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간된 나이토 치즈코의 <암살이라는 스캔들>(고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은 2005년에 출간된 <제국과 암살 : 젠더로 보는 근대 일본의 미디어 편성>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원형은 나이토가 2004년 도쿄 대학에 제출한 "이야기와 암살 : 민비 사건에서 대역 사건을 관통하는 근대의 배리"라는 박사 학위 논문이다. 즉 논문을 단행본화한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을 지도한 사람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고모리 요이치이다.)
우선 한국어판 제목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확실히 <제국과 암살 : 젠더로 보는 근대 일본의 미디어 편성>보다는 산뜻한 게 사실이다. 원제는 왠지 일반 독자가 가까이 하기 힘든 전문서 냄새가 난다. 그래서 한국어판 제목에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제목만 보면 그런 오해(상업성에 대한 고려)가 생길지 모르지만, 정작 책을 읽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제국' 대신에 들어간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어떻게 보면 이 책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라고 하니, 처음부터 고개를 돌릴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 책은 당신의 그런 걱정을 한방에 날릴 정도로 재미있다. '제국'보다는 '스캔들'인 것이다.
얼마 전부터 국내 출판계에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단행본으로 나온 국문학 쪽 논문들이 일반 독자에게까지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국문학계에 나타난 연구 경향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존의 근대 문학 연구가 주로 작가론이나 작품론 중심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풍속사(문화사/테마사) 연구가 대세이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주로 작품(텍스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지금의 연구자들은 신문(잡지)을 연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경향이 생겨난 것일까? 이에 대해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한국 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펴냄)), 여기서는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사실만 언급할까 한다.
▲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지음, 고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
한국의 근대 문학을 '일본에서 이식된 문학'으로 보는 내 관점에서 이는 분명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도리어 '일본어 공부' 없이 한국 근대 문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시기(이 시기의 연구 경향은 주로 작가의 사상에 대한 탐구가 주를 이루었다)가 있었다는 게 도리어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일본 쪽 연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질문은 거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본의 연구들의 경우 서구의 연구들과 달리 큰 '수정 없이' 국내 사정에 대입가능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시선이라는 필터를 피식민지적 시선이라는 필터로 교환만 해주면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연구 경향에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경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와 같은 작가론, 작품론 위주로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경향에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똑같은 결론을 확인하는 데에만 머무르고 때문이다. 그 결론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풍속이 근대화라는 과정을 통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는데, 그렇게 변화된 삶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의 우리 삶과 유사하다. (우리가 식민지 풍속사를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는 바로 이것(연속성)의 확인과 관련이 있다. 비슷함을 확인함으로써 갖게 되는 동질감 또는 안도감 같은 것).
둘째,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근대화와 유사하나, 식민지라는 한계 때문에 뒤틀린 부분이 존재한다. (여기서 뒤틀린 부분이란 주로 친일 문제와의 연관 하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가능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즉 풍속사 연구들이 이미 주어진 결론에 대한 사후적 근거 확인에 불과하다면, 본질적으로 귀납적 서사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에게 도대체 어떻게 어필하고 있는 것일까? 반복되는 연역적 서사가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흥미로운 캐릭터의 제시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의 테마화이다.
즉, 국문학계에서 이루어진 풍속사 연구가 주로 문화적 기호로서 기생, 여학생, 모던걸, 모던보이, 직업 여성 등에 집착하거나, 연애, 살인 사건, 금광, 백화점, 기차, 전화와 같은 테마 중심의 서술을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템이자 콘셉트인 셈이다(참고로 이런 종류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나 테마를 명확히(선명하게) 표현해줄 삽화이다. 주로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서 스크랩해오는).
이야기를 저항하는 이야기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암살이라는 스캔들>은 확실히 한국 근대 문학 연구자나 일부 독자에게 환영을 받을 만한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암살'과 '스캔들'(이 책의 맥락에서는 스캔들이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가리킨다)이라는 콘셉트는 아마 '큰 수정 없이'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젠더화를 통해 발생하는 차별적 구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여성이 저자다), 고맙게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의 고삐 역시 늦추지 않고 있다. 요컨대 형식상으로도 한국의 최근 연구 경향과 나란히 하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도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들어맞는다 하겠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절반 이상이 구한말에 대한 일본 쪽 미디어 담론을 자세히 살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을 정독하면 우리는 당시 일본의 미디어들이 민비(이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궁중 암투는 물론, 김옥균의 거사 실패와 암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의 일본 행적 그리고 안중근의 거사 등과 관련하여 일본인의 욕망을 어떻게 이야기화했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역으로 이 책의 단점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즉, 일본 미디어가 구한말을 어떻게 서사화(이야기화)하고 또 소비해왔는지를 다양한 자료(주로 신문 기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지만, 그런 작업 역시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화'로 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전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의 일본 미디어가 조선을 병에 걸린 환자, 여성, 자식에 비유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화를 서사적으로(이야기적으로) 조장하고 정당화했다는 주장 역시 또 다른 '이야기화'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가능하다. 모든 서사(이야기)는 이처럼 폐쇄 회로에 갇힐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이는 저자 자신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이야기의 획일화(저자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스테레오타입화')를 위태롭게 하는 지점을 지적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책의 키워드인 '양의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양의성? 그것은 한마디로 어떤 것을 둘러싼 의미를 한정하고 왜곡하려고 하면 할수록 옆으로 삐져나오는 '본래의 의미' 내지 '또 다른 의미'를 가리키는데, 정형화된 의미와 다르다는 점에서 저자는 '낯선 의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미디어는 스테레오타입의 이야기를 생산해냈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을 다수파 쪽에 배치하여 보편적인 독자 공동체인 '우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의 세부를 들여다보면 흠집 같은 게 발견되는데, 바로 이것들을 통해 우리는 이야기의 양의성이나 '낯선 의미'를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형이 내포한 강력한 '이해하기 쉬움'은 세부를 압도한다. 그런데도 표상된 세부는 스테레오타입을 희미하게나마 일그러뜨린다. 그런 의미에서 강력한 스테레오타입은 취약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테레오타입은 한없이 반복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어는 어떤 지점에서 생생한 타자의 모습을 드러내버리고 말지 모르기 때문이다.
스테레오타입은 타자를 기각하고 보이지 않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당해온 타자의 모습은 온통 스테레오타입으로 뒤덮여 파묻혀버렸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과거의 이야기를 재생하고, 거기에 있는 상처나 균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의 모습을 낯설게 할 필요가 있다. 파묻혀 버린 타자의 모습은 그 상처 속에서 떠오를 것이다. (172~173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개인적으로 '타자'나 '윤리'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책에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동일자'나 '도덕'을 그 반대편에서 발견함으로써 나름대로 그럴듯하고 정합적인 서사를 엮어가지만, 뭐랄까 결론적으로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끝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결말을 (예를 들어 보류함으로써) 기묘하게 피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강조하는 것은 기껏해야 세부에서 발견하는 '낯섦' 그 이상이 아니다(문학 용어로 말하면, '낯설게 하기').
나는 <암살이라는 스캔들>이 당대의 정형화된 이야기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타자를 복원하려는 데에 일정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비판 자체도 최근 문학 연구에서 보이는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이기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책에서 인용되는 신문 기사들(데이터)에 얽매이기보다 이 책 자체를 또 하나의 자료(데이터)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즉, 위 인용문과 같은 방법론에 의해 정형화된 풍속사 연구(표상 문화론)에 존재하는 취약함(균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이 책의 기묘한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 책 자체의 서사(이야기) 형식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저서가 다루는 시기는 메이지 시대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설정은 연구상의 편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제한에는 필연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메이지 천황이라는 존재가 놓여있다. 책의 끝맺음이 메이지 천황의 죽음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은 새삼 그것을 상기시켜준다.
저자는 세부를 복원하여 '양의성' 내지 '낯섦'을 드러내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대부분의 분량을 당대 미디어의 스테레오타입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며, 드물게 신체나 행위에 대한 '과잉 묘사' 정도에서 '양의성'이나 '낯섦'을 찾고 있는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낯섦'의 정점을 메이지 천황의 최후에 대한 미디어의 '사실적 세부 묘사'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예사롭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이 책이 메이지 천황이 없었다면 시작되지도 않았고(일부일처제의 상징으로서 메이지 천황의 등장) 또 그가 죽지 않았다면 끝나지도 않았을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메이지 시대의 미디어 담론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지만, 절반이 넘는 분량이 조선과 관련된 담론을 다루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한국어를 모르는 것 같다(즉 전적으로 일본 쪽 자료를 인용하고 분석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자. 만약 한국의 저자가 메이지 시대와 관련된 한국 쪽 담론을 연구한다고 했을 때, 일본어를 모른다면? 아예 그런 작업을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자는 그저 찾는다고 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또 설사 타자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타자가 자기 안의 동일자를 비판함으로써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타자라기보다는 동일자의 그림자(낯선 동일자)일 확률이 높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키워드는 (원제로 설정된 두 단어인) '암살'이나 '제국'이라기보다는 '병'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암살(그리고 제국)과 관련된 언급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많이 언급되면서 책 전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병'이라는 은유와 여기서 나온 위생 담론이기 때문이다.
즉, 저자는 근대 미디어의 담론(이야기)의 원형을 병 담론으로 보고, 그것을 성적 기호로서의 여성 신체에 대한 담론과 제국주의적 욕망에 의해 매개된 식민지 담론(예컨대 병에 걸린 조선을 일본이 구해야 한다)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개별 담론 간의 연관성을 분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담론을 특정 형식의 담론태로 수렴시킨다는 점에서 획일화의 위험 또한 존재한다.
기억은 이야기를 해체할 수 있을까?
현재 근대 문학 연구의 주류가 된 풍속사 연구란 특정한 위계 질서에 의해 정형화된(즉 스테레오타입이 된) 역사나 문학사에 대항하여 과거의 세부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그것의 의미를 되살려 기존의 이야기를 낯설게 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스테레오타입이 된(즉 왜곡된) 이야기 대신에 그것들이 감추고 왜곡한 '본래의 사실'을 망각에서 구원하는 것을 '낯설게 하기'(이야기해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야기라는 망각 장치를 해체하여 억압된 진실(타자)을 귀환시킬 수 있다는 믿는 것, 그것은 혹시 '기억'이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부(데이터)'를 과신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책 제목에 넣은 '암살'이라는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암살 사건을 고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둘째는 정형화된 이야기를 암살하라는 의미에서이다. 전자가 이 책의 표면적 줄거리라면, 후자는 저자의 의도라 할 수 있을 텐데(여기서 '이야기를 암살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낯설게 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암살 자체보다는 누가(또는 무엇이) 암살을 사주했느냐 하는 것이다.
왜 근대 문학 연구자들은 암살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아니 어떤 과정을 거쳐 암살자를 자처하게 되었을까? 이런 물음이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암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정형화(스테레오타입화)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킬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우리가 종종 보는 것처럼, 대상의 세부를 바라보는 순간, 암살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가 풍속사 연구라는 이야기에 위화감을 느끼고 <암살이라는 스캔들>을 마냥 칭찬할 수 없는 이유는 이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암살'을 항상 성공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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