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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은 여전히 '미개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해외입양, 그 잊혀진 역사③]"해외입양의 굴레 끊을수 있나"

한국사회의 주의력 결핍 행동장애(ADD)

한국에서는 1960년대 말 이후 '해외입양은 불명예'라는 취지의 사설이 간간이 신문에 실리곤 한다. 이 문제가 부침을 겪는 동안, 우연인지 아닌지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과 같은 숫자인 20만 명 가까운 아이들이 한국가족들과 헤어져 서구, 특히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한국사회는 스스로 질문해 왔다. "왜 한국은 자기 아이들을 먼저 돌보지 못하는가? 국내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을 보살필 수는 없는가?"

이에 대해 한국 언론은 미국인들이 사심 없고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한국의 아이들을 입양한다는 '오해'에 기반해 그들이 한국인들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크다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민족주의적 자긍심과 국제적인 체면이 깎일 것을 두려워 하는 논의들도 있다. 사실 이디오피아, 과테말라 등 해외 입양을 보내는 다른 나라들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크게 뒤쳐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해외입양 때문에 한국이 얼마나 체면을 잃는지, 서구 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되는지는 상상하기 그리 힘들지 않다.

입양으로 내보낸 자국의 아동 수만 보면 한국에 어떤 나라도 범접할 수 없다. 평균 6명의 아이들이 매일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2004년 한해 동안 한국에서 2258건의 해외 입양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비혼모의 아이들이었다.
▲ 지난 2월 방한해 생부를 찾은 미국 스키 선수인 한국계 입양인 토비 도슨. 그러나 그의 생모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뉴시스

한국전쟁 종전 이래 어림잡아 20만 명의 아이들이 내보내졌다. 이는 입양인들이 한국 땅을 떠나는데 거쳤던 경기도 김포시의 전체 인구를 조금 웃도는 숫자다. 입양인들과 그들 부모의 수는 거의 경기도 안양시의 인구에 달한다. 양가 조부모와 형제 한 명을 포함해 계산하면, 한국에서 해외입양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수는 광주광역시의 인구에 맞먹는 140만에 이른다. 여기에는 한 명 이상의 형제나 친척 등의 숫자는 더해지지 않은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많은 자국민들을 고통받게 하고, 그들이 고통을 조용히 감내하게 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많은 한국 정부 공무원들이 외국에서 한국을 방문한 입양인들을 위한 행사에서 사과를 표명해 왔지만, 솔직히 그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왜? 그들은 여전히 입양인들을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아이들을 내보낼 핑계를 계속해서 만들어 왔다. 우리 입양인들은 매번 다른 이유로 어머니와 조국으로부터 '조직적'으로 추방당해 왔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혼혈로 태어났다는 불운 때문에, 가족이 한국의 빠른 산업화로 가난해졌기 때문에, IMF 위기 동안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거나 돌아가셨거나 혹은 그 둘 다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미혼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들과 조부모들이 현재 우리를 책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보내졌다.

지난해 한나라당의 고경화 의원은 해외입양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려 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아동에 관한) 한-미 무역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인들의 편지 보내기 운동을 촉발시켰던 것 같다. '행복한' 입양에 관한 많은 편지들을 받은 고경화 의원은 조용히 그 프로젝트를 접고 대신 불법 체류 노동자, 결혼 이민자와 그들의 아이들의 편에서 입법 초안을 마련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과거 입양 중단을 위한 여론을 일궈냈던 많은 기사나 노력들이 종결되면서 결국 보다 많은 입양이 이뤄졌던 것처럼, 그녀의 시도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버렸다.

몇 년간의 입양 논쟁을 되짚어본 후 나는 한국사회가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할 수 없는 병인 '주의력 결핍 장애'(ADD)에 걸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싫어, 나가버려! 사랑해, 돌아와!

미국에서 일궈낸 성과들로 인해 토비 도슨(입양인), 다니엘 헤니(입양인의 아들), 하인스 워드(혼혈이기 때문에 좋은 입양후보자였던)는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비 도슨의 엄마가 한국 사회의 질타가 두려워 '자신의 아들'이라고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현실은 얼마나 슬픈가.

왜 한국은 다니엘 헤니 어머니의 해외입양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는가. 왜 그녀는 이 나라에서 내보내졌는가? 무엇이 다니엘 헤니의 할머니에게 아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는가.

나는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가 자신과 아들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대했었는지 공개적으로 얘기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그녀가 입양을 보내기 쉬운 조건에 있었던 아들을 키우는 길을 선택한 것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국에서 추방당하고 쫒겨난 아이들이 이제는 한국의 명예홍보대사로 초대된다는 사실은 몹시도 아이러니하다.

좀 더 세련된 페미니즘

혼혈아들을 낳은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 재혼을 한 토비 도슨의 어머니, 또는 아이를 떠나 보내야 했던 다니엘 헤니의 할머니와 같은 여성에게 따라다니는 도덕적인 오명은 한국이 가진 스스로에 대한 지속적 믿음에 비춰볼 때 참으로 위선적이다.

한국이 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 믿는다면, 기지촌이 존재하고 외국 병사와 한국여성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그 여성들과 아이들을 비난하고 추방하는 대신, 그런 처지에 그들을 몰아 넣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다니엘 헤니와 영어 배우기에 열광하는 한국 젊은이들은 다니엘 헤니가 영어를 쓰는 이유, 나아가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의 외할머니가 딸을 한국에서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최근 고소득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결혼을 보류하는 이른바 '콘트라섹슈얼' 여성을 지향하는 것이 주류 페미니즘적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남편에게 기대는 것보다는 개인의 삶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보다 애정어린 페미니즘은 타인에 관심을 두며 자신의 특권과 능력을 사용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타인을 돕는다.

한국의 보다 도덕적인 페미니즘은 가난한 여성, 비혼모, 이혼한 여성, 혼혈아와 그의 어머니, 농촌의 외국인 신부들, 고아원에서 키워진 사람들, 장애인 등 사회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주장해야 한다.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개인을 마녀화시키지 않고, 가난이나, 교육 불평등, 인종적 편견, 군국주의, 가부장제, 체면을 지키려는 한국인의 두 얼굴 등과 같이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는 구조적인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 한국계 입양인이 어머니인 다니엘 헤니. 그는 최근 친아버지를 찾으려고 주한미군으로 자원한 입양인이 주인공인 영화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올 하반기 개봉될 예정이다. ⓒ뉴시스

아메리칸 드림 대 아메리카의 현실

미국의 모든 것이 훌륭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의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사실 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점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존재한다. 일례로 미국은 국가 의료보험이 없다. 65세 이하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8200만 명이 2003~2004년 중 특정 기간을 의료보험 없이 생활했다. 한국에서는 매년 약 4000명의 아기가 비혼모에게서 태어난다고 보고되지만, 미국에서는 2004년 태어난 아이들의 3분의 1정도인 150만 명이 비혼모의 자녀다.

미국에서도 입양을 기다리는 11만4000명의 아이들이 있고, 51만3000명은 위탁 양육되며, 9만4650명은 그룹 홈이나 보호시설에 수용돼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입양은 한국사람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국 어린이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이 아이들을 보내는 동안, 자기 이웃의 문제를 잊어버리려 하는 미국은 한국과 같은 '미개한 나라'에서 한 아이를 '구출'해오며 뿌듯해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미국의 비공식적 식민지

그러나 한국은 미개한 나라가 아니다. 다만 열등의식은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이 한국을 대단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그 배경으로는 한국이 알맞게 식민지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고자 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큰 돈을 쏟아 붓고 있다. 그래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한국말을 못하는 해외입양인들의 주요한 직업이 된다.

미국 식당 체인점은 서울 곳곳에 있고, 미국에서 파는 대부분의 것들을 구할 수 있다. 가게가 아니라면 개인업자에게서라도 구할 수 있다. 용산에 있는 사람들은 몇 년 안에 미군기지가 평택 근처로 이동하면서 함께 이동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조차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국과 미국의 새로운 FTA로, 우리는 서울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외면하면서 미국 쇠고기와 오렌지를 원하는 만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식민지시대 일본에게 이름과 말을 빼앗긴 쓰디쓴 원한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한국 정부는 입양인들에게 일어나는 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왜 입양인들이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 극단적인 형태의 식민화라 여기지 않는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한국은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과거 한국 여성의 납치 및 일본 군인들에 대한 성노동 강요를 부정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미국 양부모에게 아이를 강제로 보내야만 하는 여성들의 현실적이고 동시대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이 놀라운가? 식민지배국가가 아이와 여성들을 취하는 것은 항상 있어 온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생각해 오지 않았나? 현재 자기가 저지르는 과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말이다.

협력자는 누구인가?

일본인들이 50년 전에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쉽고 이 세계의 경제 대국을 비난하는 것은 어렵다. 또 협력자보다는 피해자 역할을 하는 것이 더 쉽다. 물론 한국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혔던 이들도 있기는 하다.

한국사회는 전후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느라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50년이 넘는 동안 가장 약자에 속하는 국민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무시해 왔다. 정부의 첫째 임무는 자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계속해서 우리는 미개해서 유교의 전통을 바꿀 능력이 없다고 믿으며 우리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그저 근대사회를 흉내내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는 미국 입양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개한지도 모르겠다.

생모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것이 그들을 돕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믿음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비록 생모를 아이들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좋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해도, 장기적으로 어린 비혼모를 아이들과 분리하는 것이 한국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 내 많은 수의 사람들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거나 주류 사회로부터 밀어내는 이런 사회는 세계 무대에서 선진사회나 근대화된 사회로 여겨질 수 없을 것이다.

노예제는 세계 무대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의 인권 침해로 비난 받아 왔다. 이의 근대적 형태는 부채 상환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다. 어린 비혼모의 병원비는 아이를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입양기관이 지불한다. 그 이후에 마음이 바뀐다 해도 비혼모는 아이를 되찾을 수 없다. 이것이 채무 상환 노동이나 노예제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미국의 수요-공급 원리 관점에서 볼 때 해외입양 문제에 대한 한국의 조치는 50년 전과 똑같기 때문에 미국의 예비 입양 부모들이 여전히 한국을 전쟁으로 황폐하고 가난한 나라로 인식하는 것이 과연 이상한가?

비혼모와 이혼녀 등에 대한 굴레는 분명한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사회에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명백한 표현이다. 한국사회가 변해 비혼모에 대한 오명이 사그러든다 해도, 자국에서 아이들을 내보내는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미국 입양기관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은 또 다른 이유를 찾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이유가 남북의 통일이 될지도 모른다. 북의 가난한 아이들을 얼마나 거둬들일지를 상상해보라.

이미 무너진 '아메리카 드림'의 중개인이 될 필요 없다

'행복'하거나 '불행'한 입양은 성숙한 입양 논쟁의 초점이 아니다. 그 초점은 인권, 즉 친자식을 양육할 수 있는 권리, 친가족 내에서 성장할 권리, 모국어에 대한 권리, 자신의 이름에 대한 권리, 차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한 사회에서 살 권리, 어머니가 적절한 사회적 서비스를 받고 아이를 교육하고 양육할 수 있는 권리에 있어야 한다. 비록 서류는 중개인과 구매자의 양심이 무뎌지고 듣기 좋게 '입양' 서류라고 불리지만, 아이들은 2000만 원에 서구 국가로 팔려가지 않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사회의 하위층을 위해 한국을 향상시키는 것은 진실된 대화, 사설단체와 정부의 제도적인 기억과 일관성, 그리고 국가 차원의 합의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전환기마다 아이들을 내보내는 새로운 핑계를 만들 수 없다.

현재 한국은 미군과 함께 이라크, 레바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군인들을 파병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이 정말 사회복지를 위해 쓸 충분한 돈이 없다면, 우선은 가난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사회 프로그램에 쓰여져야 한다. 입양인들이 아이로서, 혹은 성인으로서 충분하고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이나, 진정한 문제는 우선 우리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입양인으로서 자기 혐오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아이들은 외국인들에게 입양 보내지는 것보다 그들의 어머니와 지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다면 정부가 도와야 한다. 날 때부터 입양인은 없다. 우리는 문서작업과정을 통해서, 편리한 현대 여행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현재의 풍요로움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는 우리들을 나라 밖으로 수출해 더 많은 해외 입양인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국보 53호로 지정된 진돗개의 수출조차 한국 정부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왜 가난한 비혼모의 아이들인 우리는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한국의 입양은 전후 임시 해결책으로서 시작됐다. 이제는 그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실천해야 할 때다. 이미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의 중개인이 되어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 상처 받기 쉬운 여성들과 가족들을 위한 한국 정부의 지원이 보다 절실하다. 이런 자애로운 정치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진정한 유교적 가치가 아니던가?
▲하인스 워드는 지난해 5월 방한해 한국의 혼혈아동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뉴시스

잃어버린 유물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곧 대구에서 열릴 것이고 토비 도슨이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동계올림픽도 평창에서 열리게 될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주최하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고, 토비 도슨의 성취에 즐거워하고, 그가 아버지와 형제를 다시 만난 것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토비에게 가겠지만, 예상대로 그의 미국인다움에 대한 변명들이 만들어 질 것이고, 그가 한국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자막처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그가 정확히 얼마만큼 한국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김치 먹을 수 있어요"나 "한국 여성을 좋아하나요"와 같은 외국인에게 무례하고 깊이 없는 질문들을 토비에게 영어로 하게 될 것이다. 이 곤란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통해 우리는 토비를 내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아이들을 최근까지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는 세계적인 입양 산업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국이 지금 토비를 한국 '민족'의 일부로 부르는 특권을 주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를 입양 보낸 사실을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의 생모가 수십 년 동안 그 '비밀'로 얼마나 고통 받았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내 어머니는 나를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른 경우다. 첫 남편이 군대에서 죽고, 첫 번째 아들도 가난으로 잃었다. 그 뒤 재혼한 내 아버지인 알코올 중독자 폭력 남편과도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비록 두 딸을 해외입양 보냈지만, 내 여동생들을 열심히 키웠다. 내 여동생들은 모두 잘 자라 결혼을 했다. 비록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는 한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을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의 딸인 것이 자랑스럽다.

한국사회가 외면하는 여성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의 최근 경제적 성공에 그들이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이 전쟁 이후 그렇게 빨리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 사회적 약자를 포괄하는 적절한 사회제도 확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 크고 비싼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 아이들을 떠나 보내야 했던 여성들이다.

궁극적으로 일반인들의 복지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 한국 정부는 1년 내에 해외입양을 영구적으로 중단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지원을 확대하고 대기업에 대한 지원을 축소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부유층들에게 면책을 부여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 대신 외규장각의 의궤와 같은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회수하는 이미지 형성 사업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동시대의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의 행위를 통해 이 사회를 변화시킬 책임을 맡아야 한다. 만약 사회의 특정 사람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굴레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그르다는 생각만 갖지 말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인 일들을 할 수 있다. 공동육아에 참여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어머니들이 학업을 그만두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또 사회적 연계를 통해 젊은 아버지들이 직업을 구하고 직업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부모들은 청소년기 이전이나 그 시기에 자녀들과 성과 피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원하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정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한국 내에서 입양돼야 한다.

민족주의적 자존심에 입각한 피상적 계획보다, 모든 한국인들의 현실에 보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상의 자상함과 너그러움을 우리 함께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편에서 '한 가족의 마음'으로 무언가를 시작해보자.
제인 정 트렌카(Jane Jeong Trenka, 정경아)는 <The Language of Blood>의 저자이자 <Outsiders Within: Writing on Transracial Adoption>의 공동 편집자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미국에서 출판됐다. <The Language of Blood>로 그는 2003년 가을 '반즈 앤 노블'이 선정한 신인작가군에 오르고, 2004년도 미네소타 북 어워드에서 '자서선/회고록' 부문과 '새로운 목소리'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2005년 9월 국내에 <피의 언어>(와이겔리 펴냄)로 번역 출판돼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선정하는 '이달의 문학작품'으로 선정됐다. 친가족을 찾은 그녀는 2004년 이후 한국에 살고 있다.

그가 기고한 이 글은 원래 영어로 쓰여진 것이나, '해외입양인연대'(G.O.A.'L)에서 한글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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