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북한의 일방적인 연기 통보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남측이 북측을 대하는 태도에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일방주의로 남측을 압박하겠다는 것은 북측 스스로 그토록 강조해온 "우리민족끼리" 정신에도 "민족의 화해와 협력"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북측의 일방적 조치로 인한 1차적인 피해자들은 고령의 이산가족들이다. 혈육의 정과 이산의 고통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북한의 태도는 그 어떤 명분이나 구실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북한이 즉각 연기 방침을 철회하고 조속히 이산가족 상봉에 나서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북한이 왜 이러한 조치를 취하고 나섰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과 혐오감 때문에 정확한 상황 파악과 대안 모색을 위한 노력마저도 소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21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
일단 북한이 2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통해 밝힌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개성공단 정상화 등 최근 남북관계의 개선을 두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결과이자 원칙있는 대북정책의 성과"라고 간주해온 박근혜 정부에 인식에 대한 불만이다. "우리(북한)의 성의있는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북남관계의 진전을 저들(박근혜 정부)의 원칙론의 결과로 광고하는 것이야말로 파렴치한 날강도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북한이 공들이고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 북한의 '돈줄'이라는 일부의 언급과 평양 국제역도대회에서 남측의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을 두고 '북한이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 구체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둘째는 이른바 '이석기 내란 음모사건'을 북한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한 불만이다. 북한은 9월 6일에 조평통을 통해 "괴뢰보수패당이 이번 사건을 우리와 억지로 결부시켜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대화 노력과 북남관계 개선 의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용납 못할 도발"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런데 김관진 국방장관은 9월 15일 "북한은 종북세력과 연계하여 사이버전, 미디어전, 테러 등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이른바 4세대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사건은 그 준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북한의 조평통은 사흘 후 김 장관의 발언을 두고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성의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 공화국에 대한 참을수 없는 우롱이고 용납 못할 도전"이라고 비난하면서 "김관진과 같은 역도를 끼고 돌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떠드는 것은 민심과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허위와 기만으로 밖에 달리는 볼 수 없다"며 반발했다.
셋째는 남한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의한 통일을 떠벌이며 미국상전과 야합하여 동족을 반대하고 침략하기 위한 전쟁연습소동과 무력증강책동에 광분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 북미대화와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에, 남한이 이에 호응하기보다는 '비핵화 조치가 우선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고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을 근거로 북한의 화학무기 위협론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강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남북관계의 성과를 박근혜 정부의 업적으로 포장하려는 남한의 태도, 이석기 사태를 북한과 연계해 공안정국으로 조성하려는 남한 당국의 움직임, 북미대화와 6자회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후 금강산 관광 사업 재개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판단을 종합해 이산가족 상봉 연기라는 카드를 꺼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남북대화 재개 이후 줄곧 "인내심"을 강조하고 남측 고위 당국자의 반북적 발언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전술적 변덕' 수준인지, 아니면 '전략적 판단'인지의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라고 밝혔고, 남한의 태도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밝힌 만큼 판 자체를 깨겠다는 의미는 아닐 공산이 커 보인다.
'내 덕분, 네 탓' 공방에서 벗어나야
문제는 북한의 일방적 조치가 야기할 부정적 확산 효과이다. 개성공단 정상화와 이산가족 상봉 행사 합의로 조금씩 누그러지던 남한의 반북 여론은 북한의 연기 통보로 또다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는 대화보다는 압박과 제재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박근혜 정부 내 대북강경파들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대화파의 씨가 말랐다'의 워싱턴에서도 북한의 변덕스러움을 이유로 대북 대화에 부정적인 기류가 더욱 확산될 것이다.
북한의 전략적 목표가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병행 발전을 통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평화적 환경 조성"에 있다면, 이산가족 상봉 연기로 인해 이러한 전략적 목표가 더더욱 멀어지게 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후 3개월여의 과정은 극적인 개성공단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그리 좋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좀 풀리면 '내 덕분'이고 꼬이면 '네 탓'이라는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불신을 키우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한 북·미 관계 개선 없이 남북관계만 좋아지기 어렵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추가적인 상황 악화를 방지하고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남북한 모두의 태도 변화가 요구된다. 우선 북한은 조속히 이산가족 상봉에 임해야 한다. 남한 역시 북한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주는 불필요한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특히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울러 이제야말로 남북관계를 포괄적이고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고위급 회담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실무회담 수준에서 문제를 풀기에는 불신의 골도 너무 깊게 패였고, 또 풀어야 할 사안의 성격도 정치적 결단을 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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