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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까지 살래, 바퀴벌레가 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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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까지 살래, 바퀴벌레가 될래?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김한민의 <카페 림보>

어린 시절, 내 영혼의 주요소는 만화방이었다. 어린 나이로는 버티기 어려운 일들이 닥쳐와도 만화방에 처박혀 킬킬대다보면, 어느덧 극심한 스트레스는 사라져 있었다. 이야기에 몰입되었을 적에 얼마나 큰 치유 효과가 있는지 일찌감치 깨달은 셈이다. 그 경험 덕으로 만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마니아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열심히 읽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종이책으로 나온 만화를 보며 우리 만화 수준이 이토록 높아진 것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펼쳐 보이는 화려한 이야기보따리는 물론이거니와 그림의 수준이 상당히 뛰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들은, 사회 비판적 시각이 돋보이는 <울기엔 좀 애매한>(사계절 펴냄)의 최규석, 십자군 전쟁을 그리고 있는 김태권, 직장인보다 직장인의 애 환을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펴냄), <26년>(재미주의 펴냄)을 그린 강풀(정말 고맙소, 강풀 선생!), 아직은 신인 티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잠재력이 돋보이는 <나쁜 친구>(창비 펴냄)의 앙꼬 등이다.

그들의 만화를 보면, 거듭 말하거니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하나, 만화를 낮추어 보는 현실에서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고 등단하는 경로도 서로 달리 하며 우리 만화를 빛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처럼 만화 잡지가 활성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성공리에 적응하거나, 아예 단행본 작업을 감행하는 시도를 선보였다. 좀 건방지게 말하면, 신통하고 기특하다 싶다.

이번에는 김한민이라는 만화가를 알게 되었다. 소설에 삽화 그린 것을 본 적은 있었는데, 단행본 만화는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선 굵은 새로운 유형의 만화가를 만났다는 인상이 들었다. 한 작가의 만화 세계는 그가 어떤 매체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지 알아챌 때 이해하기 쉬운 면이 있다. 박흥용의 전성기 시절 만화는 다분히 영화의 영향을 받은 듯싶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점쟁이는 아니지만, 김한민은 뮤직 비디오의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놀라운 것은, 뮤직 비디오 같은 구성과 연출을 바탕으로 장편 만화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단편 만화라면 쉬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겠지만, 장편을 소화해낸 것을 보며 이 작가의 내공이 상당하구나 싶었다.

<카페 림보>는 체제 전복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82국이라 명명된, 만화에 나온 세계 지도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 나라의 우세종은 바퀴족. 이 종족의 특징을 볼라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생존기계이며, 먹고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2. 같은 걸 좋아하고, 다른 걸 싫어하며 천편일률의 귀재들이다.
3. 자신이 경멸하는 것들과 가장 닮아 있다. 예)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동물은 바퀴벌레이다.

특별히 성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성인 암컷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 <카페 림보>(김한민 지음, 워크룸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펴냄

본인의 과오나 추행을 인지할 수 있는 객관화 능력 상실. 직계 가족의 안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불법적인 일도 수행. 단일 개체로부터 배출된 오물과 쓰레기의 양 및 평생 남긴 음식의 양, 단일 개체로서 파괴한 자연물과 생명의 양으로 치자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중 단연 으뜸. 배우자나 양가 부모에게서 뽑아낸 대형 승용 기계를 이용해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을 감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함(이동의 목적은 주로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것). 대개 오후 시간대에 활동하나 입시철에는 새벽 기복 행위를 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확고한 재생산 프로그램의 장착 및 또래 집단과의 집단적 자기 암시 기작의 결실로 반드시 80킬로그램 이상의 유전자 덩어리를 남기고 죽는다.

그럼, 성인 수컷의 특징은 어떠할꼬? 아래와 같다.

방대한 양의 가래침, 배설물, 정액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내부 시스템을 갖췄다. 알코올 흡수, 남의 살 먹기 및 환경 파괴 전문 스포츠를 즐김. 패거리를 만드는데 일생을 보내지만 그것에 실패할 경우 패거리를 씹는데 일생을 바친다. 대개 정치적 과대망상 증세를 보이며 , 역사적 영웅들과의 동일시에 능하여 그 어떤 상황도 자기 합리화/자기 연민 메커니즘으로 해석해 버리는 능력이 있음. 순수한 암컷에게는 강한 폭력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반면, 영악하고 되바라지고 계산적인 암컷에게는 유약하여 결국 그녀들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기여하고 생을 마감한다. 60대 이후에는 동족보다는 TV와의 교감에 위로와 안정감을 느끼고, 평생 젊은 암컷 바퀴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특징.

이 정도면 알 만하다. 천민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속물들이 득세하는 곳이 우리 사회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에 맞서는 림보족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족속들의 임시 명칭"으로, 평균 수명은 34세다. "그 이후에는 바퀴족이 되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반드시 고정적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림보족의 생존 목적은 '내가 되는 것'이다.
바퀴족처럼 연명, 건강, 번식, 안정, 평화, 행복 추구, 꿈 펼치기가 아니다.
내가 되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바퀴족이다. '무조건 내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림보족이다.
나로 살지 않을 바에는 죽음을 택하는 것


욕망의 배설물로 뒤덮인 세상에서 '나'를 찾기 위한 싸움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거창하게 말하면, 그 비극성을, 편하게 말하면, 그 블랙 코미디적 성격을 표현하는데 김한민의 그림은 적절하다. 말 그대로 선이 굵고 명암 대비가 뚜렷한 그림, 그리고 다분히 표현주의적 구성이 주제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카페 림보>를 보면 우리 만화의 층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팔색조처럼 서로 다른 경향을 보여주는 만화가들의 출현이 반갑고 기쁘다. 개인적으로 우리 문학에 더는 기대할 게 없다고 여기고 있는지라, 글과 그림의 절묘한 조화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의 힘에 대한 미련이 더 강해지고 있다. 다시, 만화는 내 영혼의 주유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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