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노동무임금의 임철진 사무총장과 적은 월급으로 때로는 사회복지사가 됐다가 때로는 영업사원이 되기도 하는 김예영 간사가 이끄는 김해생명나눔재단의 단촐한 사무실. 한 겨울의 찬 기운이 사무실 안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눈빛과 뜨거운 마음은 이 기운을 녹이고도 남았다.
"역사는 별로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난 2004년 7월 생명나눔재단 준비위원회를 만들었죠. 소아암 환자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지원하려는 게 목적이었어요. 일시적으로 대책위원들이 조금씩 도와주는 일이 앞선 2000년부터 있었는데 조금 더 시스템적으로 제대로 된 지원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의사, 시민운동가, 전교조지회장, 민주노총 등의 지역 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김해생명나눔재단입니다."
임 총장의 짧은 말로 요약되는 김해생명나눔재단의 탄생사지만, 그 이후 김해생명나눔재단이 해 온 일들은 지난 한 해만 잡아도 두꺼운 책 한 권을 꼬박 채우고도 남는다.
최근 재단이라는 이름이 듣기 흔해진 것만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재단이 활발히 활동하며 성공을 거두는 것 같지만 사실 한국에서 재단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사실상 기부를 바탕으로 한 재정 마련에 있어 어려움이 적은 기업재단이나 중앙정부 또는 지방자치정부가 공공서비스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준민영화 수단으로서의 재단 등이 대부분이다.
김해생명나눔재단과 같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방에서 정부의 지원 없이 특정기업의 재단도 아니면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모금에 기대 재단을 운영하기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한국은 그만큼 기부문화에 낯설고 기부에 어색하다. 특히 치료지원모금은 사람과 돈이 모인다는 서울에서도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기에 작은 소도시인 김해에서 생명나눔재단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2004년에 시작됐지만 법인등록은 한 해를 더 보내고 나서인 2005년 12월에야 했어요. 사회복지법인 등록을 하려니 2억 원이 필요하더군요. 지금도 그렇지만 엄청 큰 돈이죠. 열심히 성금모금을 하고 캠페인을 벌였는데 모인 돈이 1억4000만 원밖에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성의에 감복했는지 도에서 사회복지법인을 해주더군요. 경남도에서 지원법인으로서는 저희가 유일합니다."
시작 자체가 쉽지 않았던 생명나눔재단이다. 생명나눔재단은 빈곤아동, 장애아동, 독거장애노인 등 소외계층을 상대로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로 의료지원에 집중하고 빈곤아동에게는 교육지원도 하는데 장애노인에게는 보청기 지원, 의료용 찜질기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소아난치에 특히 주력하는데 소아난치 환자의 경우 의료비 부족을 겪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의료비 지원에 신경 쓰고 있다.
국가의 복지 영역 밖에서 다양한 사회복지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는 생명나눔재단. 법인등록 시에도 자본금 마련에 애를 먹었는데 지역에서 이러한 다양한 사회복지 지원 사업을 정부의 지원없이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다. 생명나눔재단이 재단의 근본이기도 한 모금활동에 사활을 거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지원한 금액이 15억 원입니다. 최근에는 모금액이 늘어 연간 10억 원 정도를 모금해요. 모금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합니다. 지역 방송을 통해 홍보를 호소하기도 하고 찻집, 주점, 거리모금 등을 산발적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지역에 있는 봉사단체, 관변단체, 시민단체, 소비자단체가 한꺼번에 연대를 하기도 하고 일일찻집이나 주점을 통해 2000만~3000만 원씩 모금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뇌종양 환자였던 장동인 군에 대한 지원사업에는 1억5000만 원의 성금이 모이기도 했다. 법인등록 할 때 1억4000만 원의 종잣돈을 모았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성금이다. 이러한 1회 행사성 성금과 더불어 매달 회원들이 내는 회비도 200여만 원이 된다. 3000원부터 시작해서 10만 원까지 회원들이 내는 돈도 가지각색이다.
다른 재단도 그렇지만 특히 생명나눔재단은 성금을 내는 지역주민이 주인이다. 모금활동을 통한 성과도 당연히 지역주민들의 몫이다. 생명나눔재단은 주최를 하며 조정 역할을 할 뿐 결국 어려운 이들을 돕는 건 바로 지역주민인 것이다. 지역주민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캠페인을 열심히 펼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캠페인에 이렇게 멋진 호응을 보여주는 주민이 없다면 생명나눔재단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사람이 아름다운지, 그리고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고 배우고 있어요. 모금함을 들고 시장통에 다니면 한 시간에 100만 원 가량이 모금되어 돌아와요. 대형마트 앞에 모금함을 두면 1주일에 1000만 원이 모일 때도 있지요. 지금은 온라인 모금이 크게 늘어서 전체 모금액의 절반이나 차지합니다."
지난 2005년에는 해외동포 채련아 어린이의 귀국 치료를 지원했다. 전신 95%의 화상을 입고 귀국한 그는 서울의 '비전호프'라는 화상환자를 돕는 단체에서 초청을 받아 귀국해서 치료를 받게 됐는데 치료비용이 너무 많아 생명나눔재단이 함께 했다. 대부분의 치료비를 여기 김해에서 모금했다. 김해를 넘어 서울과 국내를 넘어 이어지는 생명나눔재단의 활동을 설명하는 김예영 간사의 얼굴에 새삼 미소가 핀다. 그러한 보람이 그들을 이 작은 사무실에 붙들어 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람이 때론 그들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김 간사는 "도와주고 싶은데 다 못해주는 것이 가장 힘들죠. 부모보다야 당연히 못하겠지만 지원하는 아이가 사망할 때에는 너무 힘들어요. 그럴 때는 도와줄 수 있어 행복했던 다른 아이들의 얼굴보다 그 아이의 얼굴만 계속 맴돌아요"라고 말했다.
지원해야할 일들, 사람들은 많아지면서 다양한 방식을 통한 모금활동으로 지원 금액은 늘어나고 있지만 그 금액들은 사무실의 운영비가 아닌 순수하게 일과 사람을 돕는 데에만 사용된다. 그러다보니 상근자는 임 총장과 김 간사 둘뿐이다. 사무실은 건물 주인의 공간 기부로 공짜로 사용하고 있고 임 총장은 월급조차 없다.
"안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있지요. 학생시절에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감옥도 가고 그 후에도 노동운동을 했기에 월급을 받지 않는 것에 나름대로 익숙하다고 할 수도 있지요. 경제적 기준이 세상을 사는 기준은 아닌 것 같아요. 활동 속에서 많은 사람들, 그것도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게 바로 내 공적 재산이 아닌가 싶어요."
이곳에서 월급보다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임 사무총장의 말이다.
어느 정도 안착한 생명나눔재단, 그러나 앞으로 나갈 길이 더 멀다.
"지금은 후원회 조직에 주력하고 있어요. 특히 기업들로부터 모금할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거기서 기금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빈곤아동을 위한 전문교사 파견사업도 준비 중입니다. 지원을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다 지원을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김해에서만 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연락이 많이 오고 있어요. 우리 동네 일을 해결해보고자 시작했는데 일이 많이 커졌지요."
온 길보다 갈 길이 훨씬 먼 김해생명나눔재단, 하지만 워낙 어렵게 시작해서 힘들 것도 없다는 게 임 총장의 설명이다.
"힘들다는 것은 못 느낀다. 몸에 익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지난해 10월에 장애 아동을 위한 수호천사 운동을 벌였는데, 특수교육을 받는 특수학급의 교구, 화장실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했었어요. 특수학급은 있는데 이들을 위한 화장실은 없는 곳이 많더군요. 그래서 그런 곳에 화장실을 만들어주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김해 지역의 8개소에 장애인 화장실을 개보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휠체어가 들어가고, 비데를 놓았지요. 총 6000만 원이 소요됐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피를 말렸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약하기 때문인지 활동이 유독 힘들더군요. 하지만 워낙 없는 데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힘든 줄도 모르겠어요."
아름다운재단을 하면서 재단을 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돈이 모이는 서울에서, 여러 사람과 단체와 기업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재단활동을 조금은 덜 어렵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해라는 소도시에서 일상에 밀접한 숱한 일들과 당장 어린 생명을 살리는 일을 펼쳐나가는 김해생명나눔재단, 그리고 이들에게 오늘도 도움의 손길을 펼칠 그 작은 손들이 귀하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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