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138호는 '아까운 책'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지난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우리 곁을 스쳐가 버린 숨은 명저를 발굴해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열두 명의 필자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나만의 아까운 책'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업은 출판사 부키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 공개되는 원고를 포함해 총 47편의 서평이 실리는 단행본 <아까운 책 2013>이 오는 5월 초 부키에서 발간됩니다. <편집자> |
재미있는 것은 잘 꾸며진 앞보다는 뒤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책에는 그 나름의 사연이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정작 책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잠복>(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모비딕 펴냄)이라는 소설집은 특히나 더 그렇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한때 나는 몇몇 출판사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반응은 하나같이 미지근했다.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작가라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2004년만 해도 미야베 미유키는 한국에서 '듣보잡'이었다.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화차> 정도였는데, 이마저도 거의 팔리지 않아 한 차례 제목을 바꾸기도 했지만(<인생을 훔친 여자>였다), 판매는 개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모방범>(양억관 옮김, 문학동네 펴냄) 같은 경우 수십만 부가 나갔다고 하고, 선인세도 이제 중소출판사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가격에서 형성되고 있다.
▲ <잠복>(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모비딕 펴냄). ⓒ모비딕 |
그런데 북스피어 쪽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컬렉션을 내게 된 것은 마쓰모토 세이초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야메 미유키가 편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즈음(2009년) 미야메 미유키라는 이름은 한국 독자들에게 꽤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데 컬렉션은 생각만큼 팔리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내가 북스피어에 컬렉션도 냈으니 본격적으로 세이초 소설을 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하겠다. 결국 이야기는 유야무야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이 컬렉션을 읽은 역사비평사 기획실장에게 세이초라는 신이 내린 것이었다(그는 이후 네이버캐스트에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항목을 집필한다).
여차저차해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세이초의 책을 내는 데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름 있는 역사 전문 출판사에서 일본의, 그것도 대중소설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부적 반발도 심했고, 다른 것은 차치하고 과연 팔리겠냐는 회의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자 그는 사표를 낼 각오로 싸운 끝에 자회사를 따로 만들어 출판하는 선에서 타협을 이루어냈다고 한다. 이것이 <잠복>을 낸 모비딕이라는 출판사의 탄생 비화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내심 낼까말까 고민만 하고 있던 북스피어가 질투심 때문인지 몰라도 자신들도 세이초를 내겠다고 나섰고, 결국 두 출판사가 한 작가의 작품을 공동으로 출간하는, 한국 출판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프로젝트가 꾸려졌다. 현재 총 7종(9권)이 출간된 '세이초 월드' 시리즈가 그 결과물이다.
지금 여기서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떤 작가인지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독한 가난, 저학력, 한국에서의 군 생활, 늦은 문단 데뷔,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대중 작가의 길을 선택, 순문학 문인들의 시기와 그에 대한 입장 등은 위에서 언급한 컬렉션에 수록된 해설로 참조하기 권하고, 그의 작품 이력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세이초가 작가 생활 사십 년 동안에 남긴 결과물은 약 980편(에세이 등 포함)에 이르는데, 출간한 저서만 무려 750권(편저 포함)에 달한다고 한다. 소설만 놓고 보았을 때, 장편소설은 100편, 중단편은 350편 정도 된다고 하니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다. 물론 그가 대중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단편이 350편에 달한다는 것은 예사로 볼 사항이 아니다(권당 10편씩만 실린다고 해도 소설집만 무려 3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몇 년 전 창비를 중심으로 '장편소설 대망론'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것은 단편소설은 몰라도 장편소설에서는 쓸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문지 쪽에서는 미학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볼 때 단편소설이야말로 문학의 본령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지는 않겠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장편소설의 핵심요소가 독자 확보(대중성)이라고 했을 때, 단편소설의 그것은 작품의 완성도(문학성)다.
모비딕이 '세이초 월드'의 일환으로 출간하기 시작한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잠복>이 그 첫 번째 권이다)을 편집한 히라노 겐 같은 평론가가 세이초 소설의 핵심은 단편소설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책 뒷날개를 보니 히라노 겐을 '세이초에 정통한 문학평론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이것은 과장이다. 히라노 겐은 세이초에 정통한 전문가라기보다는 일본문학 연구자이자 순문학 평론가(그것도 일급)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선집이 가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선집이 순문학을 다룰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엄격한 잣대로 통과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에서 국민작가로 불린다. 이는 그의 작품이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기의 비결은 그만의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금 말하지만, 그동안 세이초를 출판사에 소개하면서도 내심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지금의 이삼십대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들에게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우타노 쇼고 쪽이 재미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인생에 가능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오로지 현실에 매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십대 이상의 독자들에게 요즘 국내에서 인기가 있는 일본소설들이 재미있을 리 없다. 그런데 세이초의 소설은 정반대가 아닌가 한다. 기회가 되면 나는 '세이초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 사십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세이초 자신이 사십대 중반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이틴소설, 칙릿소설 같은 말이 성립한다면, 사십대(중년)소설, 아저씨소설이라는 것도 성립할 텐데, 문제는 한국의 문학 독자가 이삼십대, 그것도 여성에 집중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공자는 사십대를 불혹(不惑)의 나이로 보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십대는 끊임없이 혹하는 나이다. 정확히니 혹할 줄 아는 나이이다. 혹한다는 것은 대상에 사로잡히거나 그것에 넘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에 사로잡히거나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느낄(알) 수 있는 나이, 또는 혹할 수만 있는(혹하는 데에 그칠 수 있는) 나이라 하겠다. 이를 미스터리에 대입해보면, 이십대나 삼십대에게 범죄는 긍정 혹은 부정 또는 해결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제거되거나 찬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십대에게 있어 범죄는 혹하는 것에 그치지 못한 결과로서, 이해받아야 할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이초의 소설에는 오늘날의 범죄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나 범죄 취미자가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로서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하다가 부득이하게 늪에 빠진 이들이다. 행복을 찾다가 그만 '짐승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점에서 세이초의 소설은 그의 소설적 후계자인 미야베 미유키와도 구별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한다. 다만 그녀의 소설이 다른 미스터리와 구별되는 것은 '범죄 이후'에 초점을 두면서 피해자 문제를 전면에 배치했다는 데에 있다.
<잠복>에 실린 8편의 작품은 소위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그런 장르적 선입견을 배제하더라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중하기로 하고 몇 가지 독서 포인트만을 지적할까 한다. 첫째 번역서에는 기재되어있지 않았지만(제2권부터는 발표년도 정도는 기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은 모두 1956~1957년에 쓰였다. 즉 전쟁이 끝나고 갓 10년을 넘은 시기로 전쟁의 흔적이 생활 전반에 남아있었다. 예컨대 '지방지를 사는 여자'와 '일 년 반만 기다려'와 같은 작품은 그런 사회적 배경과 분리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전자의 경우 태평양전쟁 말기에 만주로 출정한 남편이 종전 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시베리아에 억류된 것이, 후자의 경우 전장에 나갔던 남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고 있다.
둘째는 개인의 신체적 특징이 미디어(영화와 전화)를 거쳤을 때, 발상하게 되는 신체 복제의 문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 이 문제는 그것이 작품 속에서 단순한 아이디어(트릭)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얼굴'과 '목소리'와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이 점에 주의해서 읽으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도시화와 상경'(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문제다. 세이초가 쓴 최초의 추리소설로 이야기되는 '잠복'은 표층 이야기에 주목하여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에 눈에 비친 한 여자의 이야기(일상과 일탈 사이의 긴장)로 볼 수도 있지만, '도쿄 증오' 작품군으로 볼 수 있다. 한 청년이 시골에서 도쿄로 상경한다. 당시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후 복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도쿄에는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고, 온갖 일을 전전하다(그는 피를 팔기도 한다) 결국 범죄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세이초는 이를 '도쿄 증오'로 요약하고 있다.
참고로 이 '도쿄 증오'라는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후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 '배신하지 마' (이 작품은 <화차>의 원형격인 작품으로 유명하다)에서 변주된다. '투영'이라는 작품은 '잠복'과는 반대로 도쿄에서 시골로 내려가서 생긴 이야기로(잘나가는 중앙지 기자가 지방의 토호세력과 대결한다) 이런 이야기가 언제나 그러하듯 결말은 상경 장면에서 끝나고 있다.
넷째 '군중 속의 개인'이라는 테마이다. 이것은 '얼굴'과 '귀축', 그리고 '지방지를 사는 여자'에서 공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 범죄는 이 '대중'이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범죄를 용이하게 만드는 익명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군중 속의 사람'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다섯째는 '주체를 모방하는 중개자'라는 문제이다. 이것은 '카르네아데스의 널'에서 엿볼 수 있는데, 물론 이 작품은 전후공간에서 이루어진 이념(역사)투쟁과 생존투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결말과 관련하여 나는 도리어 이쪽에 흥미롭다. 무슨 이야기인지 더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직접 <잠복>을 읽기 바란다. 당신이 사십대여도 좋고 이삼십대여도 상관없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1.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상·중·하권, 미야베 미유키 엮음,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펴냄) 세이초에 입문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 스스로 세이초의 장녀로 자처하는 미야베 미유키가 편집한 책이니 설명 불필요. 2. 마쓰모토 세이초, <짐승의 길>(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북스피어 펴냄) 세이초의 걸작 장편소설. 한 여성의 행복을 위한 선택과 전후 일본의 움직이는 대흑막과의 만남. 3.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의 검은 안개>(상·하권, 김경남 옮김, 모비딕 펴냄) 세이초는 뛰어난 논픽션 작가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을 뒤흔든 미해결 사건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논픽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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