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동의 민들레야
필 적에는 곱더니만
질 적에는 까맣구나
피우지 못한 노오란 꿈 안고
다시 태어나거들랑
상봉동에 피지 말고
저 들녘에 피워 보렴"
안혜경이 부른 '검은 민들레'의 노랫말에 나오는 '민들레'는 봄 들녘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아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공해병 환자였던 박길래 씨를 말한다.
그를 공해병 환자 1호로 공식 인정을 한 곳은 정부가 아니라 사법부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가 이끈 소송으로 유명한 박 씨의 공해병 인정 판결은 22년 전인 1989년 1월에 이루어졌다. 박 씨가 국립의료원에서 진폐증 환자라는 의학적 진단을 받은(1986년 11월) 뒤 2년 10개월, 내가 <서울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보도(1987년 3월)한 지 1년 9개월 지나서였다.
당시 서울 도봉구 상봉동에 있던 (주)강원산업의 삼표연탄공장 인근에 살았던 박 씨는 연탄공장이나 탄광에서 일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탄광 광부들이나 걸리는 줄 알았던 직업병의 대명사인 진폐증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오랜 투병 끝에 2000년 4월 숨졌다. 그는 몸이 시시각각 망가져 가는데도 죽기 직전까지 반공해 운동의 전사(戰士)가 되어 공해병을 만들어내는 세상과 온몸으로 싸웠다.
박 씨 사례를 계기로 1988년 2~5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의사들이 상봉동 삼표연탄 인근 주민 2000여 명을 상대로 검진을 벌여 박 씨와 비슷한 환경성 진폐증 환자 3명을 찾아냈다. 서울시도 인의협의 이러한 결과 발표 직후인 6~7월 시내 다른 지역의 연탄공장이나 저탄장 17곳 주변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주민 1800여 명을 조사해 8명의 진폐증 환자와 14명의 의사진폐증 환자를 추가로 확인했다.
물론 연탄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가운데에서도 진폐증 환자가 많이 나왔다. 연탄공장 주변 주민 집단 진폐증 발병은 공해병(또는 환경병)과 직업병은 별개가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는 '검은 민들레' 사건을 계기로 공해병이 언제 어디서나 발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문가, 정부 관료, 시민들이 확실히 깨달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2009년 강원도 영월군 시멘트공장 주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고통과 질병을 호소하고 나섰다. 환경부가 조사한 결과 5명의 진폐증 환자가 발견됐으며 이 가운데 3명은 직업력이 없었다. 이어 충북 제천·단양 지역 시멘트 공장 주변 주민들도 영월군 주민들과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나섰다.
▲ 충청북도 제천에 시멘트 공장을 둔 아세아시멘트의 서울 강남구 본사 앞에서 공장 주변 피해 주민과 환경 활동가들이 지난 7월 19일 시위를 벌이는 모습. ⓒ뉴시스 |
환경 노출에 따른 진폐증 환자 발견은 2009년 충청남도 홍성군 등 일부 옛 석면 광산 지역에서 석면폐증 환자가 무더기로 확인된 데 이어 세 번째이다. 환경 노출로 인한 진폐증 발병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 일부 주민들이 매우 심각한 공해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말해 다른 지역에서도 원인이나 질병의 종류만 다를 뿐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지만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공해병(환경병)은 공장을 마구잡이로 가동하던 1970~1980년대나 있던 이야기가 아니라 2010년대에도 그 때 못지않게 발생하고 있고 또 터져 나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공장이나 공단 주변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통해서도 공해병 환자가 나올 수 있고, 폐광산 주변이나 폐기물 처분장 주변 주민들에게서도 공해병이 나타날 수 있다. 환경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워낙 많고 설혹 그런 요인 때문에 질환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환경병이라고 콕 꼬집어내 말하기 어려워 물위로 떠오르는 환자 수가 많지 않을 뿐이다.
박길래 씨 사건은 사법부에 의한 최초의 공해병 인정이었지만 환경운동가나 언론 등에서는 이미 그 전에 공해병이 심각하게 발생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온산병'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85년 <한국일보>(1월 18일자)가 사회면 머리기사로 '온산공단 주변 어촌 주민 500명 이타이이타이병 증세'란 제목으로 크게 다루면서 온산공단 주민들과 몇몇 환경운동가들만 알던 사실이 일반 대중들에게 본격 알려지기 시작했다.
'온산병'은 초기에 카드뮴 중독에 의한 '이타이이타이병'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바람직하지 못한 원인 논쟁, 즉 카드뮴이 원인이냐 아니냐의 논쟁으로 번져 공식 공해병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과정이 있었다.
일부 언론과 환경운동가들의 온산 공해병 주장에 대해 당시 환경청은 처음에는 '온산병'이 공해병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하다가 3~4월 역학조사를 실시한 뒤 '온산병'은 '환경성 질환'이라는 표현으로 공해병을 피해갔다. 이는 오십보백보다.
현재 '온산병'은 백과사전에서 "1980년대 초에 경상남도 울산군 온산(지금의 울산 울주군 온산읍) 주변의 공단 일대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 한국의 대표적인 공해병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카드뮴 중독에 의한 이타이이타이병이라는 증거는 불충분하지만 당시 온산공단 내에 석유화학 5개 공장, 비철금속 5개 공장, 기타 2개 공장 등 각기 다른 공해 물질을 배출하는 12개 공장이 가동 중이었기 때문에 각종 유해 물질에 의한 복합 공해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연탄공장이나 시멘트 공장과 같이 단일한 오염원이 있을 경우 인과 관계를 밝혀내기가 쉽지만 온산공단 지역과 같은 곳에서 생기는 질환은 어느 공장에서 나오는 공해 물질 때문인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인지, 복합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겹쳐서 나타나는지 밝히기가 매우 까다로워 인과 관계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공해병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일본 미나마타병(유기수은 중독에 의한 공해병)의 경우도 1953년 처음에는 원인 불명의 괴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구마모토 대학 의학부가 구마모토 현 미나마타 시 주민들에게서 집단적으로 나타난 괴질의 원인과 관련해 유기수은 중독설을 제기한 것이 1959년이고 일본 정부가 공해병으로 인정한 때가 1968년이었으므로 인과 관계를 확정하는데 무려 15년이나 걸렸다. 온산공단 주민의 '온산병'도 정부와 학계가 끈질기게 조사·연구했더라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온산공단 주민과 같이 공단 주변 지역 거주민이나 연탄 공장, 시멘트 공장과 같은 공해 공장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다른 지역 주민에 견줘 확실히 공해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 이런 공해 공장이나 공단 주변 주민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공해 또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 장해를 입을 수 있다. 오염 물질은 포름알데히드, 환경호르몬을 비롯한 각종 유해 화학 물질일 수도 있고, 중금속일 수도 있고, 빛이나 소음일 수도 있다.
이들 유해물질 또는 환경오염 물질은 피부와 호흡기, 소화기 등 다양한 경로로 우리 몸속에 들어와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공해병 또는 환경병은 그 악영향이 가장 심각한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심각한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시때때로 노출된 환경오염 물질 때문에 각종 장기 기능에 이상이 생기거나 그 기능이 약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환경오염 물질이 우리 주변에 워낙 많고 산재해 있어 이런 건강 영향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공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그 인과 관계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본격적인 증상이 나타나 환경병이 발생하면 이미 때는 늦다. 환경병 환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공해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환경은 한번 오염되면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전 단계에서 이를 찾아내 더 이상의 오염 물질 노출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환경부나 지방자치단체, 환경전문가들도 환경보건, 즉 환경성 질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환경성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에 대한 조사나 식품 중 오염 물질 농도 조사 등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가을 서울시가 낙지 내장의 중금속 조사결과 기준치 이상의 카드뮴이 검출됐다고 발표한 것과 환경부가 최근 '돔베기'란 이름으로 불리는 상어 고기를 많이 먹는 영남 지역 주민들의 혈중 수은 농도가 먹지 않는 주민들에 견줘 1.5배가량 높다는 것과 섭취 횟수와 섭취량이 많을수록 혈중 수은 농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 두 사례에 나오는 중금속은 일본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공해병의 원인 물질이다. 일본에서 집단 발생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도 모두 제련소 등 공장에서 마구 버린 폐수 속에 들어있던 수은과 카드뮴에 오염된 쌀이나 생선 등을 오랫동안 섭취한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이들 환경병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서울시와 환경부의 조사 결과로 미루어 결코 안심 지대는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따라서 내가 즐겨먹는 식품 가운데 혹 오염 물질이 많이 축적되는 부위는 없는지, 생물 농축이 생길 수 있는 먹이 사슬 상층부의 동물은 아닌지, 오염된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은 아닌지 등을 따져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동물이나 어류의 내장이나 상어 고기, 참치, 왕고등어, 옥돔 등 먹이 사슬 상층부에 있는 어류는 일정량 이하를 먹도록 하고 특히 오염 물질에 취약한 임신부나 어린이 등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기생충에 감염된 민물고기를 먹을 경우 간흡충이나 디스토마 따위의 기생충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듯이 오염 물질을 많이 함유한 어류나 식품을 장기간 섭취할 경우 환경병에 걸릴 위험은 그만큼 더 높아진다. 민물고기를 날로 즐겨먹는 섬진강이나 영산강, 낙동강 주변 주민들의 기생충 감염률이 다른 지역 주민에 견줘 월등하게 높듯이 '돔베기'를 즐겨먹는 경북 안동이나 영천 등의 주민과 낙지를 즐겨먹는 서해안 바닷가 어민들은 다른 지역 주민에 견줘 수은이나 카드뮴에 의한 건강 장해를 입을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중금속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환경 중 발암 물질로 인한 암 발생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학술지인 <환경 보건 전망(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최근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해마다 1300만 명이 암에 걸리고 이 가운데 780만 명이 숨진다. 환경·직업성 요인에 의한 암은 어느 정도 생기는 걸까? 이 잡지는 그 비율을 정확하게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전체 암 발생 가운데 적게는 7퍼센트, 많게는 19퍼센트가 유독 환경 노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환경 노출에 의한 암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인자는 석면, 비소, 라돈, 규소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가 발암 물질 그룹 1(인체 발암 물질)로 분류한 물질이다. 이들 발암 물질에 의한 환경성 암은 이들 물질 사용을 중단하거나 확실히 관리하면 크게 줄일 수 있다. 아닐린 염료의 사용을 중단하면 방광암이, 석면을 사용 금지하면 악성중피종이, 염화비닐 중합 공정에 폐쇄 시스템을 도입하면 간혈관 육종이, 벤젠을 확실히 관리하면 백혈병이 확 줄어든다. 환경성 암은 예방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세계보건기구는 2011년 3월17~18일 스페인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서 '암의 환경 및 직업성 결정 인자 ; 1차 예방을 위한 중재'를 주제로 한 국제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아스투리아스 선언)을 채택해 세계 각국이 환경성 암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환경성 암 발생을 줄이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전략은 사람들이 발암 물질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1차 예방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우리가 환경에 관심을 쏟고 녹색 세상과 환경 보전을 외치는 이유는 환경이 건강해야 우리 몸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아프면 우리 몸도 아프게 된다. 환경병(공해병)은 우리 환경이 최악의 상태가 될 때 어김없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환경병 환자가 없는 세상은 곧 우리가 추구하는 녹색 세상이다. '검은 민들레'와 '회색 민들레'가 나오지 않는 세상, 하얀 민들레와 노란 민들레만 피는 세상 말이다.
아스투리아스 선언 △ 세계 각국은 자국 국민, 특히 취약 집단(임신부, 태아, 유아, 어린이, 노동자)이 환경 및 직업성 암에 걸리지 않도록 법령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 세계 각국은 암을 일으키는 환경 요인과 예방 전략에 관해 국민을 교육하는 소통 캠페인을 개발해야 한다. △ 기업들은 전 세계에서 똑같은 작업 환경 기준을 지켜야 하고 환경·직업성 암 예방을 위한 모든 규정과 규제를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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