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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의 결말, 주인공의 '죽음'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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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의 결말, 주인공의 '죽음'인 이유는?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미겔 데 우나무노의 '완전 남자'

유사 이래로 누적된 말들의 더미

말. 결국 말이 문제다. 훌리아와 알레한드로는 평생토록 싸웠으나, 그 싸움의 주제는 매우 단순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그 말 한 마디를 하느냐, 안 하느냐.

말은 사랑이라는 요리에서 기묘한 양념 노릇을 한다. 말은 사랑의 불안을 치유하는 진정제이자 허무함을 위안하는 미약이나, 그 자체로 허상(虛像)이다. 훌리아의 오류는 꿈틀거리는 사랑을 말로 고정시키려고 집착한 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과 사랑과의 관계는 보다 복잡하다.

그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훌리아를 평생 괴롭힌 이 질문의 근원에는 사랑에 관한 모범이 있다. 사랑은 이러해야 한다는 이상 혹은 준칙. 이런 모범, 이상, 준칙은 훌리아의 내면에서 자율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훌리아가 읽은 소설들이 그들의 모태이다.

<돈키호테>에서 사랑은 사랑의 관습에 참여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말했거니와, 우리의 소망과 윤리는 결코 독자적으로 발아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감염된 채 발전한다. 훌리아의 사랑에 관한 이상도 사회적 관습에 감염된 것이다.

사랑 담론의 체계에서 어쩔 수 없이 받는 영향과, 그것을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는 연인의 의식을 잠식한다. 만일 무인도에 훌리아와 알레한드로 둘만 있었어도, 아무런 다른 사람의 사랑 사례를 접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야 했어도, 훌리아가 그런 고뇌에 빠져들었겠는가.

우리의 내밀한 소망, 윤리, 준칙조차도 사회적인 기원 텍스트를 가진다. 내가 진정으로 신봉하는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믿음과 준칙이 독자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누군가를 모방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통찰은 삶에 유효하다. 왜? 나를 구속하는 준칙이 내가 진정으로 믿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입받은 것이라고 통찰하면, 그것을 탈피하기가 쉬울 테니까. 자기 고뇌의 비본래성을 깨달아야 고뇌를 벗을 수 있다. 세뇌 당했음을 깨달아야 독신(篤信)을 버릴 수 있는 법이다.

작가는 막연히 훌리아가 의심병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고, 그 의심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의심의 사유와 말의 목록을 상세하게 적는다. 그는 미인을 얻어 유명해지고자 할 뿐이다. 재산 목록을 더하고자 할 뿐이다. 자기 소유물에 어쩔 수 없이 애착할 뿐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즉, 훌리아의 의심은 구체적으로 사랑을 부정하는 말들로 옷 입고 있다. <돈키호테>의 안셀모의 의심이 연상된다. 아내가 '기회가 없어서 정숙한 것인지, 기회가 있어도 정숙할 수 있는지'라고 의심했던 안셀모. 의심은 의심의 사유와 말의 목록을 거느린다고 했거니와, 그 사유와 말을 더 많이 발굴하는 것이 작가의 재능일 터이다.

그런데 상대의 마음을 시니컬하게 재단하는 말들은 꽤 많지만, 따지고 보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그는 ○○○를 원할 뿐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에 들어갈 수 있는 말들이 몇 가지 있다. 성욕 해소, 결혼 생활의 안정감,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 정복욕이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 살림하는 능력, 경제적 능력 등.

이런 말들도 어느 정도 담론을 형성하는 것 같다. 이 담론은 상대를 의심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을 깎아 내릴 때에도 인구에 회자된다. 훌리아 역시 그런 담론에 포획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담론은 원래 진실과 상관없이 형성되었으나, 여러 사람들에게 진실인 것처럼 유통되는 말의 더미다. 완전한 사랑에 관해 유포된 이야기들이 담론인 것처럼, 누군가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고 분석하는 말들의 체계도 담론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사랑 그 실체는 전자의 담론과 후자의 담론 모두에게 포획되지 않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담론을 믿는 것, 혹은 양극단의 담론 중 무엇이 진실인지 판별하기 위해 고뇌하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가.

그러나 소설은 종교 경전도 윤리학 교과서도 아니다. 소설은 탁월한 지혜가 아니라 허무하고 어리석은 정열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러하기에 훌리아는 죽을 때까지 고뇌한다.

꿈꾸는 영혼, 자기 감옥 속에 갇힌 영혼

▲ <모범 소설>(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박수현 옮김, 아르테 펴냄). ⓒ아르테
훌리아는 남자들이 소설에 나오는 대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바란다. 앞의 순처럼 그녀만의 사랑의 이상과 준칙이 확고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이상과 준칙은 타인의 방식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 속으로 상대를 끌어오려고 하는 점에서 독선적이다.

독선적이기는 알레한드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를 따라 자살함으로써 사랑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그는, 평생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 주지 않고, 질투로 상처받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며, 자신은 남자다워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준칙에 그 역시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이래야 한다는 준칙과 믿음에 사로잡힌 훌리아나, 남자란 이래야 한다는 준칙과 믿음에 사로잡힌 알레한드로나 똑같이 고집스럽다. 이쯤 되면 그와 그녀 모두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존재로 보인다.

그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결코 사랑하지 않으며, 그녀 역시 자기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한다.

우나무노는 그의 사상서 <생의 비극적 의미>에서 이렇게 고집스러운 인간들을 '의지와 신념의 인간', '꿈을 꾸는 인간'이라고 고평하고 소설 전작(全作)에서 그들의 내면을 즐겨 묘파했다.

그가 애지중지한 의지와 신념의 인간, 꿈을 꾸는 인간은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자기 감옥에 갇힌 인간이다. 열렬히 꿈꾸는 사람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은 자 있는가. 하여 종종 이상이 높은 사람일수록 독선적이다.

해탈하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만의 감옥에 갇힌 존재이다. 내가 겪어온 것들이 성격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성격과 가치관을 변경할 수 있다면 운명도 바뀔 것이나, 대부분 성격과 가치관과 운명은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나를 형성해 온 것들이 바뀔 수 없듯 나의 사랑 방식이나 준칙은 어지간해서는 바뀔 수 없다. 그렇게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자신만의 감옥을 만든다.

훌리아와 알레한드로는 어쩌면 이러한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 가련한 영혼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이를 비난하고 계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소설에서 구하는 것은 현명하게 사랑하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우리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 받는 위안이 고작 아닐까.

접속을 기다리며 불구를 견디기

작가가 통찰한 대로, 현인들이 모두 밝게 보았듯, 사랑의 사슬로 엮인 두 사람 간의 자아의 벽은 견고하고도 견고해서 과연 진정한 만남이 가능할까 싶다. 소설에서 많은 연인들을 만나면서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자아의 견고함'이다.

자아라는 것이 그토록 굳건한 이상, 진정한 접속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진정한 접속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기적이 죽음 직전의 찰나에서만 일어나도록 설정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접속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절망해야 할 것인가, 기적의 순간이 오기는 오므로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이렇다. 사랑은 완성된 채로 오지 않는다. 합일에 대한 기다림만이 있을 뿐. 알레한드로는 처음에 훌리아를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았다. 훌리아의 의심대로 경국지색의 미인을 얻음으로써 으스대고 싶은 욕망이 보다 강했다. 살아가면서 아내가 원하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해 주거나,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등 폭력적으로 굴기도 했다.

그의 사랑은 불구인 채 시작되었고 진행되었다. 그런데 훌리아의 죽음 직전 헤아릴 수 없이 크나 큰 사랑(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주며 결국 그녀를 따라 자살한다. 훌리아의 죽음과 알레한드로의 자살은 나름대로 사랑의 완성이다. 함께 죽었으니 드디어 자아의 벽도 허문 셈이다.

죽음 앞에서야 사랑의 완성이 가능하다니. 소설적 설정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아의 벽을 허물고 진정으로 접속하는 사건은 비일상적이고 이례적인, 특별한 순간에만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절름발이 두 사랑이 만나서 이 특별한 찰나를 기다리며 불구를 견디는 것, 그 견뎌가는 과정이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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