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빠로부터 '세계'를 선물 받은 딸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빠로부터 '세계'를 선물 받은 딸은…

[어린이책은 세계다] <엄마의 역사 편지>·<세계사 편력>

어린이날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89호는 어린이 책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어린이 책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어린이 책은 무엇입니까? <편집자>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유라시아 대륙을 보자. 서쪽에 섬나라 영국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유럽이 있다. 그 아래에는 유럽 사람들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멋대로 국경선을 그어 놓은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이 역시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여기에 비하면 동쪽은 매우 단순하다. 거대한 나라 중국이 동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쪽과 남쪽으로도 한국, 일본 등 많은 나라가 있지만, 중국의 존재감 때문에 유럽처럼 복잡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처럼 거대한 중국 옆에서 역사를 영위해 온 탓일까? 항공기가 떠다니고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인데도 지도만 보면 한국과 세계의 심리적 거리가 크게 느껴진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인도라는 또 다른 거대한 나라가 있다. 인도는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처럼 유럽(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용케도 많은 나라로 쪼개지는 운명을 피하고 거대한 덩치를 유지한 채 독립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서쪽으로는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유라시아라는 구대륙만 놓고 보면 인도야말로 세계 어느 곳도 이웃처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세계의 중심'이 아닐까?

서두를 이처럼 길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지금부터 한국과 인도에서 두 세대 이상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나온 '역사 편지'를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1930년대 인도의 아버지 네루가 딸에게 보내는 <세계사 편력>(1933년)이고, 또 하나는 2000년대 한국의 엄마 박은봉이 딸에게 보내는 <엄마의 역사 편지>(2000년)이다.

어린 딸에게 보내는 편지인 만큼 둘 다 역사에 대한 솔직하고 진지한 태도가 돋보인다. 그런데 두 '역사 편지'에는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된 차이와 더불어 앞에서 살펴본 지리적 환경에서 비롯된 차이도 엿보인다.

아빠의 눈으로 본 세계사, <세계사 편력>



▲ <세계사 편력>(자와할랄 네루 지음, 최충식·남궁원 편역, 일빛 펴냄).. ⓒ일빛
<세계사 편력>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에 허덕이던 시절, 독립 운동을 이끌던 자와할랄 네루가 세계사에 대한 생각을 적어 딸에게 보낸 편지들의 모음이다. 이 책은 분량도 비교적 방대하고 내용도 어려워서 어린이는커녕 청소년이 읽기에도 벅찰 지경이다. 그래서 이 책을 세 권의 양장본으로 완역한 출판사에서도 청소년용으로 간추린 <세계사 편력>(최충식·남궁원 골라 옮김, 일빛 펴냄)을 따로 펴냈다.

그런데 막상 <세계사 편력>의 서문을 보면 놀랄 일이 있다. 네루가 이 방대하고 어려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딸은 겨우 열 살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인 딸에게 쓴 편지가 고등학생이 읽기에도 버거운 글로 여겨지고 있다니!

그러나 <세계사 편력>이 나온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네루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브라만 계급의 가문 출신이었다. 일찍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는 평생을 인도의 독립 투쟁과 재건을 위해 바쳤다.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역시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조국의 현실에 눈을 떴고, 아빠가 <세계사 편력>을 탈고하던 16세 무렵에는 이미 당당한 독립투사가 되어 있었다. <세계사 편력>은 그런 딸에게 인류가 어떤 길을 밟아 왔고 그 가운데 인도인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편지였다. 설령 조금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해도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당시의 한국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맞선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의 주모자들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학생들이었고, 일본 천황을 저격한 이봉창은 14세에 항일 운동 단체인 금정청년회를 조직했다. 지금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만 들어가도 식민지 현실과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많은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이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세계사 편력>을 읽다 보면 인도의 10대 소녀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대 문명이 일어난 서아시아·이집트·중국, 중세 세계를 주름잡은 아라비아, 근대 들어 인도를 지배한 영국 등 세계사의 주역들이 모두 인도의 이웃처럼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리적 조건은 <세계사 편력>이 어린 인디라 간디에게 어렵지 않았던 이유의 일부일 뿐이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철저히 인도 중심으로 씌어 있는 <세계사 편력> 자체의 서술에서 찾아야 한다. 네루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작은 물결까지도 놓치지 않으면서 섭렵해 나간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서술은 어느 한 지점에서도 자기 시대에 인도가 처한 상황과 인도인이 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인의 역사적 과제는 네루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처럼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흐르지 않고 보편적인 세계사의 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제시된다.

"아시아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소생하고 있다. 세계의 눈길은 아시아로 쏠리고 있다. 아시아가 위대한 역할을 떠맡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엄마의 눈으로 본 세계사, <엄마의 역사 편지>

{#8991221629#}
▲ <엄마의 역사 편지>(박은봉 지음, 이상권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 ⓒ책과함께어린이
세월은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아빠의 편지를 읽으며 인도인의 과제에 대해 눈을 뜬 인디라 간디는 아빠의 뒤를 이어 인도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그 동안 한국과 인도는 다 같이 제국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나 세계가 주목하는 신흥 국가로 성장해 왔다. 세상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하지만, 1930년대에 비하면 한층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난 세대를 항해 대한민국의 엄마가 다시 '역사 편지'를 썼다.

2000년에 출간된 <엄마의 역사 편지>(박은봉 지음, 이상권 그림, 책과함께어린이 펴냄)의 저자는 이 편지의 수신인인 딸 세운이가 그해 열 살이 되었다고 밝혔다. 네루가 <세계사 편력>을 처음 썼을 때의 인디라 간디와 같은 나이이다. 그러나 역사적 환경이 달라진 만큼 두 역사 편지의 성격과 내용은 적잖이 다르다.

<엄마의 역사 편지>는 <세계사 편력>에 비해 훨씬 적은 분량에 훨씬 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적 소명 의식이 명확하게 담겨 있는 <세계사 편력>과 달리, 이 책은 딸아이가 역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던, 잘나기도 하고 못나기도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1930년대와 달리 2000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초등학생에게 세계사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어디에서도 세계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6학년 2학기에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 관한 지리적 지식을 다루는 단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날이 세계화가 진전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역사를 쉽게 들려주는 책에 대한 요구는 무르익고 있었고, <엄마의 역사 편지>는 그 요구에 부응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무겁게 정리하기보다는 지난 날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간결하게 스케치해 준 것이 좋았고, 온갖 사건들을 딱딱하게 나열하기보다는 단순명료한 주제 의식 아래 중요한 사건들을 부드럽게 풀어 준 것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한국 어린이들이 <엄마의 역사 편지>를 읽는 일은 쉽지 않다. 1930년의 인디라 간디가 <세계사 편력>을 읽을 때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쉽게 풀어 쓰려고 했지만 이 책에 나오는 나라들과 인물들의 상당수는 독자들에게 생소하다. 여기에는 유럽이 주도해 온 세계에서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한국의 지리적 환경도 한 몫 했다. 세계와의 교류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이런 문제는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또 <엄마의 역사 편지>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일정한 주제 의식 아래 개별적인 해석과 설명을 달고 있지만, 전체로 보아서는 현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내용의 나열로 보인다. <세계사 편력>이 장황해 보이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인도 중심으로 집약되던 힘을 이 책에서는 느낄 수 없다. 세계사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서술이 현대 한국인의 삶으로 집약되는 대신 남의 이야기로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더 이상 세계사의 변방이 아니다. 이 나라는 구세계(유라시아)와 신세계(아메리카)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나라에서 동서양의 전통은 한데 모여 새 문명의 탄생을 예고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런 '세계 속의 한국'에서 어린이들이 계속해서 세계사를 남의 나라 역사로만 여기고 어려워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엄마의 역사 편지>는 '국산 세계사'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용기 있게 등장한 책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면, 그것은 현대 한국인이 세계사의 어느 지점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국산 '보편 세계사'를 향한 발걸음일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