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산파역할을 했던 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이용수 교수(세종대)는 "월드컵을 준비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던 게 오히려 4강신화를 이룩하는 데 좋은 약이 됐다. 만약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협회, 언론과의 대립으로 히딩크 호가 순항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히딩크 감독의 판단과 결정을 의심하며 비판했던 목소리가 있었지만 감독과 기술위원장이란 자리는 어차피 경기결과로 평가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준비기간 중 나타났던 문제에 크게 연연하기 보다는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히딩크 감독의 선임과정, 월드컵 준비기간에 있었던 일화와 향후 우리 축구계가 꼭 개선해야 할 점들을 지적했다.
<사진> 이용수 1.
***텃세강한 축구협회와 국내언론 잠재우기 위한 감독선정과정**
이용수 교수는 "2000년 나에게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와 고사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축구로부터 받은 혜택에 보답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중책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월드컵 본선에서 경기를 치르려면 전술변화능력을 갖춘 감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외국인 감독 영입을 추진했다. 특히 텃세가 강한 축구협회와 국내언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1998년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에메 자케나 히딩크 정도의 지명도를 갖춘 감독이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야 한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원래 국가대표팀 감독후보로 1순위 자케, 2순위 히딩크, 3순위 본프레레, 4순위 블라제비치를 염두에 두었지만 3,4 순위의 감독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축구협회 가삼현 국제부장은 유럽으로 가서 자케와 히딩크의 감독영입을 동시에 추진했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히딩크가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덧붙였다.
***히딩크의 여자친구'엘리자베스'파문, 국내여론과의 전쟁**
이 교수는 "2002년 1월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골드컵 대회에서 대표팀의 부진한 성적과 함께 히딩크 감독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언론에 노출돼 최대고비를 맞이했다. 언론에서는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만을 강조하는 히딩크 감독을 비판했고 국내여론은 여자친구 문제까지 발생하자 극도로 안 좋아졌다. 선수들마저도 히딩크 감독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2002 한-일 월드컵과 같은 명분이 없었다면 히딩크와 나는 이 사건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됐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이 교수는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우리는 2002 월드컵을 위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를 같은 호텔로 부른 것은 마치 졸병들은 일선으로 내 몰고 사령관이 텐트 안에서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꼴 아니냐"는 추궁을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히딩크는 "원정경기에서 코치들도 자신의 친구와 같은 방에서 자기도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결국 이후에는 동양적문화를 이해하고 이 같은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 병역혜택, 길거리응원, 홈 그라운드 잇점**
16강 진출의 갈림길이었던 포르투갈 게임을 앞두고 새벽 3~4시까지 줄담배만 피웠다는 이용수 교수는 길거리응원, 병역혜택, 홈 그라운드 잇점을 한국팀 선전의 보이지 않는 요인으로 분석했다.
이 교수는 "2002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파주 NFC(국립축구트레이닝센터)를 방문해 16강 진출시 대표선수들의 병역혜택을 약속했다"며 "당시에는 언론에 바로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대표팀 선수 중 병역 미필자들은 포르투갈 경기를 앞두고 따로 모여서 심기일전할 것을 다짐했고 경기내용에도 이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길거리응원에 대해 이 교수는 "폴란드, 미국과의 게임을 통해 대표팀 선수들은 미처 예기치 못했던 길거리응원 열기에 깜짝 놀랐고 이런 국민들의 성원은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대표팀의 성적에는 홈 그라운드의 잇점도 작용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이 교수는 "유럽축구시즌은 5월에 끝난다. 한국과 일본의 장마 때문에 역대 월드컵 가운데 가장 이른 5월 31일에 개막한 2002 한-일 월드컵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유럽 팀들에게 악재가 된 게 사실이며 우리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개막시기와 함께 이 교수는 "경기장에 물을 많이 뿌려 한국 선수들의 빠른 스피드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물을 많이 뿌린 경기장 컨디션에 익숙치 않은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고전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나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불거진 심판판정 문제에 대해 이 교수는 "강력한 우승후보들이 월드컵 무대에서 홈팀에게 탈락할 때 마다 이런 문제가 번번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이 역시 홈 그라운드의 잇점으로 생각하고 싶다. 홈 그라운드 잇점은 모든 월드컵 대회에 존재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오히려 나는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같은 유럽인인 스위스 출신 심판이 경기를 진행한 것에 불만을 느낀다"고 밝혔다.
<사진>이용수2
***"중,고축구 시스템개선과 축구협회의 변신이 필요하다"**
향후 한국축구에 대해 이 교수는 "중,고 축구의 시스템개선과 축구협회의 변신이 요구된다"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중학교나 고등학교 축구선수들은 학업은 뒷전으로 생각하며 거의 1년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대회에 참가한다. 문제가 되는 건 고등학교 졸업이후 대학, 프로, 실업무대로 나가지 못하는 선수들은 전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고교 축구대회는 방학기간에 집중돼야 하며 나머지 기간에는 학업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대부분의 중고교 축구대회는 언론사 주최가 많아 이를 방학기간에 집중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축구협회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무대에 진출하면 2002년 한-일 월드컵처럼 오랜 기간 대표팀 선수들이 모여 훈련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어질 것이다. 축구협회가 향후 훈련일정이나 경기일정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대표팀이 한 번 월드컵 4강에 올랐다고 세계축구계의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일선 지도자들은 경험을 통한 자신의 방식만 고집하기 보다는 공부를 해서 좋은 훈련방법과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때이며 축구협회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변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코엘류도 히딩크처럼 전권 갖고 있다"**
"히딩크 감독과 같이 코엘류 감독도 대표팀에 관한한 전권을 갖고 있다"고 밝힌 이 교수는 "그러나 월드컵과 같은 큰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의 히딩크와 코엘류의 경우는 다소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기술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국가대표팀에 대한 사항들을 그냥 축구협회에 통보하는 식이었다"며 비상체제의 히딩크호와 상시체제인 코엘류호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지금으로서는 코엘류 감독의 전체적인 방향설정과 준비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축구협회나 언론이 그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코엘류 만의 색깔있는 축구를 보려면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기다려야 한다.
월드컵 준비기간 중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시킨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월드컵 본선에서 최상의 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는 안정환의 컨디션이 제일 좋았지만 마지막 월드컵에 임하는 황선홍에 대한 배려로 히딩크는 황 선수를 선발출장시켜 좋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감독이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에게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교수는 "코엘류호는 대표팀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홍명보, 황선홍의 공백을 극복하는 게 과제다.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최전방 공격수 황선홍과 중앙수비수로서 전체 수비라인을 조율하며 주장으로서의 카리스마를 갖춘 홍명보를 대신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한 상황이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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