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 결국 혁과 헤어졌다.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자, 영은 이제 늘 혁을 그리워했다. 이전에 혁은 결점투성이였지만 이제 완벽한 연인으로 둔갑했다. 그런데 이것은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영은 늘 과거의 연인만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영의 사랑은 과거 속에서만 완전하다.
류는 연인을 지순하게 사랑한다. 그를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다. 늦은 나이까지 공부하는 그를 위해 학비를 대었고, 그의 일상과 건강을 엄마처럼 보살폈다. 연인에게 류는 헌신적인 수호천사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녀는 끊임없이 '세컨드'를 만든다. '세컨드'는 자주 바뀐다. 그녀는 그럼에도 '퍼스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영과 류는 닮았다. 그들은 현실의 사랑에서 부족한 무언가를 예민하게 느낀다. 결여된 것을 과거에서 찾거나, 다른 이성에게서 구하려고 한다. 과거나 다른 이성 역시 완전하지는 않다. 그러나 완전하다는 판타지는 제공한다.
그런데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옆의 연인을 사랑하지만, 무언가 결여되었다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랑하느냐고 끊임없이 확인하고 줄기차게 싸우고 때때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시험한다.
영과 류,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펴냄)를 읽는다. 형부는 처제와 자고 싶어서 열병을 앓는다. 그들은 결국 선을 넘는다. 불륜담으로서 흔한 이야기일까? 아니, 영과 류는 자기의 행동 패턴, 혹은 심성 구조에 대한 해명을 이 소설에서 찾았다.
아무것도 아닌, 참을 수 없이 사소한 세부
부드럽고 둥근 꽃잎들이 화려하게 보디페인팅된 남녀의 나신. 그리고 그들이 교합하는 자세. 이 이미지는 비디오 작가인 그에게 한 순간에 다가왔고 주술처럼 들러붙었다. 그는 이 이미지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채식주의자>(한강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이미지는 보다 내밀한 그의 욕망을 품고 있다. 이미지의 두 주인공은 처제와 바로 그다. 그는 처제에게 치명적인 욕망을 느낀다. "그것은 결혼한 이후, 특히 삼십대 중반을 지나서는 거의 처음 느끼는, 대상이 분명한 강렬한 성욕이었다."(74쪽)
그런데 이 욕망은 어이없는 계기로 찾아왔다.
어느 일요일 오후 우연히 그는 아내에게서 듣는다. 처제의 엉덩이에 엄지손가락만한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고.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은 바로 그 순간 그를 충격했다."(74쪽)
이때부터 그는 "벌거벗은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교합하는 장면"(74쪽)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욕망에 다가가고자 불가항력적으로 조바심 내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필사적으로 애쓰는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의 엉덩이에 찍힌 몽고반점.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욕망을 점화했다. 이 두 마디는 뚜렷한 인과 관계로 엮이지 않는다.
욕망은 불가해한 계기로 촉발된다. 욕망의 현상과 그 계기를 묶는 사슬은 상식적인 논리의 법칙 바깥에 있다. 발생 원인이 해명될 수 없기에, 욕망의 발생은 전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코를 찡그리는 모습, 담배를 피우는 손가락의 각도, 커피를 마실 때 목울대가 올라가는 모양, 손톱의 생김새. 그 어느 것도 누군가의 치명적인 욕망을 촉발할 수 있다. 인과 관계 없이. 수없이 많은 세부들은 욕망을 점화하는 부싯돌이다.
너무나 하찮아서 전혀 위험하게 보이지 않는 세부들은 그 안에 무시무시한 점화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빠질 위험은 도처에 산재하는 셈이다.
그녀는 예쁘니까. 사랑에 빠진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흔한 답이다. "예쁘다"라는 상투어는 뭉실뭉실 피어오른 세부에의 매혹을 감추고 있다. 보다 자기 마음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매혹적인 세부를 나열할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세부밖에 나열하지 못한다.
그녀의 차분함이 나의 성급함을 보완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으니까, 따위의 논리적인 답변도 물론 가능하다. 허나 이런 논리적인 명제는 무언가 김빠져 보인다. 세부에 매혹되었다는 자백이 보다 정직하고, 원시적이고, 근원적으로 보인다.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명석한 인과 관계는커녕 도무지 어떠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는 세부가 욕망을 점화하다니. 물론 이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부의 어리석음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에 관한 한 전부이기 때문이다."(<여자에겐 보내지 않는 편지가 있다>(대리언 리더 지음, 김종엽 옮김, 문학동네 펴냄), 173쪽)
세부에의 매혹은 상식의 차원에서 인과성을 가지지 못하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인과성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자주 논의되듯, 상대의 특정한 세부는 때때로 어머니를 상기시킨다.
그게 아니더라도 세부는 특정한 이미지를 환기한다. 세부에 매혹된 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세부가 환기하는 이미지를 강렬히 열망한다.
이 소설의 그 역시 처음에는 납득하지 못한다. 무섭고 버거운 욕망이 고작 처제의 몽고반점에서 촉발됐다는 사실을, 그 비논리성을. 그러나 나중에 처제의 벗은 몸에서 처음으로 몽고반점을 확인한 후 무엇이 자기 욕망을 자극했는지 깨닫는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101쪽)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 몽고반점이 환기하는 이미지는 식물적인 무엇이었다. 그는 몽고반점이라기보다는 식물적인 무엇에 매혹된 것이다.
세부가 환기하는 특정 이미지, 그것은 매혹당한 자의 오랜 소망과 꿈을 대변한다. 그는 전부터 식물적인 무엇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 법칙에서 벗어나고 사람이기를 그치고 싶은 소망. 세부는 특정 이미지를 환기하면서 이미지에 얽힌 꿈을 일깨운다.
이런 설명도 몽상의 차원에서는 논리적이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비논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몽고반점을 가진 사람이 다 식물적인 것도 아니고, 식물적이기에 현실과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몽고반점-식물-현실 이탈을 이어주는 논리는 없다.
그러나 몽상의 차원에서 그는 믿는다. 세부가 환기하는 이미지 혹은 꿈,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순례하는 자, 환멸하는 자
"벌거벗은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교합하는 장면"(74쪽)에 포획된 그. 그는 이 이미지를 붙잡기 위해 수십 장의 스케치를 그린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미지들을 순례한다.
그는 자기를 강박한 이미지를 타인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기대하면서 일본 작가의 비디오 작업을 본다. 온몸에 물감칠을 한 여남은 명의 남녀가 사이키델릭한 음악 속에서 서로의 몸을 탐한다. 비슷한 발상이지만 그는 환멸한다. "분명히 그것은 아니었다."(71쪽)
환멸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릴 수 없다. 우연히 발견한 무용 공연 포스터가 이번에는 그의 기대를 부추긴다. 온몸에 꽃과 줄기, 잎사귀를 그린 남녀가 비스듬히 앉아 있는 공연 포스터를 보고 그는 흥분한다. 1년여 전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이미지가 다른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공연을 보고나서는 또다시 환멸한다. "극장을 가득 채웠던 전자음악, 현란한 의상, 과장된 노출과 성적 몸짓들 속에 그가 찾던 것은 없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이었다."(70쪽)
그는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왔다. 어떻게 이 이미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것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작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전시와 영화, 공연 따위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이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74~75쪽)
욕망을 품은 자는 대상과 닮은꼴들을 순례한다. 욕망의 원본을 머리 위에 이고 원본과 유사한 짝퉁들을 끊임없이 순례하지만 짝퉁들이 원본이 아님을 발견할 뿐이다.
대개 일상인들은 원본 찾기를 포기하며, 짝퉁에 만족한다. 예외적 존재들은 환멸이 거듭되더라도 더 맹렬히 꿈꾼다. 바로 그 원본이 아니면 안 된다.
소설에서 그는 그를 매혹했던 한 이미지,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서 순례하고 환멸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정황은 누군가의 개별적인 짝사랑 과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보다 넓게, 인간 생애에 걸친 욕망의 운동 기제를 암시한다.
아이는 태어나서 운다. 엄마가 젖을 줘도 잠시 후 다시 운다. 엄마 자궁 안에서의 안온함과 행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젖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욕망을 실현한 듯하다. 그러나 다시 허탈감이 밀려든다. 근원적인 무엇을 욕망하는데, 근원적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허기는 일상적 요구의 만족으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평생 끝없이 근원적인 무엇을 욕망한다. 그 근원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대상들을 순례한다. 연인을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온몸을 투기했다가 환멸하기를 반복한다.
멋진 연인에게서 욕망의 실현을 본 듯도 하지만 곧이어 그가 꿈꾸는 근원적 대상이 아님을 확인한다. 오랫동안 절치부심하여 세속적인 성취도 이루지만 짜릿한 만족감은 잠시 뿐, 곧이어 죽음 같은 환멸을 맛본다.
훌리아(미겔 데 우나무노의 '더도 덜도 아닌 딱 완전한 남자')와 테레자(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는 왜 사랑을 자꾸만 확인하려 하는가? 완전한 사랑, 근원적인 욕망의 대상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연인은 그 원본과 견주어 턱없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토마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는 왜 사랑함에 틀림없는 테레자를 두고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가? 테레자만으로는 근원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왜 자꾸만 싸우는가? 연인의 현실은 근원적인 사랑의 꿈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훌리아, 테레자, 토마시, 서두의 영과 류. 모두 근원적 사랑에 대한 꿈을 보통 사람들보다 간절하고 깊게 꾸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몽상가, 넘치도록 강한 에너지를 소유한 사람, 의지와 신념의 인간(우나무노), 문제적 개인(루카치).
꿈을 덜 꾸었다면 부족함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맹렬히 꿈꾸기에 부족함도 더욱 예민하게 느낀다.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판타지를 만들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죽도록 사랑을 확인하거나 피터지게 싸운다.(그러니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을 터이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일수록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이상주의자이기에 역설적으로 사랑을 망가뜨리는 행동도 더 자주 저지른다.
하여튼 연인들의 모든 불행은, 근원적인 욕망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기를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근원적 욕망의 실현을 우리는 꿈꾸지만 늘 유사한 '짝퉁'들을 순례할 뿐이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을 뿐 궁극적으로는 환멸한다.
그래서 작가 김훈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훈,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사랑은 미친 짓이다>(섬앤섬 펴냄), 9쪽)
김훈의 '사랑'과 이 글의 '근원적 욕망'은 같은 맥락에 있다. 작가 김훈도 근원적 욕망은 먼 곳에 있음을 알고 있다. <채식주의자>의 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근원적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이 글은 라캉의 욕망 이론을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나 엄밀하게가 아니라 상식적인 차원에서 썼다. 가독성을 위해서 이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고, 이론과 딱 부합하게 쓰지도 않았다. 용어 사용도 정확하지 않다. 가령 이 글의 '근원적 욕망'은 라캉의 이론에서는 '욕구'에, 다음 회의 '여분의 욕망'은 '욕망'에 해당할 것인데, 역시 학술적인 뉘앙스를 피하고자 일상적으로 더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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