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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배·가압류' 망령, 비정규직 상대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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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손배·가압류' 망령, 비정규직 상대로 부활

수백억원으로 급증…과중한 압박으로 갈등증폭 불씨

KTX 여승무원 노조에 3억, 포항 건설노조에 18억, 울산 플랜트노조에 20억….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억, 억' 소리를 들으며 산다. 로또 당첨금이 아니다. 이들이 요구받은 손해배상 액수다.

2003년 '신종 노조탄압 수단'이라 불리며 노동계의 반발을 샀던 '손배·가압류' 문제가 잠시 주춤하다가 2005년 이후 다시 증가추세로 돌아섰다. 특히 최근 비정규직 분야의 노사분쟁이 증가하며 대부분의 손배소송이 비정규직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최근 대법원이 2003년의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 24억여 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이같은 손배소송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사용자 측에서는 "불법파업 및 업무방해 등의 불법행위를 막고, 이를 막지 못했을 때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손배소송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손배·가압류가 노동자 개인은 물론 노조활동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파괴적이다.

▲ KTX 여승무원 노조원들이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 프레시안

■ 2005년 이후 비정규직에 손배소송 집중:
노동부에 따르면 노조 활동과 관련된 연도별 손해배상 소송액은 2002년 210억여 원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자살을 기점으로 줄어들어 2004년에는 67억 원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민주노총은 손배액에 부분에서 노동부보다 2배 가량 많게 집계하고 있지만 2003년을 기점으로 줄어들었다는 데 대해서는 양쪽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2005년부터는 손배·가압류가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 하청노조, 기륭전자 노조, 익산CC 노조 등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제기된 손배소 금액만 모두 400억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KTX 여승무원 노조에 대해 철도공사가 '스티커 제거 비용'으로 3억여 원, ㈜한국철도유통이 파업기간 손실 명목으로 5600만 원의 손배소송을 각각 제기했다. '점거사태'를 겪은 포스코건설도 포항 건설노조를 상대로 18억여 원의 손배소송을 준비 중이다. 현재 해결되지 않은 전체 손배소송액 가운데 85% 가량이 비정규직 노조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비정규직 노조 손배소송이 늘어난 이유는: 노동법 상 합법파업에 대해서는 손배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비정규직 분쟁은 대개 '불법' 딱지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비정규직 노조의 대부분이 하청의 형태로 공정의 일부분을 담당하기 때문에 '기계를 멈추는' 파업 본래의 효과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불법행동'을 택하는 일이 잦다.

사용자 측은 하청계약을 해지하는 형태로 손쉽게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고, 노조 조직률이 낮은 사업장의 경우 노조가 비노조원을 상대로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다가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고소를 당하기 일쑤다. 또한 근로계약 상 하청업체가 사용자이기 때문에 법률상 하청업체와 '쟁의'를 벌여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원청회사가 '사용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조는 원청을 상대로 실력행사를 하는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 원청업체는 계약상 사용자가 아니고, 따라서 법률상 쟁의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포항 건설노조의 '포스코 점거'와 KTX 여승무원 노조의 '스티커 투쟁' 등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 들이다.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은 "대기업 노조의 경우 노사관계가 안정돼 가는 경향이지만, 막 생겨나기 시작한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끊임없는 분쟁을 겪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파업 절차가 까다롭고, 특히 비정규직의 경우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아 수많은 손배와 고소·고발에 시달리는 데 반해, 사용자는 불법 파견 판정을 받아도 끄떡없다"고 비판했다.

법원도 '파업 목적'의 정당성보다 '파업 절차'의 합법성에 무게를 두고 판결하기 때문에 노조 측이 송사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다.

■ 가장 악랄한 수법-개인에게 손배 때리기: KTX 여승무원 노조원들도 최근 '3억짜리' 손배소장을 받고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그동안 파업을 응원해주던 주위 가족들도 손배소장을 보고서는 '이제 그만하고 새 직장을 찾으라'고 애원한다고 한다.

한 노조원은 "차라리 감옥을 가라면 가겠지만, 3억 원을 내라면…"이라고 말 끝을 흐렸다. 이런 상태에서 사용자 측이 "노조를 탈퇴하면 손배소송을 취하해 주겠다"고 회유하면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던 노조원들도 흔들리게 된다.

'단체행동'인 파업 등에 대해 개인에게 손배·가압류를 제기하는 것이 가혹하다는 사회적 비난에 따라 개인을 상대로 한 손배·가압류는 줄어드는 추세였으나 최근 비정규직 분야에서는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조직이 잘 갖춰진 대규모 노조는 손배·가압류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조직력이 약하고 노조 경험이 적은 비정규직 노조에게는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가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노조 자체를 상대로 한 손배소로 소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손배를 거는 행위는 노조 와해 공작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 가압류 들어오면 살 길이 막막: 수억~수십억 원에 이르는 손배소는 개별 노동자들에게 '억' 소리 나는 눈앞 캄캄한 일이지만, 가압류가 들어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당장의 생계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의 폐해를 인정해 최저생계비를 남겨두도록 급여 가압류의 한도를 제한했지만, 전세값이나 통장잔액 등의 자산은 여전히 위태로운 상태다.

이러한 피해는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집안에 각종 가압류 딱지가 덕지덕지 붙고 급여 가압류로 수입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아이들 학원비는 물론 먹고 입는 비용까지 줄여야만 한다. 2003년 1월 분신자살한 배달호 씨는 유서에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이 없을 것이다"라고 토로해 가압류의 잔인함을 보여줬다.

■ 손배액 산정에는 문제 없나: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 노조원들에게 청구한 손배액 3억 원의 산출 근거는 '스티커 한 장당 제거비용 5506원'이라는 것이다. 스티커 한 장을 떼는 데 15분이 걸리는데, 철도공사 정규직 직원의 15분 간의 임금과 스티커 제거용 스프레이 등 재료 구입비용을 합산한 금액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KTX 여승무원 노조는 "공사 측이 스티커를 제거하기 위해 인건비를 별도로 지출한 것도 아니면서 금액을 부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노조원은 "우스개 소리로 '만약 나한테 3억을 주면 스티커를 내가 다 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만약 손배소송이 진행돼 스티커 부착의 불법성이 인정되면 스티커 부착 비용을 두고 노사가 다퉈야 할 판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불법 파업 등으로 인한 영업손실 비용을 손배액에 그대로 포함시켜 청구하는데, 노조 측은 이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파업기간의 손실액은 파업이 끝난 뒤 특근과 잔업 등을 통해 보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파업 종료 이후의 보충은 무시하고 파업 기간의 손해만 따져 손배를 청구하고 법원이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한 "정확한 손해액을 산정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춘 손해사정인을 고용해 정밀한 조사를 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노조는 회사의 영업기밀에 접근할 수 없고 산정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당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앉아서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 포항 건설노조가 점거했던 포스코 건물. ⓒ 프레시안

■ "손배 때려서 다 받아낸 기업 있나":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은 "그동안의 사례를 보건대 손배·가압류 소송을 걸어 법원에서 이긴 뒤 손배액을 전부 다 받아내는 회사는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결국 사용자 측은 손배·가압류 소송 금액이 개별 노동자가 갚을 수 없는 수준임을 뻔히 알면서도 '노조 탄압'의 수단으로 손배·가압류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2~3년씩 걸리는 손배·가압류 소송을 걸어 두면 사용자 측은 노조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에이스' 카드를 한 장 더 쥐고 카드를 치는 셈이다. 그래서 손배소송의 대부분은 노조가 백기항복을 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양측의 합의에 의해 취하된다. 하지만 이 에이스 카드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손배·가압류가 또 다른 노사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 철도노조는 "철도공사를 상대로 24억 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어떻게 갚으라는 것인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노조의 고정자산에 대해 압류가 들어오고 조합비에 대해 압류가 들어오게 될 텐데, 이는 노조더러 문을 닫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게 과연 노사관계를 제대로 풀어나가자던 사측이 취할 태도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철도노조의 손배·가압류 문제가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분야에서 손배·가압류가 확산되면서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다. 고용 불안정, 낮은 임금, 취약한 조직력 등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손배·가압류로 인해 겪는 고통은 대규모 조직 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크다.

2003년에 두산중공업 배달호 씨, 한진중공업 김주익 씨, 세원테크 이해남 씨 등이 목을 매거나 분신하기에 이른 과정에도 손배·가압류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이런 '희생'의 기억이 생생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재의 상황을 냉철히 살펴봐야 한다고 노동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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