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쳐대는 쥐떼로 허덕이던 한 마을에 피리를 들고 나타난 사나이. 쥐떼를 몽땅 없애주겠다는 그에게 마을 사람은 푸짐한 사례를 약속한다.
사나이가 피리를 불자 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뒤따르더니 깊은 강물 속으로 뛰어내린다. 쥐떼가 소탕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슬슬 딴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화가 난 그 사나이, 다른 피리를 꺼내들어 분다. 그를 따라가 몽땅 사라진 건 이번엔 마을 아이들이었다.
독일 설화 '피리 부는 사나이' 얘기다. <나는 보수다>(동아시아 펴냄)는 이 얘기로 시작한다. "한국 사회에 대한 암시로 이만한 게 없다"는 게 지은이 조우석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런 얘기다.
지독한 가난과 억압, 이념 대립, 폭력 따위로 얼룩진 최빈국. 이 절망의 나라에서 어느 때부터 대반전 드라마가 시작된다. 개인 평균 소득 2만 달러가 넘는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고 민주화에도 성공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실을 인정 하네 마네 옥신각신 앙앙불락 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몰락과 해체의 디스토피아화가 진행된다.
▲ <나는 보수다>(조우석 지음,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
사실, 이 두 얘기가 정확하게 겹쳐지진 않는다. 독일 설화에선 쥐떼라는 난제를 해결한 건 전적으로 마술 피리를 부는 사나이 덕이었다. 한국 경제 기적 신화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는 과연 누군가?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독일 마을 사람과 옥신각신하는 한국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들을 끌고 사라진 독일 사나이처럼, 한국에서 진행되는 디스토피아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분노와 보복을 행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 주체가 존재하는가? 그 분노와 보복은 정당한 것인가? 옥신각신을 몰락과 해체의 징후로 보는 게 온당한가?
두 얘기가 정확하게 겹쳐지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이 책이 하고 싶어 하는 얘기는 실은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으니까. 까놓고 얘기하자면, <나는 보수다>가 얘기하는 한국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개발 독재의 주역 박정희다. 거기에 이승만을 넣고, 5공의 신군부와 재계를 포함시켜도 좋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이라고 지은이가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세력이다.
그렇다면 의문들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겠다. 한국 경제 기적을 이승만·박정희가 만들어냈나? 마술 피리 소리를 들으며 쥐떼를 몰고 가는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며 박수나 쳤을 독일 마을 사람들처럼, 한국인들 대다수도 이승만·박정희가 피리를 불어댈 때 그냥 구경하며 박수나 치고 있었던 것인가?
독일 마을에선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있어도 쥐떼가 사라졌지만 한국 경제 기적은 대다수 국민, 노동자·농민의 피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산업화의 주역은 어쩌면 그들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둘로 분리한 뒤 산업화 주역은 개발 독재 핵심 멤버들, 민주화 주역은 학생·시민운동 세력 따위로 분리해 놓고 한국의 기적은 이들 둘의 합작으로 가능했다는 따위의 언설들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산업화가 오직 저들 개발 독재 주역들 덕이었다는 억지를 정당화하는 교묘한 장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억압을 일삼고 독점적 배불리기라는 특혜를 향유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다 잘 살게 해준 건 우리 덕이 아니냐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들 말이다. 또한 그래야 문제를 만들어내는 훼방꾼들을 가려내고 세상이 시끄러운 책임을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가 지은이 주장대로 아노미, 해체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아이들을 잃은 독일 마을 사람들처럼 이렇게 잘 살게 해줬는데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 때문인가? 배은망덕에 분노해서 마술 피리를 불며 행복과 번영의 아이들을 이끌고 사라지려는 주체가 이승만·박정희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보수다>에서 이 모든 의문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중대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쥐떼가 사라지자 마음이 달라져 약속을 저버린 독일 마을 사람들, 잘 살게 해줬는데도 그걸 베풀어준 세력의 은공을 모르고 아옹다옹 대들고 결국 사회 전체를 몰락과 해체 위기의 디스토피아로 몰아가고 있다는 배은망덕의 한국 마을 사람들이 진보·좌파·종북주의 세력이라고 단정적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조급한 좌편향 '리버럴 강박증'이 원흉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디스토피아 : 한국의 몰락"이었다는데, 한국을 몰락과 해체의 디스토피아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은이가 시종 위기 의식을 표출하며 개탄해마지 않는 대상들이, 생뚱맞게도, 바로 진보 세력이란다. <월간 중앙> 8월호 표지 타이틀이 '외화내빈의 우리 현실 긴급 진단 : 한국의 몰락'인데, 이 기획 특집에 기고한 대표적인 '두 지식인' 중 첫 논자도 바로 조우석이다. 그의 글 본문 타이틀이 '한국 몰락의 씨앗 : 왼쪽, 더 왼쪽으로, 리버럴 강박증'으로 돼 있다. 어쩌면 이 본문 타이틀에 <나는 보수다>가 얘기하고자 모든 것이 압축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우석의 좌파·진보 비판은 읽기에 따라서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들릴 정도로 감정이 들어 있다. 예컨대 그들은 "20세기 지구촌의 신데렐라 국가" 한국을 비판하고 헐뜯는데 "집요했고, 편 가르기와 독선에 능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학문이란 "반권력·반자본주의를 바탕에 깐 유사 과학 혹은 노이즈(소음) 학문"에 지나지 않았으며, 리영희는 "현실을 인정하는 배짱"도 없이 "초지일관이란 이름의 '바보의 철학'"에 집착했다, 라는 식이다.
바로 이들 때문에 "얼마만큼 우리의 사회적 자본을 잠식했었는지 채 가늠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냉전 붕괴, 즉 현존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을 가리킨다. 지은이가 인용한 어느 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리영희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그 한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유감스러워했다.
그가 낸 마오쩌둥 체제에 관한 책들(번역서)이나 당산 대지진과 뉴욕 정전 사태를 비교한 글 등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적 문제들을 선명하게 비춰보려는 거울이자 자신이 혐오한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도구였지 그가 교조적 사회주의자나 종북주의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보수다>에서 안병직과 박지향. 박효종, 이영훈, 김형효, 남시욱 등은 "진정한 용기와 학자적 양심"을 지닌 넓은 시야의 소유자들로 설정돼 있다. 이들 중 다수가 이른바 뉴라이트 주요 이데올로그들이다. 지은이가 인용하는 저작들도 대부분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의 것이다. 이들을 인용하면서 지은이가 겨냥하는 사람들은 백낙청, 리영희, 강만길, 강원룡, 한완상에서부터 손호철, 김동춘, 조국, 이만열 그리고 주돈식, 이창동에 이르기까지 무수하다.
이른바 좌파, 리버럴, 종북주의자들이라는 건데, 그렇게 규정돼야 할 이유나 근거를 따로 들이대고 있진 않다. 있어도 모호하다. 사실 좌파와 진보와 리버럴을 그냥 하나로 뭉뚱그린 것부터 무리다. 급진 좌파와 온건 좌파, 중도 좌파, 중도 우파, 자유주의자 등 따져보면 엄청 다르고 다양한 세력들을 좌파니 진보로 뭉뚱그리고 리버럴 앞에 좌편향이니 왼쪽이라는 수사를 쉽게 붙이는 건 문제가 있다.
지은이가 동원하는 좌파나 진보, 리버럴이라는 용어는 그 본래 뜻과는 상관없이 지은이가 속한 보수와 대립하거나 정치적 반대 의견을 지닌 세력을 통칭하는 맥락에서 사용하고 되고 있다. 그래야 지금의 민주당 등 한국 보수 정당의 맥을 잇고 있는 정당이나 그 주변에 포진한 사람들, 심지어 우익인 백범 김구조차 좌편향 리버럴 강박증에 빠진 진보나 좌파와 동렬에 놓는 지은이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
지은이가 진보를 비판할 때 인용하는 사람들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필자들이 많고, 비판당하는 사람들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연관되거나 친연성이 강한 사람이 많다. 그래선지 <나는 보수다>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대항해서 내놓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조우석 버전 또는 그 심화형 또는 해설서, 아니면 독후감 쯤으로 비치기도 한다.
뉴라이트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건 그건 자유니까. 어떤 눈으로건 세상을 걱정하고 근심하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건 거룩하기까지 하다. 지은이한테서도 그런 고민의 진정성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쩌면 과잉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만 우리는 그런 시선으로 비판 대상을 재단하는 논리적 근거를 따져볼 순 있을 것이다. 근거가 없거나 빈약하다면 비판이 아니라 비하나 모욕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니까. 이 책은 그런 점에서도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주장과 탄식은 많은데 그것을 받쳐줄 구체적 논거들이 없거나 빈약하다. 좌파나 진보, 종북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주장이 왜 "20세기 신데렐라 한국"을 근거 없이 헐뜯고 깎아내리며 급기야 몰락과 해체로 이끌고 있는 훼방꾼, <콩쥐 팥쥐>로 치면 팥쥐라는 건지 그 걸 잘 모르겠다. 그들이 왜 좌파나 종북주의자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지은이가 인용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이영훈의 글에 이런 얘기가 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가담한 논객들은 1980년대에 한국 사회가 미국 식민지라는 것,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기본적으로 반봉건 상태라는 것, 이런 남한 변혁을 위한 민주 기지로 북한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 주체사상을 남한 변혁을 위한 사상적 기초로 삼고 있다는 것 등을 "기본 시각으로 공유했다."
예컨대 이런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자들을 좌파나 종북주의자로 몰아갈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필자들이 주사파라는 얘기는 달리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좌파나 진보로 뭉뚱그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래 좌파나 진보였던 게 아니라 반이승만, 반박정희라는 정치적 반대파여서 좌파나 진보로 규정된 게 아닐까.
오히려 보수적이고 아무리 봐도 리버럴(자유주의)의 경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그들 대다수(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가 진보로 뭉뚱그려지는 데는 정치적 편견이나 의도가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사건 초기 상황에 대한 정부쪽 발표부터 왔다 갔다 했고 최종 발표조차 증거 없이 추정에 기초한 정황만으로 북의 소행이라 단정한, '북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 할 수 있겠나?' 차원의 천안함 침몰 사건 발표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나, 광우병 위험에 대해 경고한 언론 보도를 반정부 행위로 몰아간 정부와 미국의 납득할 수 없는 쇠고기 협상 결과에 저항한 촛불 집회가 도대체 진보·좌파의 리버럴 강박증이니 좌파 정서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뉴라이트적 시각은 지금 한국 사회의 주류적 시각에 가깝다. 좌파 종북주의자들이 우리 사회 문화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망조가 난 나라의 근본 문제라고 보는 지은이는 이런 얘기에 펄쩍 뛰겠지만, 뉴라이트를 포함한 보수 세력이 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것도 지은이가 강조하는 '건국(1948년 이승만의 대한민국 선포)' 이래 지금까지 줄곧. 지은이는 30년쯤 전부터 문화와 이념의 주도권이 리버럴 강박증이라는 중병에 걸린 좌파 쪽으로 넘어갔고,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과 더불어 확실히 주류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인용한 장하준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울대학교와 미국 유학파들이 지배하는 유명 사립대학교와 그곳 출신자들이 지배하는 한국 지식 사회, 장하준의 책조차 사실상 '빨갱이' 책으로 모는 금서 목록에 올랐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한국 지식계를 좌파, 종북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나. 반세기 동안 빨갱이로 몰리기만 해도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던 세상인데.
지은이는 "1970년대 문화계 중심의 민중 문화 운동과 여기에서 나온 분노의 알을 부화시켰던 1980년대 사회과학 시대의 유산"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아니 "실은 해방 직후부터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충좌돌 중도의 재발견>(개마고원 펴냄)에서 김진석도 지적했듯이 좌파나 진보 정당 지지율이나 노조 가입률이 10퍼센트 안팎에 지나지 않는 나라에서 그게 가능한 얘긴가.
지은이는 "왜 지식인 다수는 자기가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고 개탄하면서 "나는 그걸 한국 사회 특유의 리버럴 강박증으로 규정"한다고 했다. 진보를 지향하는 건 한국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식인 본래의 보편적 속성 아닌가. 게다가 진보가 홀대당하고 심지어 반역이나 위험 분자로 몰려 질식당한 사회에서 그런 풍토에 저항하거나 거역할 의사조차 없는 자를 지식인이라 할 수 있나?
결국 지은이는 이승만, 박정희의 개발 독재, 고도성장 체제로 복귀하는 게 대안이라 보는가. 이른바 '1987년 체제' 이전, 좌파들이 득세하기 전 침묵의 개발 독재 시절이 한국에겐 최상, 아니면 적어도 차상은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경제 개발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독립 운동 세력은 핍박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몬 민중 봉기 끝에 쫓겨날 정도로 부패했고 무능했고 억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뉴라이트의 호의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인정할 부분도 있지만 석연찮은 구석도 많았던 그의 항일 운동 경력만으로는 집권 뒤의 흠결을 덮기엔 한참 부족하다. 뉴라이트에게 이승만의 결정적인 득점 포인트는 아무래도 그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일등공신이라는 것이겠다. 이는 백범 김구에 대한 지은이의 평가를 보면 확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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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다>는 좌파 리버럴 강박증이 만들어낸 '한국 몰락'의 고질적 '질병'을 5가지로 정리한다. 지식인 사회의 붕괴 위기, 역사 허무주의, 반기업 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 과도한 이념 분쟁(이념 갈등의 내출혈), 그리고 이런 심리를 키우는 근본주의 유전자(DNA)가 그것이다. 이 5가지 지식인들 질병이 "위험한 에너지인 좌파 정서"를 만들어냈단다. "리버럴 지식인의 허위의식이 파편화·주변부화된 채 묻지마 분노, 방향 없는 항변 형태로 자리 잡은 게 좌파 정서"란다.
이 좌파 정서가 잉태한 5가지 "한국병"을 5개의 부로 나눠 다룬 이 책 제2부('역사 허무주의')의 세 번째 주제가 '백범 김구를 존경할 수 없는 이유'다.
지은이는 2007년에 정치 주간지 <여의도 통신>이 국회의원 299명(답변 2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에서 압도적 1위로 김구가 꼽힌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거야말로 "한국 사회 가치의 혼돈을 넘어 거꾸로 뒤집혀진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아마도 이승만이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는 점인 듯하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역사 허무주의'의 출발점이다.
지은이는 백범의 항일 운동은 평가한다. 문제는 해방 이후 그의 행보, 특히 이승만이 주도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거부한 것이다. 이건 지금의 대한민국을 최상 또는 차상의 성공으로 간주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뉴라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독립한 신생국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와 민주화 기적을 이룩한 한국이란 나라의 지금까지의 역사적 경로를 유일하고도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 체제 붕괴는 그런 확신에 주마가편이었다. 좌파, 진보, 리버럴을 종북주의자로 몰며 역사의 훼방꾼이자 내부를 분열시키는 악의 씨앗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들이 이 최상·최선을 인정하지 않고 허물어뜨리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 경제 부국이 되고 상당한 정치적 자유도 확보하는 성공을 거뒀지만 내부 양극화가 진행되고, 남북으로 분단되고,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고 '1000만 이산가족'까지 생겨나고, 아직도 상시적인 안보 위기 상황에서 주변 대국들의 힘에 휘둘리며 눈치를 봐야 하고, 2300만 북쪽 동족이 기아와 정치적 억압 속에 신음하는데도 돕기는커녕 그들과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속에 대치해야 하는 이 비극적 현실을 근대 이후 우리가 걸을 수 있었던 최상의 길이요 최선의 결과라 할 수 있나?
만일 그렇다면, 식민화나 분단, 외세 개입, 전쟁, 정치적 부패에 대한 비판은 쓸데없는 짓이다. 아니 최상을 손상시키는 위험하고 나쁜 짓이 된다. 게다가 이승만이 간파하고 있었듯이 세상이 다 그렇게 되도록 돼 있었으니까 그냥 조용히 눈치나 보며 재빨리 편승해서 한 자리 얻거나 한 몫 챙기는 게 역사에 순응하는 현명한 처신이 된다. 의병도 2·8 선언도 3·1 운동도, 항일 무장 투쟁도, 신채호와 이회영 일가의 우리를 전율케 하는 헌신도 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송병준과 간도특설대의 백선엽과 관동군 박정희의 선택이 장준하, 김준엽, 김돌석이나 허위, 백범, 이봉창, 윤봉길, 안중근, 님 웨일스의 <아리랑>(동녁 펴냄)으로 남은 장지락(김산)보다 현명했다. 이들 의병장이나 조국 광복군이 되려한 일본군 탈영병들, 무장 항일 운동가도 '국제 정세도 모르는 무식꾼 노인' 백범의 경우처럼 "한국 사회 가치의 혼돈을 넘어 거꾸로 뒤집혀진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존경하는 건 좌편향 리버럴 강박증에 감염된 얼빠진 짓이다.
지은이는 백범을 존경하는 사람들을 "다분히 문화 포퓰리즘의 정서, 즉 대중 영합의 혐의를 피할 수 없는" 존재들로 몰아붙이면서, 그 때문에 손상된 건 "5·10 선거를 거쳐 탄생한 제헌국회의 가치이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정당한 평가", "대한민국의 자가당착 내지 공동체 정신의 훼손"이라고 주장한다. 분단되지 않은 한반도, 통합된 민족, 전쟁 없는 나라를 꿈꾸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건 애초에 되지도 않을 걸 고집한 바보짓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을 불행하게 만든 죄악이었다?
과거의 단편적 사실만을 중시하면서 결국 지금에 이르는 경로를 합리화하는 식으로 그 사실들을 꿰어 맞추는 과도한 실증주의적 시각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믿음은 허구라고,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어느 역사학자는 말했다. 후대에 기억되고 있는 사실들은 과거에 발생한 무수한 사실들 중에서 기록이나 구전, 유물로 남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그마저도 자신의 역사관과 능력, 취향,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다시 그 중의 극히 일부만을 취사선택해서 사료로 활용한다. 현실에서 패배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는 후대의 사가들한테서 잊히기 쉽다. 역사는 승자를 위한 기록이라는 경구는 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백범이 살아남고 현실의 승자인 이승만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을 후대에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게 뭘까? 이걸 좌파의 리버럴 강박증이 만들어낸 포퓰리즘 정서 탓으로 읽는 게 정당할까.
지은이는 백범을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분리주의 진영의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연합 대통령에 비유했다. 그런데 이게 좀 이상하다. 그는 오늘날 연방 통합의 거대한 상징인 링컨은 영웅으로 남아 절대 다수의 추앙을 받고 있지만 연방 통합에 반대했던 데이비스는 잊혔다며, 엉뚱하게도 백범이 바로 데이비스와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비스가 연방 통합에 반대해 통합 미국 건국을 부정한 거나 백범이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즉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한 거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연결되는 '건국'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그만 거꾸로 가버린 건가. 백범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지 통일 민족 국가 건국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분단된 조국 반쪽만의 국가 수립엔 반대했지만, 지금식으로 말하자면, 독립된 통합 코리아를 진정한 국가로 생각했고 그 단일 국가 건국을 향해 나아가다 분단 정권 수립 세력한테 암살당했다. 그런 그를 지금의 눈으로 건국 반대자라거나 아무것도 몰랐던 무식쟁이로 몰아붙이는 건 설득력이 없다.
국회의원 다수가 백범을 존경한다고 한 것은 비록 그가 실패했지만 그 뜻이 높고 옳다고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도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설문 조사 결과를 두고 지은이는 "목표와 비전에 대한 합의가 실종된 거대한 아노미 공화국 한국의 실상"이라며 "실로 믿기 어려울 지경이고 디테일을 확인할수록 경악스럽기조차 하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해야 할 사람들은 혹시 그가 이런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는 대상들이 아닐까?
지은이는 이런 뒤틀린 아노미적 상황 때문에 우리 사회에선 "역사 소설이 나왔다하면 꼭 <장길산>이나 <임꺽정>인 식"이라며, "의적이라고 분칠하지만 결국은 사회 주변부의 예외적 세력 이야기"요, 조선조의 <홍길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주류에 대한 도전이나 이탈을 극도로 혐오하는 심리가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문학이 얼마나 될까. 아니 문학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로빈 후드>, <수호지>, <햄릿>, 그가 비판한 영화 <매트릭스>도 타기해야 할 아노미적 상황의 잘못된 부산물인가.
지은이는 최상 또는 차선은 되는 지금의 현실과 그 뿌리를 부정하는 것을 역사 허무주의로 단정했지만, 더 엄밀히 얘기하자면 '지금의 현실과 그 뿌리'라고 하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주류와 그 주류를 길러낸 과거라는 뿌리'라고 하는 게 좋았겠다. 뉴라이트는 '계급'이라는 개념을 극도로 혐오한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우리'는 다 같은 우리가 아니기 십상이다.
백범은 특정 계급이 아니라 가능한 한 더 많은 계급들, 사회 절대다수 구성원들이 바라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뉴라이트는 그런 백범의 단독 정권 거부와 그 정신이 만들어낸 단독 정부 수립 비판 또는 이승만 치적 비판을 역사 허무주의라 주장한다. 그러나 백범이나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역사 허무주의자들일 수 있다.
단정 수립으로 우리는 북쪽이라는 절반 이상의 땅을 잃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잃었으며, 사회주의와 관련된 거의 모든 역사와 문화와 유물을 잃었다. 항일 투쟁의 주력이었을지도 모를 화북과 만주 지역 항일 무장 투쟁의 역사를 몽땅 잃어버림으로써(아니, 거부해버림으로써) 우리는 자기 실체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런 사실들을 부정하거나 애써 눈감고 반쪽만이 유일하며 최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민족 구성원 전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로 지독한 역사 허무주의가 아닌가?
<나는 보수다>가 좌파 리버럴 강박증이 만들어낸 '한국 몰락'의 고질적 '질병' 5가지를 모두 이런 식으로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식인 사회의 붕괴 위기'가 한국의 경제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좌파의 '리버럴 강박증' 때문이고, "집요하고 편 가르기와 독선에 능한" 그들의 "반문화주의와 무교양주의" 때문이라는 험담은 고스란히 보수 우익 몫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진보 세력이 한국의 경제를 비판하는 게 그 엄청난 발전상을 몰라서 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진단하는 건 지나치다. 집요하고, 편 가르기와 독선에 능한 게 좌파 전유물이라 덮어씌우는 건 더 지나치다. 글로벌 차원에서 볼 때 반문화주의와 무교양주의는 오히려 보수 우파들의 전유물에 가까운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문화와 교양이 기름기 흐르는 번지르르한 태깔과 배타적 위압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자기 나라 지식인들에 대한 비하에 가까운 무자비한 평가에 비하면, 오규 소라이, 후쿠자와 유키치, 마루야마 마사오 등 근현대 일본 지식인들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뉴라이트의 과도해 뵈는 예찬은 몹시 낯설다. 오규나 마루야마가 근대 일본 형성에 끼친 영향력을 의심할 순 없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닐까. 오규나 마루야마가 일본적 경계를 벗어나 조선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또는 인류 보편적 가치, 제국주의 일본의 침탈을 당한 조선 등 주변 나라들의 해방이나 제국주의 절대악에 대해 설파하고 저항하고 싸웠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제국주의 팽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야말로 일본 보수 우익들에겐 복음이었겠지만 우리에겐 저주였다. 뉴라이트가 메이지 유신을 찬양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조선의 반면교사이고 자신들이 꿈꾸는 이 땅의 유신에 좋은 선례가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유신은 결국 또 다른 제국주의적 범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당하지 못한 부와 부정한 기업 행태에 대한 비판을 '반기업 심리와 부에 대한 적대감'으로 매도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과도한 이념 분쟁(이념 갈등의 내출혈)'을 몽땅 진보·좌파 세력 탓으로 돌리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아니 미군의 남한 점령 이후 지금까지,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던 짧은 세월을 예외로 한다면, 60년이 넘도록 이 땅에서 득세하면서 과도한 이념 분쟁과 내출혈을 야기한 쪽이 진보·좌파라고 우기는 건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지금도 그 전통이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이념 공세의 희생자는 거의 모두 좌파나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그 가족, 친인척들이 아니었던가.
지은이는 극단이 아닌 온건과 포용과 관용을 높은 가치로 치면서 예컨대 덩샤오핑과 쑨원과 장제스 그리고 그들을 살리고 평가하는 중국이라는 사회, 또 내전의 상처를 가능한 한 덮으면서 과거사 규명과 처벌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스페인이나 칠레 등 중남미의 예를 들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전통을 나무랐다. 하지만, 김구와 여운형과 장덕수와 조봉암과 조용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죽여 버린 편협과 극단의 이념 편향을 마구 휘두르며 과다 내출혈을 부른 게 어느 쪽이었나.
지은이는 또한 이런 모든 심리를 키우는, 조선조 사대부의 '악폐'였던 '성리학적 근본주의 DNA(유전자)'를 물려받은 현세의 후예들이 좌파·진보라고 몰아세웠다. 앞의 4가지 질병을 모조리 좌파 전유물로 규정했으니 그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근거가 모호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이 작위성은 우파 백범을, 오로지 이승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동렬에 놓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지은이가 이 근본주의 유전자를 지닌 변방 순혈주의를 창출한 원흉의 한 사람으로 지목한 우암 송시열은 진보 좌파의 직계 선배가 아니라, 지난 수백 년간 한 번도 지배적 지위를 잃어본 적 없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정신적 뿌리로 보는 게 더 온당하지 않을까.
지은이도 평가한 역사학자 이덕일도 송시열이야말로 서인-노론에서 지금까지 거의 전복 없이 이어지는 유구한 기득권 세력 역사의 한 봉우리로 꼽지 않았나. 진보들 속에서 송시열이 대표했던 조선조 성리학의 근본주의 경향을 발견했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나 그게 왜 진보 좌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억지로 몰아가면, 그 때문에 한국 사회가 몰락과 해체의 디스토피아에 직면했다는 주장도 투정과 엄살에 지나지 않은 걸로 비칠 수 있다. 몰락과 해체에 직면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누백 년 기득권을 누려온 자들의 '계급'적 특권일 뿐이며,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를 세상 변화에 초조해 하고 안달하는 자들의 투정과 엄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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