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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의 힘'으로 월드컵에 첫 키스한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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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의 힘'으로 월드컵에 첫 키스한 독일

[프레시안 스포츠] 독일 축구의 역사 바꾼 54년 스위스 대회

2006년 월드컵의 개최국인 독일.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가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해지자 베팅 전문 업체들은 잉글랜드 대신 독일을 브라질에 이어 이번 월드컵 우승후보 2순위로 격상시켰다. 사실 독일은 이번 월드컵에서도 홈 그라운드의 이점에다 월드컵 등 큰 대회마다 '효험'을 발휘하는 게르만 정신에 적지 않은 기대를 하고 있다.

독일 축구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것은 '이웃집' 스위스에 열린 1954년 월드컵이었다. 토너먼트에 강한 독일 축구의 전통이 만들어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52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서독의 코드는 협동심과 동료애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 팀은 헝가리. 유럽 대륙팀에는 패배를 허용하지 않던 축구 종가 잉글랜드 팀을 어웨이 경기에서 6-3으로 격파한 헝가리는 막강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세계 축구를 평정했다. '신비한 마자르인(Magic Magyar)'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헝가리 축구의 중심은 페렌츠 푸슈카스, 산도르 코치슈, 난도르 히덱쿠티가 있었다. 이들 중 훗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 전성기를 이끌었던 푸슈카스는 헝가리의 자존심으로서 스위스 월드컵에서 '황제 등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독의 제프 헤어베르거 감독은 월드컵에 대비하기 위해 툰 호숫가에 위치한 슈피체에 훈련캠프를 열어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슈피체에서의 훈련에서 헤어베르거 감독이 중점을 둔 것은 협동심과 동료애였다. 그는 선수들이 동료에 대해 서로서로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룸 메이트를 정했다. 서독의 오른쪽 공격을 책임질 막스 모록과 베른하르트 클로트, 성격이 대조적인 헬무트 란과 프리츠 발터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카이저스라우테른의 전설로 남아 있는 프리츠 발터와 함께 방을 쓰게 된 헬무트 란은 남미 원정경기 중 헤어베르거 감독의 연락을 받고 급히 대표팀의 합류한 선수였다. 그는 유년시절을 탄광 마을에서 보냈지만 낙천적인 성격에 유머감각까지 갖춘, 서독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반면 서독의 주장 프리츠 발터는 심판의 잘못된 판정, 기자들의 비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선수였다. 발터는 특히 날씨에 따라 플레이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보다는 비가 내리는 것을 좋아했다. 경기 내내 보슬비가 내리는 날씨를 '프리츠 발터 날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헝가리 푸슈카스의 부상

한국,터키,헝가리와 함께 같은 조에 편성된 독일은 첫번째 게임에서 터키를 이겼다. 서독의 다음 상대는 최강 헝가리. 서독의 헤어베르거 감독은 한국과의 경기에서 승리가 예상되는 터키와의 플레이오프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헝가리 전에는 베스트 멤버를 내보내지 않았다. 경기결과는 3-8로 헝가리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서독으로서는 후보 선수 헬무트 란이 득점에 성공하는 수확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푸스카스는 서독 선수의 태클로 발목 부상을 당했다. 영국의 저명한 축구 평론가 브라이언 글랜빌은 훗날 월드컵 역사를 정리하는 자신의 책을 통해 "헝가리와의 예선전에서 베르너 리브리히 선수가 푸슈카스에게 했던 파울은 독일을 우승시켰다"고 분석했다. 1-5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리브리히의 태클을 놓고 독일 언론은 "우리의 행동은 옳지 못했다. 리브리히는 다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서는 안된다"는 악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축구전문가들은 리브리히의 태클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땅에 닿을 때 발목을 접질린 푸슈카스의 불운이 부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푸슈카스의 부상이 독일 팀의 우승을 만들었다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었다. 푸슈카스는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첫 골을 뽑아내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수중전 승리 이끈 아디다스 축구화

결승전에서 서독은 헝가리와 재회했다. 베른의 방크도르프 슈타디온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미 서독은 경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아돌프 다슬러(Adolf Dassler)가 고안한 축구화 때문이었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는 징을 교체할 수 있어서 진흙에서 경기를 펼치는 데 유리했다. 아디 다슬러는 '프리츠 발터 날씨'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독일 선수들의 신발에 평소보다 긴 징을 장착했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아돌프 다슬러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제시 오웬스에게 신발을 건네 주기도 했던 스포츠화 역사의 산 증인. 신발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를 만들었고, 아돌프와 불화를 겪었던 친형 루돌프 다슬러(Rudolf Dassler)는 푸마를 탄생시켰다.
▲ 1954년 월드컵 결승전이 펼쳐지기 전 독일의 발터(左)와 헝가리의 푸슈카스(右)가 악수를 교환하고 있다. ⓒplanetfootball

54년 월드컵 결승은 아디다스 축구화의 우수성과 함께 불굴의 투지를 보였던 서독 팀을 위한 경기였다. 헝가리에게 2-0으로 뒤지던 서독은 끝내 동점골을 터뜨렸다. 후반 38분 월드컵 결승을 라디오로 중계하고 있던 헤르베르트 짐머만은 독일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짐머만의 흥분된 목소리는 패전국 독일 국민의 아픔을 한꺼번에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란 선수 슛했습니다. 골입니다. 독일을 위한 골입니다. 독일이 3-2로 앞서갑니다. 저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라며 '베른의 기적'을 알렸다.

서독의 월드컵 우승을 만들어낸 이면에는 헤어베르거 감독의 철저한 준비성도 숨어 있었다.헤어베르거 감독은 토너먼트가 펼쳐지기 2주전 53년 펼쳐진 헝가리와 잉글랜드의 경기장면을 서독 선수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독 선수들은 처음 경기 필름을 볼 때 헝가리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넋이 나가 있었지만 두번째에는 큰 교훈을 얻었다. 그 교훈은 어떤 팀도 매번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베른의 기적, 라인강의 기적으로

후보선수에서 일약 결승전 동점골과 결승골까지 작렬한 헬무트 란. 경기 내내 활발한 플레이를 했던 헬무트 란은 일반적인 라이트 윙과는 달리 왼발을 잘 쓰기로 소문난 선수였다. 그는 전반전에는 좌측에서 공격을 리드하며 헝가리 수비를 당황케 했고 후반전에는 위치를 가리지 않으며 종횡무진했다. 헝가리로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헬무트 란의 깜짝 플레이에 완벽하게 패배했다.

헝가리의 푸슈카스는 월드컵이 끝난 뒤 <프랑스 풋볼>과의 인터뷰에서 "서독 선수들이 약물복용을 했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푸슈카스는 "월드컵 이후 헬무트 란, 프리츠 발터, 모록 등이 모두 황달에 걸린 것은 약물복용의 증거"라고 덧붙엿다. 하지만 푸슈카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독일 선수들의 황달에 걸린 이유는 포도당과 비타민 투여를 위해 맞았던 주사 바늘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푸슈카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헝가리와 서독의 1954년 월드컵 결승전은 향후 두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50년대 축구 전성기를 구가하던 헝가리 축구는 이 경기의 패배 이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더욱이 1956년 일어난 '헝가리 의거'가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신비한 마자르인'의 주축이었던 헝가리의 축구스타들은 하나 둘씩 해외로 떠났다. 반면 서독은 예상하지 못했던 월드컵 우승으로 세계축구의 강호가 됐으며 '베른의 기적'은 곧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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