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저주 받았어. 희가 되뇐다. 만나는 남자마다 희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만 같다. 어떤 남자는 이런 슬로건을 외쳤다. 구속은 사랑이 아니므로 서로를 해방시키자고. 참을 수 없게도,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자는 말했다. 한 번의 치명적인 연애로 난 깨달았지. 나를 보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난 어떤 여자에게도 감정적으로 깊이 얽혀 들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이별을 통보할 때 자못 감동스럽게 매달렸다. 희의 현명한 친구는 늘 말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필요에 의해 붙잡는 것뿐이니 속지 말라고.
희는 남녀 관계가 도달할 수 있는 정서적 오르가즘을 믿는다. 서로에게 열정적으로 빠져들어서 이례적인 헌신을 베풀고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죽기 전에 '당신만을 사랑했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관계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한 번도 믿음의 실현은 보지 못했다.
이런 그녀에게 어떤 친구는 촌스럽다는 선고를 내리며 '쿨'하라고 충고한다. '쿨해야 한다'는 강박은 그녀에게 주술처럼 들러붙는다. 강박 때문에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일부러 쌀쌀맞게 대하기도, 바람피우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는 척도 한다. 연기의 뒤끝은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그녀는 자기 꿈을 포기할 수 없다.
그녀는 고민에 빠져든다. 사랑은 가벼워야만 하는가. 왜 세상은 무거운 사랑을 촌스러운 것으로 배제하는가. 과연 가벼운 사랑이 옳은 것일까, 무거운 사랑이 옳은 것일까. 가벼움과 무거움은 한동안 그녀의 화두가 된다.
그녀는 무거움을 찬미하고 싶지만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그 소망을 충족시켜 줄 상대를 만나기도, 그 이상을 지지하는 논리도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것 같다.
가벼움과 무거움이라고 말했지만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바람둥이 남자와 순정적 여자와의 갈등이다.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남자들은 안주를 싫어하고 여자들은 남자의 사랑을 독점하지 못해 허기에 시달린다. 오죽하면 롤랑 바르트는 "여자는 칩거자, 남자는 사냥꾼, 나그네이다. 여자는 충실하며(그녀는 기다린다), 남자는 나돌아 다닌다(항해를 하거나 바람을 피운다)."(<사랑의 단상>)라고 말했겠는가.
이는 매우 상투적인 정황이다. 그러나 바로 이 상투적 딜레마가 20세기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을 지지하는 주된 골격이다. 비록 상투성에서 시작했지만, 쿤데라는 거기에 깊은 심리적 통찰과 철학적 사유를 가미하여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소설을 만들어 내었다.
희는 이 소설을 읽고 남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랑의 불구성에 대해서도. 또한 불구인 사랑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은 감을 잡았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진자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
눈빛이나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예민해지는데 우연히 동침이라도 하게 되면 어떠하겠는가. 우연한 동침이란 요사이 TV 드라마에 거의 클리셰처럼 자주 나오는 모티프지만, 이 사건은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때 어떤 여자들은 그의 감정을 궁금해 하며, 방황 지옥에 빠진다. 그녀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 짐작하면서 설레고 아니다 판단하면서 씁쓸해하는 양극 사이를 오가는 진자 운동의 고단함을 겪는다.
어떤 여자는 이 고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상대 남자에게서 직접 구하려고 한다. 이런 부류의 여자들에게 현명한 또 다른 여자는 충고한다. 그런 질문은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라고.
남자들이 그런 질문을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들 스스로도 제 마음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여자들의 포커스는 상대의 감정에 맞춰지지만, 남자들은 상대의 감정보다는 자기의 감정에 더 주목하는 듯하다.
사랑인지 아닌지 알게 되는 것은 관계가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 혹은 헤어진 다음에, 어쩌면 죽기 전에야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토마시 역시 테레자와 처음으로 동침한 이후 내적 분열에 시달린다.
주인공 토마시는 많은 여자들의 천적, 바람둥이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토마시의 신경증적인 내적 분열이다. 처음으로 동침한 이후 앓아 누운 테레자를 보고 토마시는 그녀 곁에서 죽고 싶다고 확신한다.
이후 그는 그 감정이 과장된 것, 즉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기 시작한 남자의 신경증적 반응이며 이 희극을 위해서 촌구석의 불쌍한 종업원을 이용할 뿐이라며 자책한다.
자신의 감정이 신경증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어하던 그는 이윽고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14쪽)한다. 그래서 1주일 후 회복된 테레자가 시골로 떠나자 토마시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테레자를 불러들여 살림을 차리자고 하면 그녀는 온 생애를 그에게 바치려고 들 것이기에 뒷감당이 두렵고, 그녀를 포기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판별하지 못하고 그녀를 다시 만나자고 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다.
이 지지부진한 진퇴양난을 중단시킨 사람은 테레자이다. 그가 보름 가까이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테레자는 프라하로 와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한다.
토마시의 내적 분열에 동감하는가? 우연한 동침 후에 남자의 고민은 시작된다. 그녀를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그녀를 사랑한다 고백할까? 사랑하려고 노력할까? 아니면 이대로 안녕?
대체로 답은 명료하지 않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토마시처럼 내적 분열은 필히 따를 것이다. 사랑한다 말하자니 아직 잘 모르겠고,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자니 아쉽고 신경 쓰이고.
자기감정의 정체를 심문하다보면 사랑이 아님을 증명하는 말들은 마치 캐면 캘수록 나오는 감자처럼, 꼬리를 물고 딸려 나온다. 단지 여자가 필요했을 뿐이야, 내 감정놀음에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는 거야, 감정을 과장하면서 나를 기만하지 말자, 등등. 그러다가 그런 회의주의를 자책하면서 단번에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메마른 감성을 개탄하기도 한다.
자기감정뿐만 아니라 그녀의 의미 역시 모호하다. 그녀, 어떨 때는 집착과 신경질로 부담을 줄 것 같고 어떨 때는 지금 그 가치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놓치면 후회할 다이아몬드 원석 같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런 번민은 동침 이후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가령 테레자에 대한 토마시의 내적 분열은 동침 이후뿐만이 아니라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 한동안 동거한 이후 테레자가 그를 떠나자, 토마시는 처음에는 후련해 한다.
토마시의 바람둥이 기질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 테레자는 그를 구속하고 감시했으며 늘 상처를 받았고, 토마시는 그런 그녀에게 항상 감추고 거짓말하고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사랑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이별은 이 피곤함의 소멸의 의미했기에, 토마시는 기뻐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테레자가 이별을 고하며 느꼈을 고통을 똑같이 느끼면서 견딜 수 없어진 토마시는 테레자를 다시 찾는 것을 숙명이라 절감한다. 그리고 만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간다.
이것이 내적 분열의 끝인가? 아쉽게도 아니다. 테레자와 재회한 날 밤, 그는 숙명이라 믿었던 사랑이 우연에 불과했음을, 그 우연한 사랑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버려야 했음을 깨닫고 심각하게 절망한다. 이렇게 토마시는 평생의 연인 테레자를 두고 한없이 분열한다.
명료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은 절대로 명백하지 않다. 그것은 혼돈과 의심과 불안의 외피를 쓰고 기습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기의 감정도 끊임없이 의심한다.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심문하는 검사에게, 정직하게 답변할 말은 여간해서는 찾을 수 없다.
미움, 의존심, 성욕, 집착, 의심, 불안, 강박. 이런 인접 감정들과 사랑을 명쾌하게 가르는 선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사랑과 그 인접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혼돈 덩어리를 정의하고 분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토마시의 내적 분열 중 가장 심각하고 오래 갔던 것은 사랑의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테레자가 요구하는 무거운 사랑을 수락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신 오랫동안 신조로 삼았던 가벼운 남녀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사랑에 목숨을 거는 트리스탄이 될 것인가, 바람둥이 돈 주앙으로 남을 것인가.
테레자를 만난 이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던 그는 가령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면서도 집에 돌아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들여다보곤 한다. 토마시의 오랜 여자 친구 사비나는 이런 그에게 "두 세계의 만남", "이중 노출"이라는 메타포를 부여한다. "바람둥이 토마시의 그림자 뒤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나타"(31쪽)난다고.
바람둥이 그를 위한 변명
이혼남 토마시는 한 여자와는 살 수 없고 오로지 독신일 때에만 자기답다는 신조를 가졌다. 그는 자정 이후엔 모든 여자를 내쫓는다. 그는 이혼 이후 여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기에 둘 사이의 타협점으로 "에로틱한 우정"이라는 것을 고안해 낸다.
그는 애인들에게 이렇게 못을 박는다. 둘 중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아야 하며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그래서 그가 주창한 것이 3자 법칙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여자를 만날 때는 세 번 이상은 안 되며, 오랜 동안 한 여자를 만날 수는 있지만 3주 이상의 간격을 지킬 것.
이랬던 토마시는 테레자를 만나 원칙에 혼란을 느낀다. 정말로 테레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는 수많은 내적 분열을 겪는다. 하지만 떠난 테레자를 찾아 프라하로 돌아오거나, 테레자의 불행을 염려하여 체제 반대 운동에 불참하기로 결정하거나, 원하지 않았어도 자력에 이끌리듯 자행한 행동들을 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테레자를 사랑했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추락을 감내할 만큼 테레자를 사랑하였으나 그럼에도 바람둥이 행각을 멈추지 못한다. 테레자를 사랑했기에 자처한 추락의 끝에서도, 그는 유리창을 청소하며 만난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 행각을 벌이며 끊임없이 테레자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그러면서 테레자에게 반복적으로 속삭인다.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고. 사랑은 유일해야 한다고 믿는 테레자는 죽기 직전까지 토마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람둥이 남자와 순정적인 여자의 딜레마처럼 보인다. 서두의 희의 딜레마도 같은 맥락에 있다.
토마시가 바람둥이가 된 이유부터 보자. 우선 그는 공격적인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듯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폭력적인 그림자들이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 상대의 밑바닥까지 소유하고 싶은 독점 욕구, 의존심과 안도감에서 비롯된 탐욕스런 요구 사항들, 탐욕스럽기에 좌절당하기 마련인 요구 때문에 쉽사리 쌓이는 상처들, 상처들이 순식간 이동하는 자리인 공격성과 폭력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림자를 지니고 있기에, 그림자가 아름답다 할 순 없으나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랑 역시 이런 그림자들을 불가피하게 지닌다.
예기치 못한 사랑의 그림자를 맞닥뜨린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림자조차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포용하거나, 사랑의 그림자를 마주칠 만큼 깊게 사랑에 발 담그기를 기피하거나.
토마시를 비롯한 흔히 보는 바람둥이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림자를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짧게, 피상적으로만 관계 맺기. 많이 알면 다친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에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둘째로 그는 "백만분의 일의 상이성"을 찾고자 여자들과의 섹스에 집착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들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외과의사로서 다년간 인간의 뇌만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는 사람들 간에 "백만분의 일의 상이한 점과 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의 유사한 점"(229쪽)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생각한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228쪽)고. 즉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그녀만의 독창성을 발견하고자 그는 섹스에 집착한다는 뜻이다.
이때 이 개별성 내지 독창성은 단수(單數)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마다 서로 다른 개별성/독창성을 지니기에 개별성/독창성은 개인의 수만큼 무수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러하기에, 토마시는 그 많은 독창성들을 섭렵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인 것이다.
셋째 이유는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소설의 서두에서부터 가벼움을 찬미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유가 나오거니와, 토마시는 "오래 전부터 공격적이고 장중하고 엄격한 '그래야만 한다!'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그의 가슴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225쪽)
그는 진지하고 무거운 것의 허망함과 기만성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사랑의 방식에서도 가벼움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 상세한 연유를 토마시의 분신인 사비나의 정신적 궤적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다. 사비나는 일평생 키치에 반대했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며,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285쪽)
모든 개인주의, 회의주의, 아이러니를 추방한 전체주의적 세계가 키치이다. 공산주의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대열도, 심지어 행복한 가정의 이상을 절대화하는 슬로건도, 이성애의 지고함에 대한 의문을 말살하는 교리도, 동일성만을 추구하는 한 키치이다.
키치에 대한 혐오에서, 사비나의 배신자적 정열이 발아하고 농익어갔으며, 가벼움을 추구하는 사랑 방식이 근거를 얻는다. 토마시의 엽색 행각도 이런 철학적 사유의 배경을 거느린다.
유일무이한 사랑을 동일성의 폭력의 일종으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가벼운 사랑 방식은 다분히 포스트모던하다.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에 반대하면서, 그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사랑조차 독재적인 전체주의의 일부로 파악하는 듯하다.
낭만적 호색한과 바람둥이 호색한
낭만적 호색한과 바람둥이 호색한.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비유를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였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므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쿤데라에 따르면, 호색한은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 : 낭만적 호색한들은 여자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꿈과 이상을 찾는다. 그러나 이상은 결코 발견될 수 없기에, 그들은 매번 실망하며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로 옮겨 다닌다. 이들은 항상 같은 유형의 여자를 쫓아다닌다.
두 번째 부류 : 바람둥이 호색한들은 여자들에게 주관적 이상을 투사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실망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여자를 사냥하면서 점차 관습적인 여성미에 싫증을 느끼고 곧 기이한 것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게 된다. 쿤데라는 토마시를 이 부류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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