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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선생, 대구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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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선생, 대구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한 '유빠'의 두 번째 공개 편지

얼굴 본 지 2년이 되어 가는구려. 못 보면서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편지를 쓰며 당신도 나를 잊지는 못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2008년 초여름 어느 날 출판사 돌베개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생각이 납니까? 5년의 공백을 우리는 피차 느끼지 않았죠.

당신이 권력 실세로 통하던 5년 동안 안 만나고 지낸 데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죠. 우리 아버지 일기 중 "정부나 국회에 드나들지 않고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관을 찾지 않기로 한 것이 나의 신조"란 대목을(<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 1950년 10월 23일자) 떠올리며 우리 집안에 유전성 결벽증이 있는 것 아니냐며 웃기도 합니다.

이 기회에 확인해 드리는데, 결벽증 같은 것 없습니다. 아버지 경우도 권력을 무조건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민족 분단의 죄악에 끼어드는 일을 피하고 싶으셨겠죠.

나랑 잡담 나누는 시간도 아껴야 할 만큼 당신이 바쁠 것 같아 연락을 안 했고, 당신도 연락 없데요. 그렇게 5년이 지난 거죠, 뭐. 최근 2년간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공부밖에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고, 공부를 통해 정치에 관한 생각이 더러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주고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 없는 생각이라면 입 뗄 생각 없고, 자신 있는 생각이라면 글로 발표하면 되죠. 그래서 작년 5월에 쓴 편지도 공개했던 것이고, 이 편지도 그럴 참입니다. (☞관련 기사 : "유시민 선생, 그건 '죄'가 아니라 '멍청한 짓'이요!")

당신과 안 보고 지내던 5년 동안 역시 안 보고 지낸 친구가 또 하나 있죠. 이정우 경북대학교 교수. 이 교수는 요즘 당신처럼 바쁘지 않은 듯해서 가끔 보고 지냅니다. 그런데 몇 주 전 서울 온 이 교수 만났을 때 당신 얘기를 하더군요.

당신에게 대구 재출마를 권하고 싶은데 워낙 당신에게 힘든 일인 만큼 전화로 얘기하기는 어렵고, 만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더군요. 그것은 나도 권하고 싶은 말이라고 하니까, 내가 당신 만날 일 있으면 자기 생각도 얹어서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먼저 만나는 사람이 옆 사람 생각도 얹어서 전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지난 주 대구 가서 만났을 때 또 그 얘기가 나왔어요. 이번에 나는 권할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동안 생각해보니 유 선생의 대구 재출마 의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인데, 권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광장
당신은 대구에 "뼈를 묻겠다"고 했죠. 그 후 경북대학교 강의를 그만둘 때, 주민 등록을 옮겨올 때, 경기도지사에 출마할 때, 당신을 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배신'을 얘기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정치적 역할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당신의 지조에 손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는 다른 정치적 필요를 돌아볼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나는 봅니다. 인격과 정체성이 걸려 있는 일이죠. 이 교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 선생을 내가 친구로 여기는 것은 그 인품을 아끼기 때문인데, 만일 이번에 대구에 오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니 그 사람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네."

내 표현이 격한 데 이 교수가 잠깐 놀란 빛을 보이더니 잠시 후 수긍의 기색을 보이더군요. 아마 내 책 <김기협의 페리스코프>에 스스로 써준 추천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을 겁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노무현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김기협이 오히려 노무현의 시대정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슬그머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나는 그냥 겸손의 말씀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 적게 만나고 활동 좁게 하는 대신 내가 이해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니까요.

그런 믿음을 갖고도 유 선생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대구 재출마 의지를 서둘러 밝히라는 겁니다. 정치적 행위에 완급의 묘가 있다는 사실은 나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번 재출마는 전술-전략 차원이 아니라 철학 차원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따라서 당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지역구 유권자들이, 대구 시민이, 대한민국 국민이, 그리고 동료 정치인들이 음미할 시간을 가급적 많이 주는 것이 전술-전략 차원의 득실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년의 공백 후에도 나는 5년 전과 똑같은 사람을 유 선생에게서 찾았습니다. 지금의 공백이 몇 년이 되더라도 유 선생은 똑같은 사람일 것을 나는 믿습니다. 예전에 쓴 글의 한 대목 떠오르는 것을 밑에 붙입니다.

형가는 원래 연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태자 단의 부탁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전광(田光)이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연나라 원로 명사인 전광은 저자 바닥에서 놀고 뒹구는 유랑인 형가의 고매한 인격을 알아보고 망년지교로써 후히 대접했다.

노골화하는 진나라의 정복 사업 앞에서 연나라는 화친이냐, 적대냐,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은 화친을 통해 나라를 길게 보전할 수 없으며, 시황의 암살만이 천하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광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전광은 노쇠함을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는 전광을 배웅하며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전광은 태연히 웃으며 응낙했지만 형가를 만나 태자의 뜻을 받들어주도록 부탁한 다음 이렇게 일렀다. "일을 행함에 상대로 하여금 의심케 한 것은 협객의 도리가 아니다. 태자를 만나거든 내가 이미 죽었으니 누설을 염려하지 말라고 전해 주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광의 죽음은 선비의 결벽증이 아니었다. 그는 태자의 뜻이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 여겼고, 손수 받들지 못하는 대신 자기 목숨을 던져 형가와 태자를 맺어준 것이다. 남은 두 사람이 숱한 갈등을 넘기고 결행에 이른 것은 전광의 살신성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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