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미국에서 공부도 해봤고 미국인 친구도 제법 있는 필자는 희생자들에게 추모와 위로를 전하고픈 마음은 간절하지만 미국에 '사죄'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조승희처럼 주변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외톨이가 되고, 분노를 쌓아 복수를 다짐하며 결국 불특정 다수를 향해 증오범죄(hate-crime)를 저지르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못으로 차체를 쭈욱 긁어버리기도 하고 수십 대 차량의 타이어를 펑크내기도 하며 골목길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총기사고는 비극을 자초한 '미국의 문제'였다
미국의 문제는 총기의 범람으로 인해 이번 사건처럼 다중살인(mass murder)이 가능할 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희생된다는 것이다. 여섯 살짜리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같은 반 친구를 총으로 쏴 절명케 하고, 열 살짜리 꼬마가 나이키 신발 때문에 총을 쏴 죽은 아이의 발에서 신발을 빼 신는 곳이 미국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어느 학교의 중국계 미국인 대학원생은 지도교수가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학교에 총을 가져가 살해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획기적인 총기규제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극은 도처에서 순서만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적어도 총기사고에 있어서만큼은 한마디로 '비극이 준비된 사회'인 것이다.
그리고 조승희를 가해자로 몰아버리고 32명만을 희생자로 한정지어 추모하자는 이 대사의 발상은 동의하기 힘들다. 조승희를 궁지로 몰아넣은 미국사회의 문제는 거두절미하고 그의 행동만을 지적하는 것도 미국전문가 다운 발상이 아니다. 이렇듯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네오콘이라 불리는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즐겨 애용하는 전략이다.
또 그들은 개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게 어려울 경우 엉뚱한 이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하며 본질을 호도하기도 한다. 1999년 미국 콜로라도 주의 콜럼바인고교에서 두 학생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뜨려 선생을 포함한 열세 명이 희생됐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총기규제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고 록밴드 '마릴린 맨슨'을 그 사태의 범인으로 지목해 비난했다. 맨슨 CD가 가해자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정말 난데없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와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Face Off)>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통과'해야 한국에서 출세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버지니아 참사는 작년 하인즈 워드 열풍의 정확히 정반대 방향이다. 미국 언론의 표현대로 민족주의적 죄의식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하인즈 워드의 경기를 보며 한국을 품평(?) 하지 않듯 그들은 조승희를 보며 한국을 논하지 않는다. 한국의 과잉반응에 놀란 그들이 오히려 말리고 나서는 꼴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들은 이렇게 미국에 사과하지 못해 안달인가.
우리나라에서 출세할 수 있는, 그리고 계급을 재생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국을 통과(?)하는 것이다. 즉 영어를 잘 하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얼마 전 있었던 이른바 '토플대란'이 그 단적인 예다. 세계 다른 나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현상이다. 5년 전 5만여 명이던 토플 응시자가 작년 13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일본과 중국보다도 많은 수인데 이들 국가의 인구를 감안하면 토플의 실질적 비중은 그 몇 배는 족히 될 것이다.
게다가 토플 점수가 외고 등 특목고와 일부 대학의 수시입학 및 특별전형의 근거로 활용되니 중고생까지 토플시험에 전력투구를 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아들의 토플 지원 때문에 온 가족이 사흘 밤낮을 컴퓨터 앞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를 '접수의 그 순간'을 위해 모니터만 바라보는 '광클(광기어린 클릭) 모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고, 또 토플을 보기 위해 일본이나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 9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미국 대학에 재학 중인 외국 유학생 중 13.5%로 당당 1등이다. 인도, 중국, 일본, 대만 순서로 뒤를 잇고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은 유학생 수에서 인도, 중국보다 적었고 일본, 대만과는 엎치락 뒤치락 했는데 그새 추월한 것이다. 또 1만이 넘는 초·중·고생 조기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자라고 있다.
이렇게 미국교육에 대한 맹신과 맹종이 커지다 보니 유학생이 데리고 나가는 부인과 자녀 등 동반가족도 우리가 압도적 1등이다. 2005년 9월 현재 중국이 1만8000명, 인도가 8000명, 일본은 6000명의 부양가족을 데리고 나가는데 한국은 무려 5만2000명이었다. 기왕 나간 김에 자식의 영어문제까지 '한방'에 해결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이 이럴진대 미국학교에서 미국인들을 쏘다니….
도둑이 제발 저린 꼴
우리가 그런 극심한 불안증세를 보이고 또 전에 없던 호들갑스런 사과를 해야만 했던 배경엔 한국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정착했던 화교들을 조직적, 법적으로 핍박해 그들 상당수를 이 땅에서 떠나게 했다. 그래서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엔 차이나타운 하나 없다. 세계적 거대도시 중 아마도 유일무이한 사례일 것이다. 사실 서울과 부산은 있던 차이나타운마저 몰아내 버렸다.
10여 년 전부터 국내로 들어와 국가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드러내 놓고 차별했다. 사실상 우리가 필요해 불러들여 놓고는 정작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우리의 '쏜살같은 사과'는 사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다. 갖은 방법으로 괴롭혀 가며 우리와 '다른 이'들을 차별했으니 이번 사건의 후폭풍이 지극히 심대할 것을 스스로 예상했기 때문 아닐까. 교민 외에도 이민, 유학, 원정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있지 않은가. 과잉 추모는 마치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애원 같아 보인다.
이렇듯 인종차별이 일상화된 한국인들이 이 사건의 여파로 미국에서 당할 인종차별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쏟아 부은 사죄에 미국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적어도 표면적으론 인종차별을 인정하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데 한국인들은 자꾸 이 문제를 인종적 시각에서 다루기 때문이다.
애도에도 인종과 계급이 있나
우리의 애도는 이상하게 편중돼 있다. 버지니아 참사가 있던 날 이라크에선 200여 명의 무고한 인명이 폭탄테러로 희생됐다. 얼마 전 여수에선 공권력의 살인과 다름없는 외국인노동자 참사가 있었다. 한미 FTA의 부당함을 알리려 분신한 고 허세욱 씨가 있었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진심으로 추모했는가.
우리는 인종과 계급에 따라 애도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가. 애도에도 국적이 있는가. 마치 카메라 달린 유도미사일을 활용하여 정교한 외과 수술마냥 국부를 골라 공격한다는 '초정밀 타격(surgical strike)'을 연상케 한다. 참으로 보기 드문 '초정밀 애도'다.
그리고 이참에 미국 걱정만 말고 우리 걱정도 해보자. 국내에는 50만 명이 넘는 혼혈인,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그들의 자녀가 있다. 이들과 공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2005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아랍계 이주민 폭동은 프랑스가 부족한 산업인력 수급을 위해 본격적으로 이주민을 받아들인 지 채 반세기도 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온 지 이제 1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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