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4년 전 한 매체에 '아즈마 히로키, 새로운 사상보다 사상의 새로움을'이라는 소개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아즈마 히로키라는 인물에 대한 기초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 비교적 짧기 때문에 약간만 다듬어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 일본 사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인식되는 것 같다. 물론 후쿠다 가즈야가 푸념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라타니를 읽었다면, 요즘의 대학원생들은 아즈마 읽기에 열심히라고 한다. 확실히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즈마는 가라타니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가라타니의 추천으로 데뷔한 아즈마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연재를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설에만 수여되는 미시마 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 책의 앞 띠지에는 아사다 아키라의 다음과 같이 언급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는데("<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예외는 없는 것은 아니다. 1983년에 출간된 <구조와 힘>은 무려 20만 부나 팔렸고, 가라타니의 책도 대부분 네 자릿수로 팔리고 있다.
그런데 아즈마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뜻밖의 길을 걷는다.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치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 문화(서브컬처)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국내에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년)은 그 대표적 결과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책의 수용과 관련하여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을 대표하는 신세대 사상가가 쓴 책이라는 소문에 소위 고급 독자(문학평론가, 사회학자 내지 인문독자들)이 앞 다투어 읽었지만, 얼마 읽지도 않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왜 실망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씌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물화'(코제브가 이야기한)와 '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의를 원했지, 일본 서브 컬처 분석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급 독자임을 보증하는 '인문학'이란 그 자체로 엄숙한 것인데, 모에니 미소녀 게임이니 라이트노벨이니 하는 것은 그에 비해 참기 힘들 정도로 가벼웠다.
참고로 아즈마도 이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의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군" 하고 말이다. 그런데 아즈마는 이에 대해 대충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사상 연구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서브컬처 비평가로서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구가나 비평가들은 오늘날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는 특정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서구 사상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얻은 몇몇 개념들을 그럴 듯하게 자국 상황과 짜 맞추는 데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이를 볼 때, 우리에게 있어 아즈마는 어쩌면 새로운 사상이라기보다는 사상의 새로움(낯섦)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중앙대대학원신문>, 2008년 10월 3일자)
▲ <퀀텀 패밀리즈>(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일본에서 이 소설은 저자가 바로 아즈마 히로키라는 것과 유수의 문학상을 받았다는 등의 몇 가지 이유로 그럭저럭 팔렸는데, 흥미롭게도 국내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가장 안 팔린 저의 책보다 안 팔렸습니다. (웃음) 저자가 아즈마라는 것을 가리고 보더라도 그렇게 엉망인 소설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추측하건대 만약 이 책이 웬만큼만 팔려주었더라면, 그의 다른 책들도 속속 번역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소설'도' 안 팔리는데, 하물며 다른 책이야….
참고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도 인구에 회자되는 것에 비하면 별로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 인터넷 서점 세일즈포인트를 보니 <퀀텀 패밀리즈>보다는 10배 가까이 팔리고 있지만, 출간된 지 3~4년이 지나도록 2쇄를 찍지 못했다고 하니 말 다한 셈이죠. 그렇다면, 왜 그의 소설은 한국에서 그토록 비참한 실패를 맛본 것일까요? 이미 짐작들하고 계시겠지만, 그것은 한국의 고급 독자들이 원하는 아즈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소설가 아즈마가 아니라 가라타니 후계자로서의 아즈마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창작과 비평이라는 '문학적 분업 시스템'이 철저하게 구축된 한국적 상황에서 철학 연구자 내지 비평가가 쓴 소설을 용납하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겠지만, 예컨대 요즘 각광받는 비평가인 신형철이 만약 소설을 발표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많은 이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것이며,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평서보다 많이 팔리지도 않을 것입니다(정말이지 소설이 비평보다 더 안 팔리는 것은 이상한 현상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상(像)은 크게 세 가지인데(①<존재론적, 우편적>의 저자=사상가, 비평가, 이론가, ②<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저자=서브컬처 비평가, ③<퀀텀 패밀리즈>의 저자=소설가), 그중에서 한국의 독자들이 선호도는 ①>②>③이고, 어떤 의미에서 ①과 ②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어도 ②는 창작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유용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2. 경제적인, 너무나 경제적인 동물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이런 식의 수용은 확실히 경제적으로 보입니다. 그 책이 분석하는 대상에는 관심이 없고 분석 후 결론만은 습득하여 활용하는 방식. 하지만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지 않고 다성성, 대화주의 운운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뭐고 현대 세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쩌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이제까지 수많은 사상서와 이론서가 번역되고 학습되었지만, 이렇다 할 이론서나 사상서 한 권 생산되지 못하고 여전히 번역, 학습, 활용이라는 틀을 맴돌며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용 글이나 시효성이 짧은 선정적인 글만 생산된 것은 바로 이런 경제적인 수용 방식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한국의 문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죄르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부터 오늘까지 누누이 언급되고 인용되었던 이 책은 그러나 항상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었던가?"라는 첫 부분만 암송되고 기껏해야 "소설이란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다"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제1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설의 이론>은 총 2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근대 소설의 전개에 대한 서술과 대표작(<돈키호테>, <감정 교육>,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2부는 거의 읽히지도 않고 또 이야기되고 있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별이 빛나는',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문학 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이 이 정도이니 다른 책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평론가들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읽고 "그것 포스트모던 시대의 동물화인데, 왜 있잖아 코제브가 말한…, 스노비즘이 뭔지 아나? 운운" 하는 식으로 쉽게(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하겠습니다.
쉽게 이해되고 활용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호환성이 높게 변형된다는 것인데, 호환성이 높다는 것은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와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꼭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호출되는 것은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유행하는) 이론가라는 이유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써먹은 푸코나 들뢰즈를 들먹이는 것은 아무래도 식상하니까요. 물론 푸코, 들뢰즈라 하더라도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문헌들(프랑스에서 최근에 발굴되거나 출간된)이라면, 희소성이 있으니까 슬쩍 언급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요.
한국어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뒷 표지를 보면 빨간 글씨로 크게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동물화한다"라고 씌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정확히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책 어디에서도 아즈마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사회이고, 그것도 '오타쿠'라는 집단을 통해서입니다. 물론 그런 분석이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성을 띨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분석 대상을 충분히 검토하고, 비교 분석이라는 한 단계를 더 거친 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개별 분석에서 보편적인 이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나 이상의 또 다른 개별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독자들은 미소녀 게임, 캐릭터 모에 분석에서 느닷없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류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중간 항이 빠진 이런 독서 내지 그에 기반을 둔 비평을 저는 '세카이계 독서(비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마냥 비난하고 싶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독서나 비평도 동물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3. 아즈마 히로키와 라이트노벨
▲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현실문화연구 |
그리고 다음해인 2008년 소설가로 전향하여 사쿠라자카 히로시(桜坂洋)와 함께 <캐릭터즈>라는 소설을 출간하고, 그 다음해 앞서 언급한 <퀀텀 패밀리즈>를 상재하고 상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뭐랄까 한동안 쉬고 있던 아즈마의 본격적인 복귀를 알리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소설을 쓰는 것 이외에 <사상지도(思想地図)>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몇 권의 대담집을 펴내고, TV 애니메이션 <프랙탈>의 스토리 원안자로 참여하고, <일반 의지 2.0>이라는 책을 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해가고 있으며, 그 흐름은 큰 변화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도 <사상지도β>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몇 곳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물론, 적잖은 대담에 참여하고 잡지, 신문 등에도 꾸준히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6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하는 두 책이지만, 큰 차이점은 발견하기 힘듭니다. 즉,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말 그대로 '속편'의 역할에 충실하다 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기 위해 반드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전 저작을 읽어놓는 게 이번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속편의 특징인 반복 및 요약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읽으면, 아즈마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론적인 입장에서 그러하다는 것이지, 실제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게 문제면 문제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책에서는 전작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동물화'라는 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실존'이라는 표현이 몇 번 등장합니다. 또 이전 책과 비교하여 서술 태도에서 어떤 적극성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아즈마는 어디에선가 누가 자신의 글을 읽는지를 매우 의식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의 적극성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보다 좀 더 구체적인 독자를 상정하는 데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으로 상정한 독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순문학 또는 장르 문학 독자이되, 2000년대 중반에 문학계의 큰 변화에 적잖은 당황한 독자라 하겠습니다. 즉, 아즈마는 이들을 앞에 두고 말하자면 새로운 문학적 환경이 어떤 것이고, 또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떤 작품이 나왔으며, 이들 작품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조근조금 서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2000년 중반에 분 문학계의 큰 변화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라이트노벨 붐이었습니다. 물론 라이트노벨의 기원은 1970년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한 것은 1990년대이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독자(즉 청소년 독자)를 상대로 한 변방의 문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순문학뿐만 아니라 장르 문학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합니다. 주의할 점은 이때의 변화란 단순히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폭발적인 시장의 증가는 이미 1990년대에 이루어졌습니다).
바꿔 말해,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존의 문학가들은 라이트노벨에 무관심할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 장르가 다른, 애니메이션 서사물의 일종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 어떤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라이트노벨 작가들이 기존 문학 진영으로 넘어와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새롭게 등장한 젊은 작가들은 라이트노벨에 위화감을 갖기는커녕 도리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기존의 문학과 라이트노벨의 구별이 흐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문학의 진화한 형태로서 라이트노벨이 인지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순문학(그리고 장르 문학)을 출판하던 출판사들도 하나둘씩 라이트노벨 레이블을 만들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만화나 애니메이션보다 일반 문학 쪽에 라이트노벨 잡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파우스트>라는 잡지입니다. 이 잡지의 주된 필자들로는 '완전히' 라이트노벨 작가로 분류되는 사람들보다는 순문학과 라이트노벨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미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한 마이조 오타로, 사토 유야 이외에 미스테리 계열로 분류되는 세이료인 류스이, 니시오 이신, 오츠이치, 게임 원작자 나스 기노코, 류키시 제로나나 등등. 그런데 이들과 더불어 이 잡지의 중심에 섰던 비평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즈마 히로키였습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메타 리얼픽션의 탄생'이라는 글은 바로 이 잡지에 연재되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사실 라이트노벨도 아무리 많이 팔린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을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그것은 변방의 문학으로 간주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대에 가장 잘 나가는 이론가가 그것을 논리화한다면? 사회적 인식은 아마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참고로 이 잡지는 문예지 분야에서 순문학 잡지, 장르 문학 잡지를 통 털어 판매 1위에 랭크되기도 했습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라이트노벨(비주얼 노벨, 미소녀 게임)은 아즈마 히로키라는 이론가를 얻음으로 비로소 그에 합당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국에서의 라이트노벨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요? 한국의 경우, 1990년대 후반 대원씨아이가 처음으로 라이트노벨을 번역 출간했고, 곧 이어서 학산문화사와 서울문화사가 이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2007년에는 디앤씨미디어가 국내산 라이트노벨 레이블을 창간하기도 했고요. 즉, 한국의 라이트노벨의 역사는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수입되기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에 일어난 라이트노벨 붐을 리얼타임으로 경험하면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오래 전 그러니까 한국 인문학계에서 프랑스 사상의 유행이 정점에 달한(다른 말로 쇠퇴가 시작되던) 시기에 동문선에서 프랑스 잡지 <마가진 리테레르>를 수입, 선별하고, 국내 필진의 글 몇 편을 보태어 <세계사상>이라는 잡지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4호인가 나오고 종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특정 흐름 자체를 통째로 이식해오는 것은 단행본으로 개별 저작을 수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최근에는 비록 선집이지만 <뉴레프트 리뷰>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한다고 하겠는데, 라이트노벨계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학산문화사에서는 앞서 언급한 <파우스트>라는 권당 평균 1000쪽에 육박하는 잡지를 거의 리얼타임으로(번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이 잡지에는 라이트노벨뿐만 아니라 주요 작가의 인터뷰, 그리고 라이트노벨 출판계 소식,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적인 글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문학이든 사상이든 특정 한 조류가 이처럼 통째로 옮겨진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과연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단 또는 문학평론가들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 이들 작품에 아즈마의 소설만큼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 문학의 독자 대부분은 아마 라이트노벨에 강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소위 근대 문학을 공부하고, 또 논해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과는 별도로 시내 대형 서점에 나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라이트노벨의 서가가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국내 소설 서가를 능가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번역과 창작이라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출간되는 종수만 놓고 보면, 라이트노벨은 국내 소설의 수십 배가 넘는 수준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라이트노벨의 압도적인 증가, 이것은 호불호를 차치하고 문제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외면해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한 예로 2009년에 한 기자와 통화를 하던 중 라이트노벨에까지 이야기가 미치게 되었는데, 국내 문화계에 밝은 문화부 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노벨이 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치부 기자도 라이트노벨이 무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본 적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냥 이런 것이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라이트노벨은 그렇게 많이 소개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그것은 생산과 유통의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일본의 경우 현재 라이트노벨 출판에 대형 출판사들이 대부분 뛰어든 상태입니다(잡지 <파우스트>는 일본 매출 1위인 고단샤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국내는 주로 일본 만화를 번역, 간행하는 출판사들만이 라이트노벨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학의 변종이라기보다는 만화의 변종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러스트와 삽화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만화와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근대 소설도 삽화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순전히 글자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라이트노벨 출판에 문학동네와 같은 출판사가 뛰어들었다면, 사태는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문학동네는 자신들이 보유한 소설가와 평론가를 동원하여 담론화를 시도했을 것이고, 아마 그것을 통해 라이트노벨에 대한 인식 개선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문학(즉 <문학동네>에 실리는)과 융합하여 뭔가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실험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 저의 상상이고, 현실의 문학동네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기존의 문학관을 유지하면서 연령대만 조금 낮춘 <풋>이라는 청소년 문예지를 출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풋>은 뭐랄까 저에게는 문단 데뷔를 준비하는 소년소녀를 연습생 삼아 관리하는 잡지 같은 느낌입니다.
5.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과 씨름하기
요약하면, 라이트노벨이란 일본에서 생겨난 문학으로서, 거의 리얼타임으로 한국에 소개되어 무지 못할 정도의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수만 부씩 팔린 책은 부지기수고 <공의 경계>와 같은 작품은 수십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예컨대 오늘날의 20~30대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문학을 공유하고 있다면, 지금의 10대들은 라이트노벨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일본의 경우는 아즈마 히로키가 등장, 라이트노벨에 대한 인식을 일변시켜서 지금은 순문학과 나란히 논의될 정도로 격상된 데에 반해, 한국에서는 여전히 변방의 문학으로써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저를 착잡하게 합니다. 그것은 아즈마의 논의에 동의하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전의 것, 다시 말해 손쉬운 뒤집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은 라이트노벨에 관심이 없었고, 또 내심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애들이나 읽는 소설이다. 나는 고상한(즉 사회와 인간에 대해 고민하는) 문학만 다룬다."
하지만 이런 입장과는 별개로 그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비평가 아즈마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아마도 대부분 입장을 바꾸어 라이트노벨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라이트노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 뒤처진 문학인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즉, 우리는 라이트노벨만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도 수입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찌 됐든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말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고 라이트노벨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라이트노벨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는 정확히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즉, 이 책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다룬 책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라이트노벨, 미소녀 게임(비주얼 노벨)에서 추출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몇몇 작품(예컨대
하지만 짐작컨대 한국의 비평가들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왜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표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존의 문학을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을 때, 오쓰카 에이지는 그와는 다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데즈카 오사무에서 유래하는)을 주장했는데, 아즈마 히로키는 이 두 가지와는 또 다른 '게임적 리얼리즘'이야말로 오늘날의 문제에 접근하는 서사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란…하는 식으로 매우 경제적으로 이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는 제1부에 그치지 말고 작품 분석을 다루고 있는 제2부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묘하게도 이 책은 <소설의 이론>과 유사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2부로 나뉜 것이나 부록이 포함된 것이나). 하지만 모두 낯선 소설과 게임들이어서 견적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몇몇 이론적 논의를 절취하는 것에 만족하고 기존에 하던 대로 문학을 읽고 평하는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물론 라이트노벨 이야기가 나오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네.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지만 말이야. 아즈마 히로키는 말이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이 책은 말이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인데…" 운운하며 관대한 표정을 짓는 여유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독서가 해당 책이 제기하는 '문제'와 대결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대결은커녕 제기된 '문제'를 지식으로서만 흡수하는 것은 그야말로 저급한 독서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문학 연구가나 비평가들은 이제껏 이런 독서를 해왔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론 생산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지식으로 얻은 외국 이론을 작품에 적용하는 데에 만족해온 게 아닌가 합니다.
김애란이 뛰면 스피노자가 뒤를 뒤따르고, 탈북자가 나오면 아감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모호한 대상이 등장하면 라캉(지젝)이 출현합니다. 그래서인지 책 좀 읽었다고 하는 요즘 작가들은 일부러 그런 해석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문학 연구자들이 보이는 외래 사상의 지대한 관심은 이런 풍토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짐작컨대 현대 사상을 소비하는 사람의 3분의 2 정도는 아마 문학 전공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소설가나 비평가, 그리고 문학 연구자들에게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은 결코 쉽게 소화되어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전처럼 창작하고 김애란, 김연수 소설을 비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즈마는 포스트모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명확히 구분하고, 전자를 1970년대 이후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후자를 그 가운데 생겨난 하나의 '사조'로 분류합니다.
이는 라이트노벨을 문학이나 학계에서 말하는 소위 '탈근대 문학'(최근 한국에서 생산되는 젊은 문학은 대부분 여기에 속합니다)의 변종이라는 주장에 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라이트노벨은 단순히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생산, 유통, 소비라는 환경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문학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문학'은 소설의 내부에서 몇 가지 전위적인 실험을 해오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보수적인 문학 작품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들의 소설은 문예지에 게재되어 문학상을 수상하고 대학에서 교재로 취급된다. 이러한 환경은 포스트모던의 조건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40쪽)
아즈마의 관점에서 보면,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등과 같은 오늘날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내용만 포스트모던하지 지극히 근대적인 방식으로 제작되고(한국 문단은 문예창작과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인정받고(보수적인 문예지와 강단 비평가에 의해) 유통되고 있을 뿐입니다(교과서에 실리고 대학에서 읽히는 등). 따라서 그와 전혀 다른 라이트노벨이라는 것이 등장했다는 주장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씨름하지 않고서 이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한국적 상황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위 주장은 이전의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할 때 이미 지적한 것이기도 한데, 그때 한국 문단과 연구자들이 보인 히스테릭한 반응을 모두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근대 문학이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근대 문학의 이후의 문학'이 있다. 박민규, 김연수, 김애란의 문학을 보라. 노벨상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가라타니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문학도 근대 문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을 읽을 때, 아즈마 히로키라는 인기 필자에 대한 호기심에 머물지 않고 내용 그 자체에 집중해 본다면, <근대 문학의 종언>만큼이나 폭발력을 갖춘 책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정확히 <근대 문학의 종언>이 끝난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지금의 문학과 도래할 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과 '근대 문학의 종언' 논쟁의 제2라운드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제2부를 소화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 자체는 일본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작 일본에서보다도 한국에서 더 회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소란이 이 테제에 담긴 문제의식을 고민하는 과정이었는지 단순히 그로부터 한국 문학을 옹호하고 보호하려는 몸부림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테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면 별반 바뀐 게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사실 이 테제만큼 모처럼 문학인을 논쟁의 광장에 모이게 한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문학이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직 분단이라는…' 운운, '공감 능력을 기르는 데는 문학이 유용하다, 학교 폭력 문제도 문학 교육으로…' 운운 하고 제자리에서 걷고 있을 때, 가라타니의 테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근대 문학 이후'를 서술한 것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를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스스로 문제를 만들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 경우 할 수 있는 것이란 문제를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뿐일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근대 문학의 종언'뿐만 아니라 '그 이후'도 사실상 수입한 셈인데, 아마 이런 수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학 담론에 존재하는 이런 반복 강박을 멈추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답은 이미 이야기한 셈인데, 그것은 주어진 문제와 대결하여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낼 힘을 갖는 길 외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독해가 그 시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6. 이 서평의 한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이 글은 서평으로 씌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서평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서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요약하는 로쟈류의 서평과 책 내용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장정일류의 서평이 그것입니다.
두 서평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만(저는 두 사람의 서평을 즐겨 읽습니다), 저는 서평을 쓸 때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정작 책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독해는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이는 아마 다른 기회를 통해 이루어질 텐데, 일단 이점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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