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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기 왕' 김일 씨, 지병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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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치기 왕' 김일 씨, 지병으로 별세

1960~70년대 '국민영웅' 프로레슬러

1960∼7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던 `박치기 왕' 김일 씨가 26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주치의인 을지병원 순환기내과 최재웅 교수는 "평소 당뇨합병증과 고혈압, 신부전 등의 지병과 싸워 온 김 씨가 이날 낮 12시17분 사망했다"고 밝혔다.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신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하루 전날 급격히 혈압이 낮아지면서 의식을 잃은 김 씨는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심폐소생술과 혈압을 높이는 치료 등을 받았으나 끝내 숨을 거뒀으며 아들 수안(56) 씨와 첫째 딸 애자(61) 씨, 둘째 딸 순희(59 )씨 등 친인척, 제자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지인 30여 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이왕표 프로레슬링연맹 회장은 "선생님은 얼마 전만 해도 출판기념회를 열 것이라며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돼 너무 안타깝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난 1957년 역도산체육관에 입문하며 레슬링을 시작한 김 씨는 1963년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당시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았던 국민적 영웅.
  
  특히 특유의 박치기 기술로 상대를 제압할 때면 전 국민이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면서 당시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다.
  
  고(故) 장영철, 천규덕 등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와 함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1970년대 중반 현역에서 물러난 김 씨는 그 이후 일본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봐야 했고 경기 후유증으로 지병까지 생기면서 외로운 투병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다 김 씨의 팬이었던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1994년 1월 귀국해 10여 년간 을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며 한 때 건강이 호전돼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사업 등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난해 결장 제거수술 이후 인공항문에 의지해야 했다.
  
  최근에는 만성신부전증까지 겹쳐 신장투석을 받는 등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했고 결국 이날 세상을 떠났다.
  
  한편 김 씨의 빈소는 을지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특실에 마련됐고 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을 한 뒤 유골은 고향 전남에 안치될 예정이다.
  
김일은 누구인가
  
  먹고 살기 힘들었던 1960~70년대 호쾌한 박치기로 거구들을 쓰러뜨리며 전 국민을 흥분시켰던 프로레슬러 김일.
  
  은퇴 후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기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배들을 격려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김일이 오랜 투병 끝에 26일 오전 12시17분 눈을 감았다.
  
  요즘처럼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등과 같은 즐길 거리가 변변치 않던 시절에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TV 앞으로 끌어 모은 최고의 인기종목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일이 서 있었다.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당시로서는 장신인 180㎝의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마을 씨름대회를 휘어잡았다.
  
  동네 장사로만 남을 수 없었던 김일은 한 잡지에서 세계프로레슬링 챔피언에 등극하며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1956년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밀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한 그는 곧 경찰에 잡히고 1년간 형무소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김일은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고 이에 역도산은 보증을 서 김일을 형무소에서 빼내게 되고 1957년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그 이후 김일은 지옥훈련을 견디며 박치기 기술을 연마했고 1963년 스승인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숨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링에 올랐다.
  
  6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올아시아태그에서 챔피언에 오른 김일은 이듬해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등극, 최고의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김일은 87년 아내를 백혈병으로 떠나 보냈고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자신도 줄곧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군대에 보낸 막내 아들마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내면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종종 후배들의 프로레슬링이나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왕년에 링에서 호령했던 박치기왕 김일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중반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고 지병은 점점 악화했다.
  
  그러던 중 김일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접한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94년 1월 일본에서 국내로 건너온 뒤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으며 생활을 하게 됐다.
  
  국내에 머무르면서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 사업에 힘을 쏟아 붇기도 한 그는 95년 4월 일본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을 갖기도 했다. 국내 은퇴식은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가졌다.
  
  최근에는 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그는 어김 없이 모습을 나타냈고 30년 이상 된 애제자 이왕표와 수시로 접촉하며 레슬링 발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일은 특히 남은 여생을 프로레슬링과 관련한 기억을 되돌아 보며 지내기도 했다.
  
  지난 2월에는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스승 역도산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고 '레슬링 쇼' 파문으로 41년 간 서로 등을 돌리고 지내 왔던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을 방문해 뒤늦게 화해하기도 했다.
  
  김일과 함께 60대를 풍미했던 장영철은 두 달여 전 지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 프로레슬링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난해 11월 그는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며 한 때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왕표 씨의 간병 등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회복돼 사회 생활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달 10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 앞서 특별 시구자로 나선 김일은 휠체어를 탄 채 힘차게 공을 뿌렸지만 이것이 팬들을 위한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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