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알 수 없는 그의 마음을 두고, 극에서 극으로 널뛰기를 하던 도에게 현명한 누군가가 충고한다. 그는 너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그래도 도는 왠지 믿게 된다. 그의 상냥하고도 사려 깊은 말들, 따뜻하고 갈구하는 듯한 눈빛을 끈질기게 떠올리며 자신의 믿음에 근거를 댄다.
그러다가 도는 그와 사귀게 된다. 그는 훌륭한 미덕을 모두 갖춘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어쩔 때는 악덕이란 악덕은 다 지닌 사람 같기도 하다. 도는 평생 기다려 왔던 사람을 만난 듯 행복하지만, 행복의 시간만큼 긴 시간 동안 그가 나쁜 사람일까봐 또는 사랑을 잃을까봐 불안에 떤다.
행복의 말만을 들은 친구들은 도에게 충고한다. 넌 그를 숭배하는 광신도 같다고. 불안의 말만을 들은 친구들도 충고한다. 넌 너의 불안을 끈질기게 믿는 광신도 같다고.
▲ <돈 끼호떼 2>(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음, 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도가 광신도인지 과학자인지, 어느 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다만 도가 무척 외롭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고군분투는 짐작과 다르게, 혼자 치러야 할 전투였다. 그는 <돈 끼호떼>(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음, 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에서 비슷한 병을 앓는 사람들을 만났다.
의심 지옥에 빠진 과학자,
상대의 마음을 연구하고 실험하다
이 소설에는 돈 끼호떼 말고도 다른 연인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의미심장한 사랑의 비밀을 품고 있다. 세르반떼스는 짧은 삽화에서조차 인간 마음의 깊은 곳까지 예리한 닻을 드리운다. 괜히 고전이 아니다. 다음 이야기는 <돈 끼호떼>의 삽화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다. 어찌나 인상적인지 르네 지라르도 그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중요하게 인용한 바 있다.
안셀모는 아내, 아름다운 까밀라를 지극히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의 짝패, 의심이라는 악마의 공세에 굴복하여 지옥같은 고뇌에 빠져든다. 까밀라는 정숙하다고 정평이 나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의심한다. 까밀라가 기회를 갖지 못하여 정숙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구애하고 유혹해도 그것을 이겨낼 정도로 정숙한 것인지 그는 궁금해 한다.
그는 이 의심 혹은 호기심을 속으로 삭이기보다 실험을 통해서 만족스런 대답을 얻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절친한 친구 로따리오에게 까밀라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안셀모의 소망은 로따리오의 구애에 까밀라가 굴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까밀라를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의심이라는 반갑지 않은 악마를 동반한다. 사랑에 깊게 빠진 연인일수록 자기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끈질기게 의심한다. 특히 상대의 감정을 의심하는 경우, 의심의 층위는 깊고도 다층적이다.
그는 나를 사랑할까? 대안이 없어서 나를 사랑하는 걸까, 대안이 있어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이전에 사랑했던 다른 연인들보다 더 나를 사랑할까? 앞으로 만날 다른 연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할까? 나에게 정절을 지킨다지만 기회가 없어서 그러는 걸까, 누군가 유혹해도 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외에도 많다.
의심 지옥에 갇힌 연인은 상대의 무심한 눈빛 하나에도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다. 상대의 어두운 눈빛에 맞닥뜨린 연인은 상상 속에서 자문한다. 그는 이제 나를 사랑하기를 그친 걸까.
마치 과학자처럼, 그는 의심이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치밀하게 따진다. 안셀모는 아내의 정절을 단순하게 의심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받아도 정숙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의심은 이렇게 구체적인 말(語)의 무리, 의심 사유(事由)의 목록을 거느린다. 그는 막연하게 떠도는 불안을 구체화된 의심의 언어로 고정시키며, 사유의 목록을 끈질기게 추가한다. 그는 상상이 가능한 모든 영역을 개척하면서 의심한다. 상상은 때로 기발한 수준으로까지 치닫는다. 그 상상력의 범위와 기발함은 천재 과학자의 상상력을 방불케 한다.
수많은 질문들 사이를 헤매는 그는 상대의 마음 밑바닥까지 탐사하고 싶어 한다. 서툰 연인은 때로 검사가 되어서 심문한다. 당신 마음의 움직임 그 미세한 결 모두를 내게 알려 다오.(한 순간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그 때 그 말 혹은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보고해다오…. 그런데 상대의 어떤 대답도 또 다른 의심을 낳게 마련이다. 그의 대답은 이런 뜻일까, 저런 뜻일까…. 그 대답은 진심일까, 나에 대한 예의로 듣기 좋게 말한 거짓말일까….
의심 지옥에서 허덕이는 연인은 과학자와 같은 치밀함과 분석력과 상상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추적하고 탐사하고 연구한다. 그의 호기심과 인식욕은 한도를 모르고 탐욕스럽게 흐른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 돈 끼호떼도 이런 인식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산초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소식을 듣는 둘시네아의 모든 동작과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보고해 달라고.
"예를 들면, 내 소식을 전하는 동안 그녀 얼굴색이 어찌 변하는지, 내 이름을 들으며 어쩔 줄 몰라 불안해하는 모습이라든지, 혹시 권위있는 아름다운 단상 위에 앉아 계시지는 않는지, 만약 서 계시다면 다리 한쪽을 위로 두다가 다른 쪽을 위로 하시는지, 자네에게 전하려는 답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말해주시는지, 표정이 부드럽다가 쌀쌀해지고 씁쓸하다 사랑스럽게 바뀌는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가다듬으려 손을 올리는지. 결론적으로 이 사람아,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며 행동을 관찰하라는 걸세. 자네가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모두 해주면 나는 그녀의 가슴속 은밀한 곳에 숨기고 있는 내 사랑에 관계되는 비밀을 알아낼 테니까. 산초, 자네가 몰랐다면 알아둬야 할 것이, 연인들 사이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나 행동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가장 정확한 통신수단이어서 영혼 저 깊은 곳에 일어나는 소식 일체를 전해주거든." (2권 124~125쪽)
돈 끼호떼의 이런 말은 무척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인식욕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그 한 올 한 올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알고 싶어 한다.
자연의 신비에 매혹된 과학자처럼 그의 인식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한계를 모르며, 누락된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식욕에 불타는 과학자-연인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단서들을 찾아 헤맨다. 연인의 눈짓이나 표정이나 자태 모든 것은 그 심연의 비밀을 누설하는 단서들이다.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그러니 돈 끼호떼는 둘시네아의 표정, 얼굴색, 다리의 위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모양, 말하는 방식까지 일체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연인들 사이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나 행동이"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소식 일체를 전해주"는 "가장 정확한 통신 수단"이기에.
인식욕에 불타는 과학자는 단서를 캐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수많은 단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2퍼센트가 있게 마련련이다. 2퍼센트까지 알아내야만 하는 과학자-연인은 실험에 착수한다. 그러면서 과학자-연인은 물론,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실험 결과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러하기에 안셀모는 아내를 탐구 주제로 실험실을 차린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실험은 자주 실패한다. 안셀모의 실험 결과는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로따리오와 까밀라는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상상 질투와 상상 희망, 고독한 널뛰기
서두의 도의 상념에서 알 수 있듯, 싹트기 시작하는 사랑은 현실보다는 상상 속에서 바쁘다. 상상 속 사건의 대표적 경우가 질투와 희망이다. 초기의 연인은 상상 속에서 그가 나를 배반할까 의심하며 질투하거나, 그 역시 나를 사랑한다고 상상하며 희망을 갖는다. 앞의 극단적인 사례가 의처증 혹은 의부증이고, 뒤의 경우는 스토커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상상 속에서 연인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악덕의 소유자로 규정하여 절망하다가도 곧바로 그를 가장 아름다운 덕의 화신으로 상상하며 환희에 젖는다. 김빠지게도 대체로 후자는 나의 판타지의, 전자는 미처 인정하지 못한 내 결점의 투사물이다. 내가 꿈꾸는 '한 두름의 미덕의 뭉치'를 그에게 투영할 때 그는 미덕의 화신이 되고, 내 마음의 어두운 면을 그에게 투사할 때 그는 악덕 그 자체가 된다.
둘 모두 상대의 현실과 무관하게 내 마음이 빚어낸 상상물이다. 이런 번다함은 상상 속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혼자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널뛰기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곤혹스럽고, 고독하다.
"질투는 가장 참혹하게 사람을 죽인다"(1권 170쪽)고 세르반떼스는 말한다. 이 소설에는 상상 속 질투에 시달리는 인물이 대거 등장한다. 상상 질투는 숱한 연애담의 중핵이다.
가령 로따리오는 까밀라의 집에서 어떤 남자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의심한다. 그 남자는 실은 까밀라의 몸종 레오넬라의 연인이었다. 로따리오의 질투는 논리마저 갖추고 있었다. 까밀라가 자신에게 쉽게 넘어갔듯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으리라. 그래서 로따리오는 안셀모에게 까밀라의 부정과 배신을 암시한다.
그리소스또모는 마르셀라의 부정(不貞)에 대한 상상을 고집스레 믿으면서, 그녀를 비방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다가 자살한다.
"떠나와 있는 연인에게는 온갖 걱정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라서 그리소스또모도 혼자 상상한 질투나 의혹을 진짜 그녀가 저지른 것처럼 걱정하고 있었던 것뿐일세."(1권 174쪽)
끌라우디아는 비센떼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그에게 총을 쏜다. 죽기 직전에 그는 그녀에게 고한다. 결혼설이 누군가의 장난이었고, 자신은 단 한 번도 배반할 의사를 품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죽어서 다행이라 고백하면서 숨을 거둔 그 앞에서 그녀는 탄식한다.
"아, 이 끔찍한 질투의 광란의 힘이여! (…) 오, 나의 남편이여, 나의 사랑이 그대에게 불행한 운명이 되어 사랑의 잠자리가 무덤이 되어버렸군요!"(2권 688쪽)
"여기 한 연인이 기나긴 그리움과 상상 속의 질투를 이기지 못해 이 거친 초야에 통곡을 하러 왔"(1권 337쪽)다는 돈 끼호떼의 하소연을 기억해 보자. 실제로 그는 둘시네아에게 상상 질투를 느끼지도 않았고, 단지 상상 질투로 괴로워하는 방랑기사들을 모방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이 어떠하든간에, 돈 끼호떼의 뇌리에서 상상 질투는 연애의 필수 조건이다. 이 시대 소설 속 기사들은 상습적으로 상상 질투에 빠져든 것 같다. 상상 질투가 연애의 중핵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 위력을 떨친 듯하다. 상상 질투는 오늘 날 대체로 의부증이나 의처증으로 단죄 받지만, 세르반떼스 시대에는 다소 낭만적인 색채를 띠었나 보다.
(곁길로 빠지는 이야기 하나. 현대인은 사랑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질곡을 쉽사리 질병이나 범죄로 간주한다. 스토커, 의부증, 의처증 등. 수백 년 전 질병이나 범죄가 아니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질병과 범죄가 되었다는 통찰은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병자나 범죄자의 낙인을 두려워하면서 감정을 억압하고 감추며, 그 결과 증상을 깊게 만든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는 견제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수준인데도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끼면서 그 죄의식 때문에 고통을 가중시키는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봐 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상 질투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상상 희망에 차서 환희에 떨기도 한다. "희망은 사랑과 함께 생겨나는 법"(1권 490~491쪽)이라고 세르반떼스는 말한다. 사랑의 탄생과 동시에 희망도 자동적으로 발아한다.
사랑의 싹을 키우는 사람은 아무런 응답을 못 받는 상태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도 나를 똑같이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바로 일 분 전에 상상 질투로 괴로워하다가도 순식간에 이런 희망에 젖는다. 가령 돈 끼호떼는 객줏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말을 탄 채 창에 몸을 기대고 이렇게 하소연한다.
"지금 이 순간 아씨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요? 그대에게 사로잡인 이 기사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 나의 이 아픔에 어떤 영광을 주어야 하는지, 나의 걱정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는지, 나의 이 사랑에 어떤 보상을 주어야 하는지, 마침내 죽어가는 나의 이 안타까운 마음에 어떤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 나의 아씨를 보게 될 태양이여! 그녀를 보거들랑 내 안부도 좀 전해주길 바라노라. 그러나 아니지, 아서라, 그녀를 보고 인사를 하면서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출까 두렵도다. 그리되면 나는 그대를 질투하게 되리니, 그 질투는 너를 그토록 괴롭히던 그 경솔하고 무정한 여인에 대한 질투보다 훨씬 크리니…." (1권 640쪽)
돈 끼호떼는 둘시네아 역시 자신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둘시네아는 그의 사랑에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그의 고통을 어떻게 위무할지, 그의 불안을 어떻게 잠재울지 궁리에 여념 없다. 이것은 물론 둘시네아의 현실과 다르다.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행복한 동일시. 상상 희망은 때로 불안을 잠재우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까르데니오는 루스신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지만, "내 희망을 없앨 수는 없었기에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커다란 사랑에서 나온 행위이고, 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떨어져 있게 되는 고통 때문일 거라 생각"(1권 378면)하며 공포를 잠재운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그의 마음이 변했다'라는 현명한 판관의 선고를 들은 사람은 쉽사리 그것을 수긍하지 않는다. 선고가 거짓이라는 증거를 대기 위해 그는 긴 목록을 작성한다. 그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단지 수줍어할 뿐이다. 혹은 자신 없어 할 뿐이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 광기에 빠질까봐 두려워서 일찌감치 물러서는 것이다. 아니면 사랑하는 나를 고생길에 동반시키느니 차라리 놓아주기를 바란다, 등등.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 제멋대로의 희망을 걷어내기란 근거 없는 질투를 불식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열정이 깊어질수록 연인은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허우적댄다. 열정의 깊이에 비례하여 고독한 공상은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절망에서 환희까지 공상 속에서 널뛰기하는 감정의 기복도 심해진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연애는 고독하지만 사랑은 고독하지 않다고. 시작하는 사랑은 고독한 상상 속 널뛰기를 필히 수반하지만, 무르익은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랑이 농익기 전에 연인들이 감내해야 할 고독의 분량은 만만치가 않다. 고독의 터널을 쉬이 빠져나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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