였다.
기적의 도서관이 이룬 의미
허순영 관장은 제주에서 온 어린이도서관의 전문가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가라는 딱딱한 수식어보다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어린이 도서관에 대한 열정이 얼굴이 가득 묻어나는 한 사람의 엄마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그에게 어린이 도서관은 단순히 학교에서 배운 배움의 실천 장이 아니라 엄마로서 본인의 경험이 투과된 확신의 실천이다.
"저도 아이 둘의 엄마예요. 지금은 커서 다들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초중고교에 다닐 때 애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과 도서관에서 책을 읽히며 키웠거든요. 그러면서 어린이 도서관에 대한 확신이 섰어요.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순천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나가고 있고요."
이러한 기적의 도서관의 의미는 한둘이 아니다. 도서관에 대한 기부문화가 활성화되는 데 역할을 했으며 아이들 스스로 책 읽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여기던 아이들도 한두 달 지나면서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새로운 책나라'에 온 것처럼 책과 친숙하게 지낸다.
"처음에 아이들은 책을 장난감 삼아 놀이하며 놀아요. 그것도 하나의 성공이죠. 놀이터처럼 아이들이 도서관을 재미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지거든요. 그에 걸맞게 새로운 책나라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고 그래서 우리 도서관의 대출증에는 '책나라 여권'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 건물 자체가 여유 공간, 열린 공간이 많아 아이들의 탐험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구요. 이미 건물을 설계하는 초기부터 설계자인 정기용 선생과 어린이 도서관 경험자들 간에 충분한 대화와 협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을 시작으로 기적의 도서관 캠페인을 전개한 결과 총 9개의 기적의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제주, 진해, 울산 북구, 금산, 제천, 청주, 인천 부평 등으로 이어졌다. 미디어 시대의 힘이었다. '느낌표'라는 탁월한 프로그램이 낳은 열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도서관들은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기적의 도서관들의 협의체(기적의 도서관 전국협의회)가 구성되어 있어요. 상·하반기에 한 번씩 만나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공유하기도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찾거나 전반적인 운영사항에 대해서 협의를 합니다. 책의 경우에는 수서담당자끼리 책추천 목록 등을 함께 작성하구요. 학원에서 하는 수업은 하지 말자 뭐 이런 원칙도 세워 함께 지키려고 하고 있지요."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강사를 불러 학원 같은 프로그램을 하거나 관장이 자주 바뀌어 평범한 공공도서관이 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허순영 관장은 조심스레 "행정직 공무원이 관장이 된 곳은 1년을 넘기면 그마저도 바뀌니까 어린이 도서관만의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제대로 실행할 수가 없고 그러한 노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니까 결국 그저 책을 빌려주고 받는 단순한 도서관이 되어가는 거죠"라고 지적한다.
어린이 도서관을 지었던 것은 공공도서관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을 위한 책과 그들을 위한 공간배치, 그들만의 프로그램이 없다면, 몇 억씩 들여 지어놓은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 낭비가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도서관 관계자들이 어린이 전문 도서관으로서 기적의 도서관의 근본적인 설립 취지를 십분 이해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한 대목이다.
허순영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순천 기적의 도서관 곳곳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의 요구와 수준에 맞춘 설계와 시공,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등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아이들이 손을 씻는 시설이 있다. 야외에서 놀다가 들어온 아이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다. 한쪽에서는 엄마들이 아이에게 책을 보여주고 있고 또 한 쪽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읽기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침대도 마련되어 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 전국 어린이 도서관의 모델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국의 모델이 되는 순천의 도서관 운동
"순천에는 마을마다 작은 24개의 도서관이 운영되고 있어요. 많죠? 여기에서 배운 자원활동가들이 그 작은 도서관들을 운영해요. 어린이들의 생활 가장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어야 하잖아요. 자원활동가들이 여기에서 책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배우고 해보셔서 그것을 바탕으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운영해요. 기적의 도서관이 이 지역사회에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좋은 사회적 영향이고 확장이라고 생각해요."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 빚어내는 더 큰 기적들이다. 순천은 도서관 마을이 되고 있다. 순천시는 도농복합도시로서 면적이 서울의 1.5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들의 이동거리를 감안할 때 작은 도서관이 많이 필요하다. 작은 도서관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는 '이동도서관'을 대안으로 운영한다. 도서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북스타트사업도 펼치고 있다.
"영국의 사례를 많이 참조했어요. 전 주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죠. '원 시티 원 북'(One City One Book)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독서마인드 향상을 위해 한 권의 책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어요. 연극을 만들기도 하고, 저자를 초청하는 행사도 갖고 있는데 도농복합도시로서 소외지역이나 그 지역의 학교에서 책읽기가 잘 안되기 때문에 도입하게 됐어요."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시에서는 애초 4~5년은 걸리리라 봤던 순천의 도서관 운동이 빨리 정착되고 있다. 특히 그 작은 도서관들이 가족의 도서관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면서 자원활동가들의 무한한 참여와 주민들의 협조가 최고의 화음을 만들어냈다.
"작은 도서관을 원하면 우선 주민들이 공간을 만들어 운영위원회를 꾸리고 자원활동가들이 참여하기 시작해요. 설립 과정이 기적의 도서관과 같아요. 의지와 욕구가 충분한 것을 확인한 후 지원을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아파트 단지는 잘되지만 면단위는 어린이가 많지 않아 힘들었어요. 후원도 많지 않아요. 운영자를 지정해 월 50만 원, 운영비로 10만 원씩 지원하는데 이것마저도 고마워해주세요."
어렸을 때 할머니가 들려줬던 옛이야기 '설문대'의 전설 때문에 동화작가가 됐던 그녀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 어린이 도서관 운영에 관여하게 됐다. 그랬기에 도서관 관장이 된 지금도 그녀는 그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읽는 공간'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랄 뿐이고, 그 활동에 앞장서는 이들이 고맙다.
어린이도서관에서는 자원활동가가 더욱 소중하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자원활동가들의 존재는 특별히 소중하다. 공공기관일수록 국가나 지방정부의 예산과 인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원활동가의 존재는 단순히 사람의 손을 보태고 돈을 절약한다는 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어린이도서관의 기능을 한껏 발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적의 도서관은 민·관이 함께 운영하는 시스템이잖아요. 그래서 자원활동가 그룹이 큰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그저 단순노동을 하는 게 아니라 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참여해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고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의 숫자가 평일에는 500~600명, 주말에는 1500명 이상이니까 자원활동가가 없으면 도서관 운영 자체가 어려워요. 초기부터 일한 사람들은 경험이 쌓여 여느 전문가 못지 않고요."
자발적으로 어린이 도서관 사업에 뛰어든 허순영 관장, 그리고 그를 도와 도서관을 이끄는 숱한 자원활동가들. 자발적인 참여와 열정이 있어야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있다. 누가 갑자기 공짜로 회사를 차려주고 공장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그 회사를 잘 운영하고 공장을 잘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열심히 하고자 하는 사람을 지원해야 그 사업이 성공하는 법이다. 순천 기적의도서관과 순천 작은 도서관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바로 이 당연한 원리에 기인한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 단순한 대본소가 아니라 지식운동의 근간으로서, 센터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천 기적의 도서관의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돈도 더 필요하고 시에서 직영하는 도서관이다 보니 어려운 점도 있다.
"현재 이 도서관에는 6명의 정식 직원과 4명의 보조 인력이 일하고 있어요. 어린이도서관에는 사서가 더 필요한데 사서가 3명밖에 없고요. 사람도 더 필요하고 돈도 더 필요하죠. 특히 운영진들이 민간인에서 공무원이 되면서 1, 2년 사이 인사이동이 발생하게 되요. 전문도서관이나 특수도서관의 경우는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지, 할 만하면 자리 바뀌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이 큽니다."
"화가 나서 어린이 도서관을 내 손으로 만들었다"
물론 허순영 관장이 처음부터 도서관을 운영할 팔자를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동화작가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도서관을 들락날락 하다가 어느 날 어린이도서관을 아예 자신의 손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에서 개인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했어요. 원래는 제주의 어느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는 단순한 독자의 입장이었는데 화가 나 따로 만들게 된거죠. 어린이 서고에서 어른은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어요. 주민등록상에 아이가 있어야 동화를 빌릴 수 있다니 말이 되요? 그리고 가장 좋은 책은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꼭대기에 꼽혀 있어요. 일을 줄이려고 최대한 아이들에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서와 친해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친해졌는데 얼마 안가 그 사서가 바뀌더라구요. 그래서 모아둔 1000여 권의 동화책으로 아예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작게 만들었어요."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낀다고 그녀처럼 도서관을 아예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녀에게 도서관이 운명이었음을 말해준다.
허순영 관장이 만든 어린이 도서관은 '설문대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할머니가 들려준 '설문대' 이야기는 그녀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녀의 도서관은 처음부터 달랐다. 그 작은 공간에 온돌, 무대 등을 만들었고 공부모임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순천에 오게 됐다.
"2003년 3월 이곳에 왔어요. 도서관 전문위원팀을 만들었는데 설계 단계에서부터 함께 작업했어요. 이런 과정이 좋은 공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죠. 저로서 이곳은 많이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요. 앞으로가 걱정이죠. 여러 지자체에서 어린이 도서관을 짓고 있는데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유행처럼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앞서요. 요청을 받아 자료나 정보를 제공해도 결국 자기 식으로 가게 되잖아요."
이처럼 보람 속에서도 그녀는 절망과 두려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도서관의 전도사가 된 그녀의 짐이 가벼울 리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이 그녀에게는 아주 즐거운 것인 듯 보였다. 그녀의 삶에 이곳은 종착역이 아니라 꿈으로 가는 즐거운 길인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다시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 고향에 어린이 천국 같은 도서관을 만드는 꿈을 이룰 것이다.
면담일시 : 2006년 5월 2일 오후 3시 면담장소 : 순천시 해룡면 상삼리 순천기적의도서관 면담인사 : 허순영 (순천 기적의 도서관장)과 사서. 직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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