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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 타령으로는 자연도 인간도 보호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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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 타령으로는 자연도 인간도 보호 못해!

[프레시안 books] 박호성의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

책을 한 권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읽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쓰기에 쏟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내가 박호성의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후마니타스 펴냄)을 처음 읽고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소위 환경을 전공한다는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독서와 사색의 결과물을 보면서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책과 논문을 뒤적이고 생각을 거듭해야 도달할 수 있는 주제들을 일깨워준 것에는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소위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들'끼리 쌓아온 기준에서, 논쟁에 대한 종합과 엄밀성이 조금 못 미칠 수 있지만 이점이 오히려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조금이나마 높이고 있는 것 같아 기쁘기도 하다.

이제 환경(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생태 환경")의 위기는 학자들 사이의 고답적인 논쟁에 머물 수 없는 인류가 직면한 절체절명의 과제이기에 협소한 전문가를 넘어서는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학문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더 나가서 이 글이 저자가 세우고 있는 이론적 기획의 일부이기에 더욱 큰 기대를 하게 된다.

곳곳에 저자의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현실에 대한 진단도 인상적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논리가 일상까지 파고들면서 인간을 "영혼 없는 기계"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38, 180쪽)은 매일매일 미디어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묻지 마 살인'에 대한 뉴스와 겹치면서 인간 본성의 황폐화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박호성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자동차 문화의 예를 통해 드러난 인간성의 황폐화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운전자(영혼 없는 기계)로서의 우리는 타인에 대한 소톱만큼의 배려도 없이 전투하듯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86~188쪽)

저자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와 약탈이 "인간의 '자연'", 즉 인간 본성 자체를 더욱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처한 위기의 근저임을 생각하도록 한다. "인간은 자연을 죽임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171쪽)

물론 전체적인 논조에서 치밀한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표현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약점이라기보다는 전문가를 넘어선 독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태적 위기에 대한 진단은 근본적이고, 그래서 비관적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치유 방법에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언급한다.

"이처럼 고통과 난관 속에는 언제나 그것을 이겨내도록 이끌어 주는 희망의 샘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샘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희망 없는 일은 없다. 다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16쪽)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의지와 희망을 북돋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본문 곳곳에 표현된 '낭만주의적' 논조의 낙관론은 저자 주장이 가지고 있는 정합성을 떨어뜨릴 때가 있다는 점은 지적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생태적 위기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날로 높아져"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촉진할 역동적인 '잠재력'으로 작용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179쪽)

생태 위기마저 새로운 돈벌이 기회로 생각되고 있는,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은 오직 시장을 통해 충족되는 이기적인 '삶의 질'의 추구로 생각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마치 인간적 공생주의를 강압하는 인류사의 변증법적 제재가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159쪽)

전 지구적인 위기에 직면해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자연 파괴적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의 위선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자연을 난도질'하는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흡사 보상 행위인 양 마치 자연미를 찬양하는' 것과 같은 위선적인 문화를 열심히 키워"(172쪽)오지 않았는가?

그러한 목소리가 다시 자본의 의해 포획되지 않기 위해서는 막연하고 감상적인 바람이 아니라 냉철하고 비판적인 분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정책적 개입과 녹색 사회를 향한 이행 전략, 미래 사회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책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톤이 너무 강해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목소리가 그것에 압도당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책의 내용 중 논쟁이 필요한 주제들을 차례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자연주의 vs. 인간주의

먼저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관계를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자연의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자연은 인간적 자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체제 아래서 합의된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위협받고 있으며 인간 생존을 위한 생태 환경 조건마저 위험에 빠져 버린 상황의 '비정상성'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인간 본성은 '자연'으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한 후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 그 자체가 '인간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인간적 자연"은 사람들이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도록 이끄는 소명을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이런 정신과 가치는 "인간의 본성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자연의 요청"으로 제시된다. 이런 주장으로부터 저자는 "평등 의식의 선양, 연대 정신의 함양을 지극이 자연스러운 인본주의적 요청으로 이해"하게 된다(37쪽).

지금까지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일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일상적인 담론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대한 호소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전개되어온 인간 사회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제기된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론적 쟁점을 뭉뚱그려 덮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인간 세계와 생태계 요소 사이에 상호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어떻게, 어디쯤 방점을 찍을 것인가, 생태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접점은 과연 어디인가, 아니면 그 둘은 오로지 양자택일의 대상일 따름인가 등의 문제를 꾸준히 탐색하는 일이 우리에게 던져진 난해한 인류사적 과업"(61쪽)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난해한 작업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논의하기보다는 너무 쉽게 절충적인, 때로는 모호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경계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간과한 채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는 동일한 것"(272쪽)이라고 선언할 있겠는가? 저자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을 논의하면서 언급한 테드 벤턴의 지적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포함한 많은 사상가들이 "자연적 조건과 한계에 대해 이론적으로 온전하게 인식하는 것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96~97쪽)는 비판이 저자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어려움은 소위 프로메테우스주의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 자연을 단지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위한 수단과 대상으로 생각하는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연 그 자체의 독자성과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할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의 독자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되면 근본 생태론(deep ecology)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과 착취 문제를 간과하고 모든 인간을 자연 파괴의 공범으로 몰아가는 보수적 입장으로 치우칠 위험이 크다. 반면에 인간의 독특성만을 고집한다면 생태 위기를 기술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경제적 제도나 행정적 개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과소평가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생태 중심주의는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와 억압을 간과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 생태론(social ecology)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기제를 무시한다는 점 때문에 생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비판받는다. 또한 생태 중심주의는 생물학적인 환원론에 치우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 여성이 가지는 지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높기 때문에 (사회적) 에코페미니즘으로부터도 공격받는다. 다른 한편 인간 중심주의는 여전히 개발과 성장의 고리로부터 단절하지 못하고 자연이 인간 사회를 한계 짓는 외적 조건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논란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앞에서 정리한 저자의 논의는 이러한 쟁점들을 모두 우회한 채 자연 자체에 내재한 인간주의와 자연의 요청을 받아들인 인간주의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인간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에서 제기되어온 논쟁점들을 흐리고 있다. 자연주의적 입장을 지지할 때에는 저자의 강한 인간주의적 경향이 그것을 약화시킨다. 인간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자연주의에 대한 호소와 불편하게 동거하게 된다. 결국은 두 가지 입장 사이를 오가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신비화

다음으로 자연에 대한 신비화를 자연주의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혼동은 곧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자연 그 자체를 신비화하는 생태 중심주의(ecocentrism)의 극단 사이의 혼란이다. 인간과는 독립적인 자연의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곧 인간 의식을 자연에 투사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음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는 다른 생명체의 경우와 마차가지로 인간의 본성에서도 그대로 발현된다. 이를테면 인간의 '자연', 요컨대 인간 본성은 자연적 '인본주의(humanism)'의 직접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이미 살펴보았듯이 자연에서 발원한 인간적 평등 의식 및 연대 정신은 곧바로 인간 본성에 뿌리 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적 공존·공생 추구 의지 역시 바로 이런 인간 본성의 발로임은 자명한 이치라 할 수 있다." (286쪽)

미생물과 인간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간주하는 극단적인 자연주의 또는 생태 중심주의를 고수하지 않는 한 자연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물질적 환경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의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규범적' 주장과 '존재론적' 분석을 구별해야 한다. 먼저 존재론적 분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종종 자연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연주의적 해석은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인간이 자연의 한계 안에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설명이 인간 사회가 가지는 독특성과 인간 사회 안의 문화적 다양성과 투쟁을 간과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대 구조에 대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인간의 언어활동이 물리학적, 생물학적 구조로 환원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두뇌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 활동을 생물학적 또는 생화학적 구조로 환원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적 한계는 단순한 외적 강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관계와 제도를 매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생물학적 결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적 조건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존재론적으로 자연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인간사회가 가지는 독특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자연적 한계에 대한 규범적 주장은 존재론적인 분석을 넘어 자연으로부터 인간 사회를 규제하는 가치를 이끌어 내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규범적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자연의 내재적 가치는 지극히 인간주의적 원리의 투사(평등 의식과 연대 정신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로부터 도출되고 있다)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생태 중심주의자들의 주장은 종국에는 그들의 생각하는 가치를 자연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혼동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환원론적 자연주의(non-reductionist naturalism)'를 제안한다. 장구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동물과 생물학적 특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다양한 동물종과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독특한 문화와 생존 방식을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자신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공존해야할,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진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과 이들 모두가 처한 생태적 조건에 대한 인식은 존재론적인 인과 설명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독특한 진화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문화, 가치, 규범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자연적 조건의 전제하에 생겨나지만 그것을 환원할 수 없는 발현적 속성(emergent powers)을 가진다.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개념화하면서도 사회적, 환경적 조건에 따라 주어진 자연적 특성이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 본성이 바로 자연의 '인본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고, "자연은 본래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286, 297쪽)이 자연주의에 대한 규범적 주장과 존재론적(인과적) 분석의 혼동으로부터 연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자연 생태계는 그 자체로 조화로울 수도 있지만 폭력적이고, 위계적이며 약육강식의 논리가 관철되는 곳이다. 따라서 자연 생태계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규범적 원리를 도출하는 것은 자연의 '신비화'이며 우리가 처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를 진단하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인간의 본성의 뿌리가 자연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입장인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생태화?

앞에서 논의된 몇 가지 혼란은 책이 가지고 있는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매우 모호한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을 정치 전략으로 제시한다. 그 내용은 "근본적인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에 나타날 수 있는 "높은 가치의 실현을 위한 행동에 나서게"된다는(33, 247~248쪽) 욕구의 위계론에 근거한다.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에, "개체에 국한되는 '생존 활동'을 뛰어넘는", "개인과 개인 상호 간의 결합을 통해 '집단적 의지'를 실현코자 도모하는 '공존 활동'"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 모순과 그것을 둘러싼 투쟁(계급투쟁, 인종적 갈등, 성적 갈등 등)을 중심으로 한 적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에 의한, 무엇을 대상으로 한 운동인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은 공평한 자원의 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민주주의적 체제를 전제로 한 후에야 자연 생태계를 고려할 수 있는 고차원적 운동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있다.

첫째, 생태 위기의 근원은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 그 자체에 있다는 생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고 있는 비서구 국가들에서 이러한 욕구의 충족 방식 자체의 생태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배가 되고 나서, 즉 어느 정도의 삶의 질이 성취되고 나서야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 생산 양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 욕구의 충족에서부터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욕구 충족의 위계는 서구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 많은 생태 이론가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는 사상적 근원은 비서구의 여성과 농민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의 의식 수준은 아직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입장이 비서구의 사상적 전통을 강조하는 저자의 입장과 공존할 수 있을까?

결론 부분에서 보이는 저자의 정치 전략은 여전히 근대적인 정치 체제와 운동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도, 그 비판에 근거한 녹색 사회로의 이행 전략도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와 관련된 이러한 모호성은 저자가 근대적 정치 원리와 공존하기 어려운 '원시성'에 호소할 때 더욱 심각해진다.

저자는 "현대적 원시인"(39쪽)을 동경하고 있다. 알프스와 같은 장엄하고 거대한 자연이 북돋아주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사회적 적대와 투쟁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157쪽). 정치 체제와 전략의 근대적 성격과는 공존하기 어려운 원시성에 대한 호소와 동경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녹색 사회로의 전환은 '지금, 여기'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 투쟁, 열망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이행의 전략을 도출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과제를 뒤로 미룬 채 원시성의 현대적 복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 생태계를 아우르는 총괄적 이념"이 된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친화적 연결고리로 기능할 정신적·실천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은 "'생태 환경' 민주주의를 모든 생명체 상호 간의 동등권 복원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220~221쪽).

저자는 자연은 "우리 인간을 필연적으로 서로 '연대'하도록 창조했다"고까지 말한다. 인간은 "무한히 유한한 존재로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자연에 의해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223쪽). 빈약한 정치 전략은 앞에서 비판된 인간주의화된 자연주의(자연주의의 규범적 혼동)에 의해, 즉 자연에 내재한(투사된) 아름다움과 숭고한 가치들에 의해 보완되고 있는 것이다.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연대는 자연의 의지가 투영된 인간 본성이 지닌 아름다움"이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삶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극진한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정신적 결의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무력하다(256쪽). 녹색 운동의 목표를 "헌신적인 상부상조 정신을 뼈대로 하여 사회 구성원 상호 간의 굳건한 평등 및 연대를 촉진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회 환경을 정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환경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의 자연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진작시키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구체적 분석이 결여된 감성적 호소일 뿐이다(256쪽).

*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나의 이론적 비판이 책이 가지는 미덕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곱씹어서 생각해야 문제들을 저자의 깊은 사색을 통해 전달해 준 것 자체로 커다란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책 어디서엔가 경계하고 있듯이 소위 학자들의 구태의연한 비판하기로 비쳐질 위험을 무릅쓰고 비평의 글을 쓰는 이유는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생태 위기와 녹색 사회로의 전환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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