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망발이냐고 블로그에 몇 자 썼더니 댓글들이 붙었는데, 그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사람이 동아일보 아무개 기자였다며, <한겨레>를 "악질적 옐로페이퍼"로 몰더니 이런 댓글을 하나 더 달았다.
"한마디만 더 하지요. 유신 시대에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얼마나 처절하게 유신정권에 저항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 득의양양 용감무쌍한 '논객'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 신문사 재직 기자들 조직이고, 그들이 속한 그 신문들이 피눈물 나게 싸운 덕에 저 역사적 6월 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한겨레> 따위가 어디 감히! 뭐 그런 식이었는데, 칼럼을 쓴 <동아일보> 간부의 의식 수준이 설마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그 신문사들 전위 조직쯤 되는 걸로 여긴 그 '논객'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양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 1987년 여름 전두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열리기 시작한 좁다란 자유의 공간을 비집고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됐다. 그때 창원 공단에 그걸 취재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갔던 나는 혼쭐이 났다. 지게차를 끌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현장 노동자들이 삽시에 나를 에워싸였다. 그들은 험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박살난 카메라를 아까워하기는커녕 미처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그 긴박했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단말마의 비명과 외침이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간신히, 무사히 풀려났다.
그때 그들이 외친 구호가 놀랍게도 "기자들 다 죽여라!"였다. 설마 살인을 저질러도 좋다는 얘긴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언론사와 기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격했다. (어쩌면 속으로 타고 있을 뿐,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그런 시위 현장에서 기자들은 기자가 아닌 양 행세해야 했다. 그런 판에 떡 하니 카메라를 들고 나가 겁 없이 여기저기 겨누며 셔터를 눌러댔으니.
그 시기를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기자들은 그들에겐 거의 공적, 공공의 적이었다. 칼럼을 쓴 <동아일보> 간부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때 그나마 한두 줄짜리 시국 관련 기사들을 흘리고, 아주 완곡하게 에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서슬 퍼런 체제에 싫은 소리를 하는 지사풍의 용감한 칼럼니스트들 글을 가끔이나마 내보낼 수 있었던 매체는 <동아일보>가 거의 유일했다. 그 정도는 분명 평가할 수 있다. 살벌했던 당시 상황에서 행보다는 행간을 읽어야 했던 일부 사람들에게 <동아일보>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자들 다 죽여라!"는 시위 군중의 구호가 상징하듯, 그때 한국 주류 언론은 사실상 완전히 죽어 있었다. <동아일보>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얼음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양심적인 기자들이 아주 없진 않았고 당연히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칼럼을 쓴 그 간부처럼 <동아일보>가 그렇게 으스댈 만한 역할을 한 건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옳지.
1975년 3월 15일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가 사표를 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 <송건호 평전 : 시대가 투사로 만든 언론 선비>(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
"신문·잡지·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하며,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하고, 동료 기자가 연행되면 풀려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 언론 수호 운동은 1973년 가을부터 시작됐으나 1974년 1월 초법적인 대통령 긴급 조치 선포로 움츠러들었다. 기자들은 무시로 연행됐고 구속당했으며 잘렸다. 당시 독재 정권은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까지 폐쇄하고 특파원을 추방했으며 <아사히신문> 국내 수입·배포도 금지했다.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만 사건을 짤막하게 내보냈다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편집국장들을 비롯한 10여 명이 끌려갔다.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과 형식까지 통제하던 기관원들은 그들을 붙잡아다 놓고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며 '빨갱이'로 몰았다. 서울 달동네 연탄 값이 아랫마을보다 세 배나 더 비싸다는 기사를 쓴 기자는 상을 받는 대신 "민중 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 자결을 결심한 시절의 세상 꼴이 그랬다. 신문·방송 뉴스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한 건 그들 기관원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과 거의 동시에 <조선일보> 기자들 150여 명도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긴장한 정권은 신문사 사주를 압박해 수십 명의 기자들을 해고하고 윽박지르는 공작을 벌이다가 그게 먹혀들지 않자 직접 칼을 빼들었다. 1974년 12월 10일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 해약 사태가 그것이다. 다음해 1월 25일까지 <동아일보> 광고의 98퍼센트가 떨어져 나갔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계속 실었다가는 기업이 망할 판국이니 광고주들도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12월 26일부터 광고 지면이 활자가 완전히 빠져버린 채 하얗게 나간, 언론 역사상 특기할 만한 백지 광고 사태가 시작되자 그 빈자리를 시민들이 자발적 개인 광고로 메우기 시작했다. 1975년 5월까지 하루 평균 350건, 모두 5만 건에 이르는 개인 광고들이 <동아일보> 광고 지면을 장식했다. 봉기에 가까운 시민 저항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태 전개에 당황한 권력은 마침내 사주를 압박해 기자들을 무더기로 몰아냈다. 160여 명의 <동아일보> 기자들, 30여 명의 <조선일보> 기자들이 그때 쫓겨났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쫓아내는 역할을 내 손으론 못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을 자른 사람이 바로 송건호였다.
한국 언론사, 아니 한국사를 바꾼 그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그때 다시 죽었다. 식민 지배자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내준 '바람구멍'이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1930년대 일제에 완전히 투항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민족주의적 색깔마저 버렸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그들은 그때 죽었고, 광복 뒤 미국 점령군 치하 친일파 대변지를 자임하면서 거듭 죽었으며, 1975년 그때 또 죽었다. 그 이후, <동아일보>는 살아났나?
저 용감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동아투위, 조선투위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제대로 된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게 유신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 유신에 철저하게 복무한 유신 기관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싸우다 쫓겨난 기자들이 그 신문사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사실조차 그 논객은 몰랐던 것이다.
그 자신 그 엄혹했던 시절의 투사요 기록자였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송건호 평전 : 시대가 '투사'로 만든 언론 선비>(책보세 펴냄)는 그 시절을, 송건호의 일대기를 매개로 일목요연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쫓겨난, 아니 자신을 쫓아낸 송건호는 당신께서도 거듭 자인했거니와 결코 타고난 투사가 아니었다. 통상적 의미의 대범과 호방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진짜 투사로 단련시킨 건, 예컨대 이런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다음 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976년이 되고 다시 77년이 되면서 처음 매일같이 집요하게 못살게 굴던 공포가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나흘간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별 탈 없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 공포가 찾아왔다. 이럴 때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세월은, 나이 쉰에 직장에서 쫓겨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줄곧 이어졌다. 다음해 12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임종도 하지 못했다. 노모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도 돈 한 푼 못 버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는 얘기를 "원고 집필에 바빠" 그는 전해 들어야만 했다. 편집국장 직을 쫓겨나자마자 생계를 감시와 억압 속에 이런 집필과 강연으로 꾸려야 했던 간난의 세월은 송건호를 좌절시킨 게 아니라 뛰어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만들었고 그를 불퇴전의 재야 운동가로 단련시켰다.
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창원 공단에 카메라를 들고 간 것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펴낸 비합법 지하 매체 <말> 기자로서의 현장 취재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달려들어 내 멱살을 쥐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거듭 외쳤다. "난 <말>지 기자요!" 다행히 그들 중에 <말>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약간의 설명 끝에 나는 풀려났다.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가 박살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1985년 5월에 창간호를 낸 그 <말>을 만든 사람들이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람들이었고 송건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84년에 만들어진 민언협 기관지 <말>이야말로 그 시절 다른 어떤 매체보다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언론 매체다. <보도 지침>을 특집호로 제작해 만천하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협의해 세상에 공표한 것도 민언협과 <말>이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1단짜리로 가끔 실었던, 군사 정권이 보도 절대 엄금 지침을 내렸던 숱한 사건들과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세상 변화를 당시 가장 충실하게 보도한, 유일한 매체가 <말>이었다.
비밀 장소에서 편집하고 식자 찍어 대장을 만들고 비밀리에 인쇄해 비밀리에 배포해야 했다. 들키면 모든 걸 압수당했고, 압수를 피해도 배포된 뒤 예외 없이 사무총장 등이 1주일 이상의 구류를 살아야 했던 <말>은 전국적 배포망을 지닌 나름 인기 높은 매체였다. 송건호가 대표하는 민언협 멤버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소식지 <말>이 '87년 체제' 창출에 수행한 역할을 뒷날 역사 연구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6월 항쟁 당시의 전국 상황을 기자들을 현지에 파견해 가장 먼저 종합 정리한 매체도 <말>이었고, '6월 항쟁'이란 말 자체를 <말> '6월 항쟁 특집호' 제목으로 뽑아 그 시대의 상징어로 만들고 정착시킨 것도 <말>이었고 민언협이었다. 그때 우리는 1946년 대구를 뒤흔들었던 10월 항쟁을 생각했다. <말>이 합법 매체로 기자들이 제 이름들을 밝히는 기명 기사를 쓰기 시작한 건 87년 체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태 전 동아일보가 6월 항쟁에서 한 역할을 자랑하며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겨레>가 한 게 뭐냐고 묻던 그 <동아일보> 간부의 칼럼은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서 비롯됐든 잘못된 것이다. 6월 항쟁 주역이 민언협 멤버도 그 한 축을 이뤘던 시민 운동 세력,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면 6월 항쟁의 정신을 고취하고 87년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한겨레>는 기념비적인 공을 세웠다.
왜냐하면 <한겨레>야말로 바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쫓아낸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민언협과 <말>의 모태로 태어난 것이며, 87년 체제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물 중의 하나가 국민주 형태로 모금해 주주가 6만 명이 넘는 <한겨레>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지금도 그 평가에 걸맞게 잘 하고 있느냐는 핀잔과 비판을 받기도 하는 <한겨레>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송건호 평전>은 그때의 그 세계를 송건호 자신의 얘기와 증언들을 인용해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김삼웅 사관에 입각해서 평가한다.
그 용맹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동아일보> 아무개 기자를 1998년 도쿄에서 만났다. 그리고 2년쯤 뒤 그는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기자였고 품성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가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 위기 시절이었는데, 도쿄 특파원들은 갑자기 치솟은 원화 환율 때문에 실질 소득이 줄어 고생들을 했다. 도쿄 생활 비용은 차차 환율에 맞춰 조정이 되긴 했지만, 각사는 특파원 수를 줄이거나 아예 철수시키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그 기자는 그때 갑자기 불어난 일의 무게에 눌려 무척 힘들어 했다.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을 덤으로 더 해야 했다. 1999년 연말연시든가 등산을 갔다가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그게 계속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의 일본인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든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하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귀국하던 그와 그의 가족을 그의 집에서 동료 특파원들이 함께 모여 송별회 같은 걸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유족이 그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놓고 회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회사는 산재 인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는 그런 좋은 기자들이 많았지만, 160여 명의 기자들을 한꺼번에 쫓아낸 그 회사가 그 뒤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삼웅이 인용한, 김대중 내란 음모죄라는 날조 사건에 영문도 모른 채 연루돼 잡혀 들어간 뒤 당한 지독한 고문 후유증이 분명한 파킨슨씨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절의 송건호 생애 마지막 저서 <한국 현대 언론사>(1990년)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민족은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국토도 분단되어 내 땅이면서도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오늘은 여기에 붙었다가 내일은 저기에 붙고 외세에 아부하고 친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듣는, 거꾸로 된 이 세상 더러운 시대에 왜 생을 얻어 이 고생인가 싶다. 내 죄와 고민은 하늘만이 심판할 수 있다."
김삼웅이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한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 그리고 "역사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현재에 관한 학문"이라는 스페인 생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한 건 바로 송건호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그가 때론 남루하게, 절박하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살아간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재'였기 때문이다.
<역사비판> 12호에 실린 '현대사 연구의 이모저모'(1992년)에서 송건호는 말한다.
"평생을 바친 언론계를 떠나 감시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고 점차 현대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한 애국선열들이 어떤 생활과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점차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많은 자녀를 데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할 경제적 곤궁과 권력의 감시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현실의 고통과 위기야말로 송건호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었고, 그 현실의 실천적 필요성, 절박성에 쫓긴 현재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를 재해석한 것이 그의 한국 현대사 연구였다.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필요와 절박이라는 실천적 욕구를 통해 걸러지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 예외 없이 현대사다. 달리 말하면, 그런 현재의 실천적 문제의식 없는 역사연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거나 의미 없는 헛짓이다.
송건호가 자신의 고통과 절박과 문제의식을 만들어낸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실천적인 필요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들어가 파헤친 한국 근현대 역사의 진실은 식민 지배와 친일파, 일제를 대신한 미국의 한반도 분단과 친일파 기용을 통한 식민 잔재 재생산, 반공을 방패로 살아남은 친일파와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분단 모순, 민족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야망과 '현실의 길'을 택한 기회주의적 국민주의자 이승만, 그 개인보다는 공공과 역사의 길을 택한 민족주의자 김구 등 그의 집요한 인물 탐구도 결국 송건호 자신이 그런 현실에서 어떤 좌표를 설정하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한 실존적 고뇌와 연결돼 있다. 그는 김원봉과 의열단 연구까지 나아갔다. 일제-이승만-박정희 등등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가 택할 길은 자명했다. 그는 역사의 길을 택했고 죽는 날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십중팔구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연구자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이 위험한 주제를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 중세, 전근대라는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그 공백을 식민사관과 그 변주인 뉴라이트 사관이 차지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송건호의 또 다른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터부를 과감하게 깨뜨렸다는 것이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 인물사론> <분단과 민족> <민족 통일을 위하여> <민주 언론 민족 언론> 등에 담긴 그의 생각은 청년들과 역사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삼웅 버전의 송건호 평전은 그의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낸다.
저 용맹무쌍 '논객'이 송건호와 이런 역사를 알았을 리 없다.
광복 65년이 넘도록 주류 국민주의 현실론자들이 신문 시장의 75퍼센트를 장악하고, 방송까지 합하면 90퍼센트 이상의 여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류가 터부시하고 위험시하고 심지어 탄압까지 하는 그런 위험한 역사를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일제에서 미국,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를 통틀어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그런 주류가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세계에서 줄곧 살아왔으니까.
이건 바꿔 말하면, 송건호가 온몸으로 저항하며 찾아 헤맨 저 시대의 과제, 문제의식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펄펄 살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저들은 종합 편성 채널이라는 터무니없는 장치까지 만들어 기득권을 다지는 한편 반복 선전을 통해 특권유지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본원 정기준처럼. 송건호는, 말하자면, "역병처럼 번져가리라" 세종이 예언했던 한글처럼, 기득권의 역사를 뒤엎을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역병처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기를 선지자 송건호도 바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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