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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학생 죽인 진짜 범인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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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학생 죽인 진짜 범인을 고발한다!"

[공작의 꼬리 경쟁] 자살 방조범은 경쟁 사회

대구의 한 중학생이 두 친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자살한 학생의 유서를 읽으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그 아이를 접하게 되어서 더욱 슬프고, 아무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상황에 답답하였다.

두 가해자 학생의 잔인함과 친구의 고통이 와 닿지 않는 완전한 감성의 부재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한 어린 학생이 오랜 학대를 받는데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장기간 진정한 대화가 부재했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었음을 보았다.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로 동급생 폭행이나 왕따 만들기, 정신병과 자살 문제 등등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 왜 이러한 극단적인 청소년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을까? 한국 청소년이 '더불어 사는' 능력 세계 꼴찌라고 한다. 친구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유대의 단절은 최근 한국의 극단적 경쟁력의 강조와 함께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한국이라는 경쟁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가치와 그 자살 사건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가해자들에게 엄한 벌을 가해야 한다는 등 이런 저런 논의와 함께 조치들을 취하기도 하지만, 비슷한 사건들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가는 지에 대한 원인의 한 단면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healthylifecarenews.com

현재 한국의 사회적 가치는 점수나 등수로 표시된다. 학교에서 배움이 등수로 표시되고, 대학 입시가 등수로, 직업의 귀천은 연봉의 등수로, 성공의 징표는 명품 소비의 등수로 표시 된다. 모든 것이 등수로 표시되고, 등수로 표시되지 않는 것들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등수와 상관없이 얻어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얻는 진정한 기쁨이나 만족감보다는 사생 대회에서 몇 등 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모든 것이 등수 경쟁으로 평가되는 서열 경쟁이 강화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고 서로를 이용하게 된다. 친구를 이용하려면 우정, 연민, 유대감은 제거해야 한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이 훈련이 잘 되어 더불어 사는 능력 세계 꼴지를 기록하고 있다. 상대에게 해가 되더라도 내가 이겨야 하고 이겨야 대우 받는 사회 그리고 마음 착한 대구의 중학생 같은 사람은 이용당하는 사회가 경쟁 사회이다.

경쟁의 가치는 이기는데 있고 과정이 어떠하든 승자가 존경받고 패자가 멸시 받는 사회이다. 높은 점수, 높은 연봉 또는 높은 가격의 명품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스펙 경쟁, 진급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성공의 가치는 최종적으로 돈이라는 척도로 환산되고 명품 소비와 같은 과시로 성공을 증명한다. 이러한 오로지 등수만이 가치의 척도가 되고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는 경쟁 사회에서는 인간이 갖는 다양성과 그에 따른 가치는 상실된다.

그러나 정작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많은 것들은 등수로 표시되는 것들이 아니다. 한 아이의 미래 행복에 중요한 그리고 사회의 유대에 필수적인 인성 교육은 대입에 쓸모도 없고 등수로 평가할 수도 없으니 무시된다. 그러나 만약 인성 교육이 점수화 될 수 있었다면 대입 과목에 포함되었으리라. 그래서 '그 인성 점수를 높게 받게 하는 학원이 생기지 않았을까' 또는 '속성 인성 교육 준비반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단지 시험 결과로 평가되는 암기 위주의 지식이 중요시 되는 사회에서는 교육적으로 아무리 중요해도 서열로 평가를 하지 못하면 무시 된다.

암기식 입시 교육이 아이에게 나쁘다고 하는 것을 알아도 학부모는 맞벌이를 해서라도 사교육비를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학원에서 그리고 부모들은 늦게까지 직장에서 지내야 하고, 시간이 나면 영어 단어라도 한자 더 외워야 하기 때문에 부모와 아이의 대화 그리고 서로의 기쁨과 고민을 나눌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이들과의 진정한 교감이 결핍 될 정도로 경쟁에 몰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화는 단절되고 아이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때까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의 가해 학생이 "괴롭히긴 했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는지는 몰랐다" 라고 했다. 요즘 자살하는 청소년 대부분의 학부모들 역시 비슷한 말을 할 것이다. "자살 할 정도로 고통 받는지 몰랐다." 문제는 "몰랐다"에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친구를 혹독히 괴롭히면서 그 고통이 와 닿지 않는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으며 자신의 아이가 갖는 고통의 정도를 느끼지 못하는 부모가 되가는 관계 단절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한 인간이 주위의 모든 인간들과 사회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상태 그리고 그러한 상태의 삶이 일상이 된 엽기적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부모와 아이의 대화 부재로 극단의 경우 아이가 자살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라서 자살을 방지할 기회를 놓쳐서 안타까워 할지 모르지만, 문제의 근본은 대화의 부재 그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의 부족이 아이들의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문제 그리고 많은 학생들의 자살 문제의 주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살을 많이 해서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아이들을 경쟁 교육으로 압박하고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한국 사회는 그들의 고통을 무시한다. 그리고 진정한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 그들의 고통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그 고통은 자살로 이어 지기도 한다. 이렇게 한국의 아이들은 경쟁 사회의 집단적 아동 학대에 시달리고 있다.

진정한 대화는 아이들의 아픔을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자세를 요한다. 그러나 입시 경쟁이 주는 불안감으로 많은 부모들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공부를 강요해야 하는 절박감을 갖고 있다. 그러한 강박감은 자녀와의 진정한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자녀의 고통을 진정으로 들어보고 그 고통을 그들의 입장에서 알게 되면 아이를 압박 할 수 없으니까, 진정한 대화는 입시 경쟁에 방해가 된다고 여길 것이다. 기껏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1등하면 좋아하는 것 해주겠다는 정도 아닐까?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로지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가치는 승자가 되는데 방해만 되고, 사회에서 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니 주위 사람을 이용해서라도 성공하면 된다. 범법이나 꼼수를 써서라도 걸리지만 않고 내 이익만 차리면 된다. 이제는 유명한 종교인들이 신앙까지도 돈 많이 벌게 해주는 이용 가치로 평가하기도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청소년의 문제는 이러한 피폐해 가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고 돈이라는 단일 가치 외의 전반의 가치 상실 문제를 반영한다. 마음씨가 아름다운 한 대구 중학생의 죽음 그리고 가해자들의 잔인함은 현 한국 사회가 갖는 유대 상실과 집단적 약자 학대가 거울에 투영된 모습과 같다.

부모와의 진정한 대화를 통한 교류가 거부된 아이들이 친구의 아픔을 듣기 거부하는 불구의 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가 아닐까? 패자를 대량 생산해야만 하는 그리고 그 패자들을 잔혹하게 경시해야만 하는 속성을 가진 극단의 경쟁 사회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존재에 필수인 진정한 대화마저 불가능하게 하고 관계의 단절을 초래한다.

가족과, 친구와 사제 간의 진정한 유대의 단절을 강요하는 경쟁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대구 중학생의 죽음과 같은 비극적 사건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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