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주 운동 등을 하는 단체인 대한보건협회에서 10년 가까이 <건강생활>이라는 잡지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나와 같은 보건학도에게는 '블랙아웃'이란 말이 매우 익숙하다. 우리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이른바 필름이 끊긴 현상을 '블랙아웃'이라고 불러왔다. 기억이 사라진 현상이 바로 블랙아웃이다.
전기 분야에서도 '블랙아웃'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사회 전체가 전기를 아예 공급받지 못해 암흑의 도가니에 빠지는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한밤중에 대한민국 모든 곳에서 전기가 사라진다면 아마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음주 분야의 블랙아웃과 전기 분야의 블랙아웃은 닮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번 사건을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 예를 들자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와 자살,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격, 우면산 등 산사태, 구제역 창궐 따위와 구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원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앞에서 열거한 많은 사건들(그러고 보니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정말 많은 위험 사건들이 생겼다) 또한 전국 순차 단전 사건처럼 물론 예방 가능한 것들이었다는 점은 같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문제는 협상을 잘 했더라면, 그리고 그 뒤 솔직하게 터놓고 협상 잘못을 시인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국민적 규모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또 보복 성격이 강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가 없었더라면 전직 대통령이 자살까지 하는, 불행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북한 간 대화가 지속돼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깨지지만 않았더라도 천안함이나 연평도에서 벌어진 참사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면산 산사태나 구제역도 예방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성격의 위험이었다.
이번 사건은 대다수 국민들이 울분을 토하기에 충분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 소통과 위험 예방 측면에서 곱씹어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물론 이번 사건에 가장 분노할 사람은 직접 정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요즘 가뜩이나 경기가 나빠 고생하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정말 분노해야 할 사람들이다. 정부는 이들의 피해 보상 소송 이전에 보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 보상 비용은 사실상 국민 세금과 다를 바 없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사건은 한마디로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 정부의 안일한 자세에서 비롯했다. 해마다 한여름이 되면 전력 당국은 비상 체제에 돌입한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긴장의 끈을 늦춘다. 이런 식의 계절적 행태가 수십 년간 지속됐다. 하지만 이것은 기후가 안정된 시대의 자세요, 매뉴얼이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는 기후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자세와 매뉴얼은 결코 아니다.
▲ 정전 사태로 촛불 밝힌 슈퍼마켓. 이번 정전 사태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연합뉴스 |
이번 사건은 전기를 계속 많이 쓰게끔 하는 사회 구조를 유지·발전시켜 가고 전기를 덜 쓰는 사회 구조에 상대적으로 무신경해왔던 대한민국에게 보내는 값비싼 경고이다. 원자력이 됐든, 석탄·석유가 됐든, 수력이 됐든 전기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쪽(기업)은 전기 공급이 많을수록 기업 이익 측면에서 좋다. 정부의 에너지 당국도 같은 입장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도 핵발전소를 더 늘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난 뒤 며칠이 지난 즈음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은 후쿠시마 참사 이후 25퍼센트나 전기를 아껴 썼다"며 이번 사태 발생을 전기 절약을 하지 않은 국민 탓으로 돌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발언을 했다. 물론 전기를 아껴 쓰는 사회 구조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런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대통령은 그동안 과연 온몸을 던져 노력했는가를 묻고 싶다.
만약 이번에 발전소의 보수·수리를 보름 또는 한 달 간만 늦추었더라면 전국 순차 단전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터이다. 한국전력이나 전력거래소가 그리고 정부가 9월 무더위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인지했더라면 위기 상황은 확실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정부는 전기수급 정책을 펴면서 기후학자나 기상청 관계자 등은 참여시키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위험 분석이나 위험 소통 전문가도 활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위험에 대처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을 만들고 그에 따라 모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전, 특히 두창 발생에 대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두창 백신을 질병관리본부가 비축해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적이나 테러리스트가 언제 어디서 생물 무기를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의 일이다. 육군에 복무할 때 군대 내 각종 중요 문서를 취급하는 부대에서 있으면서 해마다 8월이면 모의 비상 훈련을 했다. 전쟁이 발발해 서울이 점령당하거나 폭격을 당할 때 우리 부대는 그 어느 부대보다도 신속하게 기밀 서류와 마이크로필름을 들고 저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군인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부터 가야 하는 그런 부대도 있었고 내가 그런 부대원이라는 사실이 처음에는 정말 이상했다. 지금은 부대가 남쪽으로 내려가 그 당시 세운 탈출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다.
만약 적의 공습이나 포격으로 철도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장교와 부사관이 갑론을박하며 도상 훈련을 하던 것을 지켜본 광경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속도로가 마비됐다면 어떤 국도를 이용해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를 경우의 수를 따지고 따져 문서 호송 계획을 세웠던 기억이 난다.
전기도 국가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므로 이와 같은 비상 계획을 미리 만들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이번 사건이 터져 나온 뒤 드러난 것을 보면 예비 전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전국의 전기가 동시에 나가는 블랙아웃 현상을 막기 위해 순차 정전을 하는 매뉴얼을 만들었고 이번에 처음으로 이를 발동한 것으로 돼있다. 이런 매뉴얼과 조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따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이번 가을 늦더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선진국 형 안전 국가를 좇는다면 이런 정도의 늦더위에 대처할 수 있는 발전소 운영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최악의 기후 시나리오에 대비할 수 있는 매뉴얼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년 전이나 30년 전이었다면 모를까, 적어도 기후 변화 시대를 맞이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매뉴얼을 가지고 운영했어야 한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틈이 날 때마다 "기후 변화, 기후 변화"를 외쳐오지 않았던가. 말로는 기후 변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면서 각종 제도와 관행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은 것이 아니라 과거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사태의 책임은 고스란히 대통령에 있다. 물론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이번 사태가 불거진 5일이나 지난 뒤 김황식 총리가 국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보다는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해야만 마땅한 사건이다.
위험 소통이나 위험 관리에서는 언제, 누가 나서서 그 사건의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이나 피해자에게 사과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위험 소통, 즉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의 제 1법칙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1989년 알래스카 한 해협에서 유조선 엑손발데즈 호가 난파해 대규모의 기름을 바다에 흘려보낸 최악의 해양 재난 때 엑손의 CEO가 현장에 나타나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보냈다가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은 물론 회사의 신뢰도마저 끝없이 추락시킨 사건은 지금도 위험 커뮤니케이션 교과서에 실려 있는,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과거 재난 사건의 역사와 불과 3년 여 전 우리나라에서 빚어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시민 촛불 집회 때의 교훈, 즉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책임 있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사태를 해결하라"는 따위를 이번에도 마이동풍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생색낼 일이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나서던 대통령이 질타 받을 일은 한사코 국민 앞에 서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크게 키울 뿐이다.
위험을 다루는 원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투명성,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순환 정전 사건에서도 예의 버릇처럼 이를 어겼다. 우리가 이처럼 대규모 재난 사건이 잇따르는 것은 과거 유사한 재난 사건에서 참으로 반성하지 않아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장관 후보자, 군대, 정부 관료, 관치 언론사 사장, 정부 기관 관계자 가릴 것 없이 한결 같이 거짓말 경연 대회를 벌이고 있다. 이런 통치자와 정부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롯이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백성들이다. '위험 사회 대한민국'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곁을 지키는 것은 고통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너무나 큰 위험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큰 위험 사건만 터졌다 하면 갈팡질팡한다. '술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이 마시면 블랙아웃 현상이 발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재앙 위험에 견딜 사회나 국가는 없다. 우리는 엄청난 규모의 지진에 이은 지진 해일(쓰나미)과 대규모 핵발전소 폭발로 치명적 상처를 국가 차원에서 입고 있는 일본의 예를 이미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일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도 크고 작은 위험 블랙아웃 현상을 이명박 정부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다.
일자리, 경제, 인권,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이제 위험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일상이 불안하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에 대한 지지는 낮을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추락할 일만 남았다. 정전으로 피해를 본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여기에다 권력자들은 아랫것 또는 하급기관 탓만 해대니 울화까지 치밀 것이다.
이는 모두 위험 관리 내지는 위기 관리 능력을 정부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비록 운이 좋아 전기 공급의 블랙아웃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험 관리 능력은 블랙아웃 상태나 다를 바 없다. 예비 전력이 24만킬로와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은 진짜 벼랑 끝까지 간 것이다. 진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운이 좋았다고 운운만 할 일은 아니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하루빨리 정부가 위험관리 블랙아웃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기뿐만 아니라 통신, 금융, 일자리, 부동산, 대학 등록금, 남북 관계 등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중요 요소들에서 블랙아웃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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