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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싸움에 고래가 죽어나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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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싸움에 고래가 죽어나갈 수도 있다

[시민정치시평] NLL 대선 기획은 정치적 범죄

작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진 뒤 일들은 참으로 섬뜩했다. 박 후보 당선에 절망한 노동자들이 자살하지 않나, 당장 내일이라도 유신의 망령이 40년 만에 되살아날 것 같은 절박함에 밤새 술 마시며 울먹이지 않나. 앞으로 5년에 대한 불안한 마음에 돌아가던 영사막이 딱 정지된 기분이었다.

그런 '멘붕 소동'이 지나고 취임 전후까지 넉 달 동안 주변에서는 내내 쓴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은 걱정이 지나쳤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다. MB 정부가 유감없이 보여준 정치적 고집불통과 법을 앞세운 통치의 포악함에 비해 무엇을 딱히 하겠다고 들이대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국내 정치나 남북관계나 외교에서 계속 원칙만 강조하는 것이 일단 몸에 부대낄 압박은 주지 않으니 다행이다. 쓴웃음의 두 번째 이유는 어째 사람마다 저 모양이냐 싶을 만큼 한 주일이 멀다 하고 계속되는 인사파행이었다. 취임 초 미국 방문에서 터진 윤창중 사건은 그런 인사 난맥의 가지에 꽃(?)을 피운 격이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쓴웃음이 지워지지 않는 세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뭔가 나쁜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는 듯한데, 그렇다고 무슨 정책을 펴는지 알 수 없어 이 정권의 방향과 실력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통합, 남북한 신뢰 프로세스 구축, 맞춤형 보편복지, 문화융성 등 반대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건질 것이 거의 없다. 마른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듯이 뭔가 하나씩은 나오는데 떨어지는 도중 본래의 선의들은 조금씩 깎이면서 하나마나한 정책이 돼버린다. 어르신들이나 채무자들이 좋다 말게 된 노령연금과 행복기금이 대표적이다. 야당 공약을 베껴간 것은 좋은데 제대로 살리지 못하니 기대만 연속으로 김빠진다. 미국이다 중국이다 해서 대통령은 바삐 다니는데 다녀와서 풀어놓는 보따리에는 별로 든 게 없어 보인다(그나마 미국 보따리는 아직 풀지도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친 덕분에 상당히 독특한 정치적 자산을 갖게 된 대한민국 유일의 정치인이다. 그의 선친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모든 기득권에 튼튼한 물질적 기반과 사회세력을 구축해주었다. 친일파, 군부 기생세력, 재벌 그리고 종교, 언론, 교육, 문화 등에 걸친 각종 사회권력이 선친 아래서 세력을 공고하게 다졌다. 그러면서 이들 세력은 그의 선친이 막바지에 몰렸을 때 두 부녀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연합뉴스

'박정희의 딸 박근혜'라는 아이콘은 그들 부녀가 마련해 준 기득권 중에서 가장 수혜가 적었던 민중들이 만들어준 구원의 표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을 믿어준 대한민국의 민중들이 헌신적으로 보여준 애정만큼 수혜를 주기 위해 자신과 선친이 쌓아준 기득권층의 재물과 세력을 떼어올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성좌(星座)에 앉아 있다. 심지어 선친의 패덕(悖德)까지도 자신의 선덕(善德)으로 바꿀 수 있고, 선친의 못 다한 위업을(그런 것이 있다면) 백성에게 대리집행해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갖고만 있고 쓰지는 않는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 지금 국기 문란 문제로 방치되고 있다. 국정원 댓글 사건 정도는 '원세훈 국정원'의 월권과 국정원법 위반만 처벌하면 간단히 끝날 문제였다. 국정원 직원들이 떼로 달려들어 '댓글질'을 했어도 대통령 선거의 대세를 가를 정도의 큰 위력은 없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국정원이 직접 당사자로 나선 NLL 논란은, 지난 일로 보면 일단 대통령 선거의 당락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국가 중대사를 인질로 한 국정원의 사실상 쿠데타, 나아가 남북 관계에서 전략적 방향 설정과 전술적 운신의 폭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문제로 비약할 것이 분명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우리 '영해'를 넘겨주겠다고 발언했다는 정문헌 의원의 폭로가 대통령 선거에 미친 영향을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측정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3.5% 차이로 당락이 갈린 대선에서 이런 메가톤급 음해가 유권자의 표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당시 정문헌 의원이 봤다는 국정원 대화록 발췌문은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여론 조사에 따르면 현재 반 이상의 국민들은 노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음해성 폭로의 원자료가 국정원이 소장하던 대통령 기록물이고, 이것이 새누리당 선거본부로 넘어갔다는 것은 지난 6월 26일 새누리당 당무회의에서 김무성 의원이 행한 발언으로 명백해졌다. '원세훈 국정원 - MB 청와대 – 김무성 선대본부'라는 일관공정을 통해 'NLL 포기 발언 폭로'가 일종의 선거기획물이었다는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명백히 대한민국 국체의 핵심인 민주선거의 근간을 뒤흔든 일이다. 조선 시대 용어로 말하자면, 대궐의 담장을 무단으로 넘어간 범궐(犯闕)의 죄, 즉 역모죄에 해당된다.

이 사건이 국가 시민의 도덕관념에 얼마나 중대한 패악을 끼칠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물불 가리지 않고 선거에 이기기만 하면 되고, 그런 선거 결과에 '묻지마 승복'이나 하라면 누가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정치적 범죄가 척결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시민에게 국가가 도덕적이기를 요구하기는 힘들 것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제대로 써야 불어난다. 국회에 대한 정치 신뢰, 국민에 대한 선거 신뢰, 북한에 대한 대화 신뢰, 그리고 국정원의 정보 신뢰가 모두 거덜 나도록 방관하면 국격도 국가능력도 모두 앉은 자리에서 그 가치가 깎인다.

설사 '국정원-청와대-새누리당'의 대선기획 사건이 사실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사태가 현 수준에서 당사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 정도로 동결되면 대통령 재선거를 하자고 나설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임 대통령이 임명한 현직 국정원장이 지나간 사건에 대해 계속 총대를 메고 나서면 그의 민주적 정통성이 치명적으로 훼손당한다. 그리고 이런 국정원장을 임명한 대통령 자신도 공동정범이 된다.

그런 것은 부하들 일이라고 방관하면 결국 막바지에 가서 부하들 싸움에 말려들 수 있다. 새우만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것이 아니다. 새우 싸움에도 고래가 아예 죽어나갈 수 있다. 고래가 입 다물고 있을 때 기세가 오른 새우들이 삿대질, 아니 총질까지 불사하는 일은 가끔은 일어났던 일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대통령이 쟁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시민들은 계속 외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NLL을 둘러싼 영토 포기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대통령인 대한민국 국체에 대한 반역 사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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