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추석 무렵 구미에서 발생한 불산 누출사고는 사업장 안의 산업재해가 결국 전 국민의 건강권 생명권 재산권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사회적으로 체득하게 했다. 그 이후 1년, 현장은 달라졌는가? 오히려 삼성 불산 누출사고 등 연이은 화학사고, 여수 대림 산단 사고, 당진 현대제철 사고, 울산 삼성정밀화학 사고 등 중대재해가 연속으로 터졌다. 재벌 대기업의 수천 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 적발되고, 정부는 사업장의 안전수칙 준수와 주요사업장 전담 감독관 제도 운영을 주요 대책의 하나로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산업안전감독관 증원은 3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170만여 개 사업장을 280여 명의 산업안전감독관이 담당하고 있어 감독관 1인당 6000여 개 사업장을 담당하는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구미 불산 누출사고에도 불구하고 산업재해의 문제가 여전히 사업장 안의 일부 노동자만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제한성을 드러내고 있다. 안전보건 전문가들의 상당수는 산재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산업재해의 실질 규모가 드러나지 않는 산재 은폐의 문제를 지적한다.
▲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의 한 밭에 있는 콩 잎이 누렇게 말라 죽은 모습. 이곳은 지난해 9월 27일 불산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한 휴브글로벌과 200m 가량 떨어져 있다. ⓒ연합뉴스 |
한국의 산재통계는 참으로 기이하다. 산재사망은 OECD 국가 1위이지만, 산재 전체 통계로 보면 OECD 하위권이다. 1920년대 보험통계의 실물 분석을 통해 '1:29:300'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이 생겼다. 이는 1건의 대형사고 이전에는 29건의 비슷한 사고가 있고, 300건의 아차사고(사고 징후)가 있다는 것이다. 안전보건에 통용되는 이 법칙에 의하면 산재사망 1위인 한국은 산업재해도 1위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국보다 산재사망만인율이 낮은 독일만 하더라도 매년 100만 명이 산재인데, 한국은 매년 9만여 명만이 산재로 발표되는 것이다.
산재의 실질규모에 대한 국내 연구보고가 상당수 있다. 2007년 산업안전공단 <국가안전관리 전략수립을 위한 직업안전연구>가 그 중의 하나다.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건강보험, 자동차 보험, 산재보험 자료를 전수 조사한 결과 1년 동안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받은 건수는 약 1300만 건이다. 이중 일하다 다친 경우는 288만 건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산재 통계는 9만여 명으로 돼있다. 2008년 서울대 의대 이진석 교수팀의 연구에서도 2006년 건강보험 이용환자 1238만 800명 중 직장에서 재해를 입은 사람을 278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그 중 약 2.8%만이 산재보험으로 보상받았다. 산재보상을 받은 노동자의 30배에 달하는 숫자가 건강보험을 비롯한 타 보험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3회에 걸쳐 진행된 산업안전공단의 <응급실 기반 직업성 손상 감시체계 연구>에서도 약 80% 이상의 직업성 사고가 건강보험으로 처리되고 있고, 사망사고의 경우도 절반 이상이 건강보험으로 처리됐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1년에 280만 명이 산재라고 한다면, 아마도 산재는 지금처럼 일부 사업장 노동자의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산재의 실질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산재보험 적용대상의 제한성이다. 현재의 산재통계는 산재보험으로 보상받는 통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은 그 적용대상이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250만 명에 달하는 특수고용노동자가 산재보험 적용제외 대상이다. 화물자동차, 건설 기계장비, 버스, 오토바이, 대리운전 사고의 절대다수가 산재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통계청 조사로 임금 노동자는 1700만 명을 상회하나, 산재보험 적용 사업장 노동자는 1500만 명 내외이다. 소규모 건설현장 사고 등이 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들은 모두 산재 다발 위험 업종이지만 산재보험 적용에서 빠지고 산재통계에서도 제외된다. 공무원 연금, 사학연금에서 보상받는 경우도 매년 상반기 발표되는 산재통계에서는 제외된다.
둘째, 보상기준의 제한성이다. 선진외국뿐 아니라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산재로 인정하는 출퇴근 재해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사업주 제공차량 이용 시 사고만 인정하고 있어 자가용이나 전철, 버스 등을 이용한 출퇴근 재해는 제외된다.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직업병 인정의 문제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해에 직업성 암 사망자만 2800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산재보상은 30여 건에 불과하다. 그 밖의 수많은 직업병이 정보도 없고 기록도 없어 노동자 본인이 온전히 그 짐을 짊어지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산재은폐이다. 명백하게 산재보험 적용대상이면서도 산재로 처리하지 못하는 산재은폐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산재은폐란 산업안전보건법 10조의 규정된 사업주의 산업재해 보고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노동부에서는 '산재 미보고'라고 통칭한다. 사업장에서는 산재보험으로 처리하지 않고 공상으로 처리하거나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민주노총의 조사에서는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을 망라하는 전 업종에서 산재은폐 비율이 80% 이상을 상회하고 있다. 삼성의 한 건설현장에서는 '공상처리지침'을 공공연하게 운영하고 있었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가 10개 지정병원조사에서 1주일도 안 돼서 산재은폐 100여 건을 적발하기도 했다. 사업주는 '산재로 처리하면 산재보험료가 올라간다', '감독이 나온다' 등의 이유를 들어 공공연하게 산재를 은폐해 왔다. 현장에서 다리가 부러져도 트럭에 싣고 지정병원으로 실려 가는 최초 과정에서부터 산재은폐는 시작된다. 6개월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도 회사에서는 출근 처리하고 산재를 은폐한다. 산재은폐의 횡행은 노동계만의 주장이 아니다. 사업주 단체인 전문건설협회 조사에서도 해당 사업장의 산재 중 70% 이상을 산재 은폐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산재은폐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고통이다. 약 20%~50%의 노동자가 산재보험 적용대상 사업장이면서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인 건설기계나 화물운전기사 노동자의 경우에는 산재보상은커녕 근로복지공단의 구상권 청구로 패가망신을 당하게 된다. 산재은폐의 또 다른 문제는 산재 재발 방지 노력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산재은폐로 사고 다발 사업장이 오히려 감독이나 처벌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정부의 산재예방 정책이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공정성과 신뢰성을 잃고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산재은폐와 관련해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문제가 있다. 하나는 원·하청 구조와 연동해 발생하는 대기업 원청의 수백억에 달하는 산재보험료 환급이다. 현행법상 원청 대기업의 안전보건조치 위반으로 발생한 사고도 산재보험법상의 책임은 하청 사업주에게 있다. 또한 하청 사업주는 원청과의 재계약을 위해 산재보험료는 내면서도 산재보험으로 처리하지도 못한다. 울산 동구청에서 지역의 사내하청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산업재해의 경험이 있는 노동자중 5.7%만이 산재보험으로 처리했다. 결국 동일한 생산을 하면서도 하청 고용이 많아지면 원청은 직접 고용 인원이 줄고 산재보험료도 낮아지며 산재보험료율도 변동되어 결국 수백억 원의 산재보험료를 환급받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업주가 책임져야 할 산재보험의 재정 부담이 건강보험으로 처리되면서 건강보험 재정악화의 요인이 되고, 그 부담은 온 국민이 떠안게 된다는 것이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한 이후 산재보험이나 건강보험으로 그 비용을 처리하게 된다. 산재보험은 사업주가 전액 부담하는 제도이지만, 건강보험은 사업주와 노동자가 보험료를 분담하고, 국민 건강보험이기에 국민 전체가 보험료를 낸다. 결국 산재를 건강보험으로 처리하게 되면 보험 재정이 악화되고, 이는 건강보험료 인상으로 국민 전체가 부담하게 된다. 2012년 국회 예산처의 연구용역에서는 산재보험 미신고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규모가 2014년에서 2018년까지 최대 2조 8693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산재은폐로 인해 산재예방의 책임이 있는 원청 대기업은 수백억의 산재보험료를 환급받고, 노동자는 보상도 없이 고통 받으며, 재정부담은 온 국민이 떠안고 있는 것이다.
작년 9월 구미 불산 누출사고의 교훈이 유실되지 않기 위해서는 산재의 실질 규모를 드러내기 위한 산재은폐 대책 수립이 절실하다. 민주노총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산재은폐 근절 방안중의 하나로 '의사 신고제도'를 제시한 바 있으나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산재가 발생하면 병원 치료는 누구나 받기 때문에 의사가 사고 발생 장소 등 최소한의 확인만 거쳐 신고해도 사업장 사고와 주요 직업병은 산재로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산재를 산재보험으로 보상받는 다양한 법 제도 개선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제 산업재해를 산재보험으로 보상받도록 하는 기초단계부터 다시 되돌아봐야 할 때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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