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여기서 그만 접을 것 같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200여 일이 넘는 파업을 지속해 왔지만, 노동부의 이번 발표는 이들에게도 충격이 클 것은 분명했다. 노동문제를 오래 담당해 온 기자들조차 이번 발표를 보면서 "안타깝지만 나라면 여기서 그만 접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KTX의 전사들'은 이번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들은 새로운 싸움을 '또' 시작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 연휴 기간에도 이들은 귀성객들을 대상으로 KTX 여승무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노동부의 불법파견 조사 결과의 부당성을 알리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제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싸우기를 포기한다. 싸움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평균 연령 25~26세의 젊고 예쁜, 영어도 잘하는 대졸 여성들인 이들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이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날 같은 빛 마저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이 순간, 이들이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그 희망은 어느 대지 위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하청노동자의 삶은 매 한가지"
200일이 넘도록 파업을 이어 온 본인들 스스로도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과 좌절을 많이 지켜봐 온 사람들도 "KTX 여승무원들의 파업이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그 힘의 원천을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지난 5월 철도공사가 이들에게 간접고용 정규직, 즉 하청업체 소속의 정규직 승무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여승무원들이 파업을 포기하고 그 시험에 응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여승무원들의 응시율은 예상보다 저조했다.
철도공사는 노동부의 재조사 발표 이후에도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을 느껴" 베푸는 선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민세원 KTX열차승무지부 서울지부장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하청노동자의 삶은 매 한가지"라고 말했다. 철도공사의 이같은 제안이 결코 KTX여승무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켜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 없이 파업 전과 똑같은 하청노동자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민 지부장은 거듭 강조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 상상보다 깊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연대회의 기획국장도 비슷한 설명을 내놓았다. 비단 KTX 여승무원들뿐 아니라 최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보가 이제까지 노동운동에서 찾아 보기 힘들었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포항 건설노조만 하더라도 지도부가 마련해 온 잠정합의안을 조합원들은 두 차례나 거부했다. 한 번은 조합원들의 반발로 투표 자체가 무산됐고, 또 한 번은 부결됐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도 최근 지도부가 사측과 체결한 임단협 잠정합의안을 조합원들이 부결시켰다.
오민규 국장은 "포항 건설노조나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의 조합원들에게 '대안은 있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대안은 모르겠지만 이건 못 받아들인다'고 말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같은 조합원들의 행동을 "내가 얼마나 더 싸울 수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 판단을 떠나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느껴 온 억울함과 서러움을 지도부에서 도출한 합의안이 못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 국장은 "오히려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정서를 못 따라가는 이런 현상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 지도부와 조합원의 정서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빨리 그만둘수록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싸움을 여승무원들이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우다.
"반드시 이길 싸움인데…" 명백한 상황은 또 하나의 원동력
또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 기타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더 희망을 놓기 어려운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파업 초기부터 이들은 "젊고 예쁜 언니들이 머리띠를 묶었다"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다른 비정규직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규직 노조인 철도노조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더욱이 변호사, 노무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 법적으로는 불법파견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노동부의 재조사 결과를 이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너무나 이길 것이 분명했던 싸움.' 노동부는 비록 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들이 싸움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은 '분명한 상황'에 있는지도 모른다.
민세원 지부장도 "우리가 먼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으로 믿기에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민 지부장은 "사실 우리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이상 희망은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만두더라도 어디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을 전했다. 파업 초기 350여 명에 달하던 KTX 여승무원들 가운데 200일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130여 명의 여승무원들의 경우 대부분이 KTX 승무원이 되기 전에 사회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KTX 여승무원들과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이들의 얘기를 자세히 알고 있는 조 교수는 "직장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중간에 많이들 그만뒀고 오히려 직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오랜 파업에도 덜 힘들어 한다"고 설명했다. "사회 경험이 있는 여승무원들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업인 공사에서조차 이런 식이면 다른 곳은 이보다 더 할 것 아니냐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를 거쳐 이런 저런 직장을 다녀 본 민세원 지부장 역시 자신의 사회 경험이 오히려 오랜 싸움의 힘이 됐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다른 어딘가에 취직을 하더라도 KTX 여승무원으로 겪어 왔던 일련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해야만 한다는 '진실'. 아무 것도 몰랐던 승무원 초기로 돌아가 또 어디선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설움을 묵묵히 참아내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결코 싸움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닐까.
KTX 여승무원,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다
현재 KTX 여승무원들의 파업을 이끌고 있는 KTX열차승무지부 노조의 간부들은 소위 학생운동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한 파업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한 노동자가 됐다. 민 지부장은 "서른이 넘도록 돈 벌겠다는 것 외에 삶의 목표가 없던 내가 이제 삶의 목표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 '언니들'의 싸움이 민 지부장의 말대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민 지부장은 "우리의 싸움이 이기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정말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라는 것의 반증"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우리 사회의 수준은 거기까지인지도 모른다.
승리에 대한 신념과 부당함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분노, 그리고 함께 동고동락해 온 동료들에 대한 신의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삶의 심연에 뿌리를 둔 절박함이 한 데 엉겨붙은 이들의 싸움은 그 결말이 어떻게 나든 이미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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