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두리반의 기적…"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두리반의 기적…"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도시 주인 선언·6] '세입자'의 권리 찾기

마포구 동교동의 한 허름한 건물. 용산 참사 이후 '작은 용산'으로 불리던 이 조그만 칼국수 집이 지난 8일, 531일 간의 긴 농성 끝에 남전디앤씨 측과의 합의에 성공했다. 서로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다양한 활동과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했던 공간. 지금부터 나는 바로 이 곳, '두리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두리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홍대 앞 한 귀퉁이에 위치한 두리반은, 지난 2005년 3월 안종려 사장이 낸 칼국수&보쌈 전문점이다. 주택청약예금을 해약한 것도 모자라 2500만 원의 대출까지 끼고 시작한 두리반은 소위 '대박'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편이자 소설가인 유채림 씨와 함께 행복하게 운영하던 음식점이다. 적어도 2009년 12월 24일 오후 4시, 용역 직원들에 의한 강제 철거가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 철거 직후 두리반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두리반을 포함해 조그만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동교동 167번지는 지난 2006년 공항철도공사로 인해 마포구청으로부터 '지구 단위 계획 지역'으로 지정됐다. 물론 노다지가 된 이 지역을 건설사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GS건설은 유령 회사인 남전디앤씨를 내세워 두리반 일대를 매입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두리반 일대의 11세대 세입자들은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1심 판결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패한 세입자들은 한국토지신탁과 GS건설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 한없이 무력했고, 서로 연대하며 대응하던 이들은 결국 하나 둘 홍대 앞을 떠났다. 그런 세입자들에게 제시된 보상금은 이사 비용 명목의 70만 원, 150만 원, 300만 원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최후까지 남은 두리반의 강제 철거가 '드디어' 자행된 것은 지난 2009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2월 24일 오후 4시, 30명의 용역들은 두리반을 유린했다. 집기를 내다 던지고 주방에서 일하던 여자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두리반 입구를 철판으로 봉쇄했다. 불과 두 시간 남짓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안종려, 유채림 부부는 같은 달 26일 새벽 2시 절단기로 철판을 뜯어낸 뒤 두리반에 진입했고, 그때부터 530여 일에 걸친 긴 농성을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식상한' 철거 스토리다.

그러나 유채림 씨가 속해 있던 인천작가회의의 도움을 시작으로 홍대 앞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까지 농성을 지지하고 나서면서부터 두리반은 여타 철거 관련 투쟁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5월 1일 낮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열린 <51+> 행사는 지금의 두리반을 있게 한 기폭제였다.

▲ 51+ 행사. ⓒcafe.daum.net/duriban
51팀의 음악인을 초청해 5월 1일에 공연을 열어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51+> 행사는, 무려 61팀이 공연을 하고 2500여 명 가량의 관객들이 함께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 행사를 기점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두리반은 음악회, 문학 포럼, 촛불 미사, 영어 모임 등 다양한 주체들에 의한 다채로운 이벤트들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공간으로 우뚝 섰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서도 두리반에서의 하루하루는 위기의 나날들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용역들에 맞서기 위해 하루라도 두리반을 비울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작년 7월에는 한국전력이 두리반의 전기 공급을 끊어 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남전디앤씨 측이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하면 모든 법적 책임을 한전에 물을 것'이라고 한전을 압박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생존의 기초 에너지인 전기를 끊어버리는 한전의 야만적 행동에 분노한 두리반대책위원회는, 마포구청에 항의 방문 및 농성을 시작했고 결국 구청장으로부터 경유 발전기를 얻어내는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며칠 뒤, 박홍섭 구청장은 말을 바꿔 '발전기를 돌릴 연료는 제공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1~2시간 돌리면 몇 만원이 날아가는 발전기를 알아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후 두리반은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제공해 준 태양광 발전기를 평소에 돌리고, 자율기부제를 통해 모금된 약간의 돈으로 꼭 필요할 때만 경유 발전기를 사용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8일. 두리반은 시행사인 남전디앤씨 측과 '이주 대책 및 민형사상 분쟁의 처리', 그리고 '합의에 대한 위약벌 조항'에 합의했다. 그야말로 세입자의 권리를 실현한 위대한 승리였다.

외면당하는 '세입자의 권리'

▲ 전기 공급이 중단된 두리반의 밤. ⓒ김준호
상대적으로 더 드러났을 뿐이지 두리반과 비슷한 위기에 처해있는 지역이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자본이라는 거대 권력 앞에 힘없는 세입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왜 세입자들은 사회적 배제에 맞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가?

두리반 일대의 세입자들이 시행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일 때 내세웠던 법적 근거는 '상가임대차보호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행사가 내세운 근거 역시 상가임대차보호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행사의 승리로 끝났다. 상가임대차보호법 10조의 예외 조항에 따라 '지구 단위 계획'으로 지정된 지역은 임대차보호법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 단위 계획 지역은 용산 참사 이후 개정된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즉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공영 재개발 지역이 아니라 민간이 개발을 주도하는 지구 단위 계획 지역이었기 때문에 세입자에 대한 보상이 법적으로 강요되는 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건물주들로부터 평당 800만 원 하던 땅을 많게는 8000만원에 사들인 GS건설의 유령회사 '남전디앤씨'는 '합법적'으로 해당 지역의 세입자들을 내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리반을 오픈할 당시 1억 원이 넘는 권리금을 지불해야만 했던 안종려 사장에게 제시된 보상금은 고작 이사 비용 300만원이 전부였다.

대한민국의 최상위 법인 헌법은 모든 국민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한다. 당연히 세입자들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만 하는 기본적 권리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맞닥뜨리게 된 건 반인권적 강제 철거뿐이었다. 지역 기반으로 구축되어 온 그들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되었지만, 헌법에 명시된 '인간답게 살 권리'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현 권리 담론이 '이용자'가 아닌 '소유자'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현대 도시 공간에서 '누가 그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누가 그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권리 주장의 절대적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남전디앤씨가 건물주들과의 물밑 협상을 끝낸 뒤 세입자들에게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홍대 앞'이라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나감으로써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 건 토지나 건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해당 공간을 전유하고 있는 '이용자'들이다. 물론 소유한 사람과 이용하는 사람을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토지나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그 공간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이용자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예를 들어 전혀 다른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한 공간의 토지나 건물의 법적 소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공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반대로 그 지역을 기반으로 일상을 전개하는 세입자들은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세입자와 관련된 법적·제도적 장치에 '공간과 사람 간 상호 관계'라는 측면이 간과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공간'은 그 안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사회적 활동이 발생하는 '그릇' 정도로만 간주되어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두리반 얘기로 돌아가 보자. 두리반은 단순히 생업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안종려 사장 내외는 물론이고 그 곳을 이용하고 지나가던 모든 이들과의 감성 교류가 일어나던 '장소'이며, 이는 단순히 화폐 가치로 환산되기 힘든 부분이다. 이처럼 공간과 사람 사이의 소통 관계라는 측면이 우리의 일상에서 굉장히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현 권리 담론에는 이러한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많은 수의 실정법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작동되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그것들은 '가진 자'의 무기로 기능해왔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세입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지배 권력의 모순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스스로의 권리 담론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장될 수 있도록 구체화시켜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끊임없는 사회적 소통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즉 '공간 이용자'나 '공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감'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개념이기에 이를 끊임없이 공론화 하고 소통함으로써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지배 사회는 소통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왔으며, 반대로 세입자들은 이러한 지배 사회에 대항하여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바는 명확하다. "권리 담론을 재구성하고, 이를 요구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여기서 투쟁이란 단순히 '공간을 점령한 채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의 투쟁이 사회로부터 얼마나 처절하게 제압되어 왔는지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눈과 귀를 닫고 있는 지배사회에 '먹혀드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두리반 사례는 우리에게 투쟁의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입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 : 두리반 연대가 갖는 의의

두리반 농성은 (재)개발에 대항해 반대 농성을 벌이며 항의하던 기존의 사례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새로운 주체들이 농성에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두리반 이전의 강제 철거 사례를 보면, 재개발에 대항하는 세력은 세입자와 같은 당사자나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과 같이 뚜렷한 색깔을 갖고 있는 집단에 국한됐었다.

지난 2009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용산 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재개발과 관련된 대립 구도는 항상 '개발 추진 세력 대 전철연'과 같은 식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두리반은 달랐다. 당장 이해관계가 걸린 당사자나 (전철연과 같은) 관련 단체뿐 아니라, 이들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이 판에 뛰어들었다. 작가회의 회원들부터 음악가, 종교인, 심지어 '평범한' 학생들까지 하나 둘 두리반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지금의 두리반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는 거대한 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단순히 '새로운 주체'가 등장했을 뿐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대'는 사회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뭉치면 강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만큼 연대의 힘은 강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순간엔 항상 연대가 있었다. 강제 철거의 위기에 놓인 세입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세입자들이 연대를 통해 그들의 힘을 모았고, 이를 발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참패였으며, 용산 참사의 경우처럼 때로는 '비극적'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몸집 불리기는 가능했으나 다양성 확보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두리반 사례는 연대를 함에 있어 '양'뿐 아니라 '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두리반 농성이라는 판에 참여하는 주체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다양해졌다.

여기서 다양함의 기준은 '각 의제에 대한 사회적 위치'다. 앞서 언급했듯 도시 재개발 문제에 있어 형성되는 대립 구도는 '당사자 대 당사자(혹은 해당 의제에 있어 줄곧 하나의 입장을 표명해온 특정 집단)'다. 이러한 구도에서 나이, 성별, 주소, 직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해당 사안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정해지고 이것은 곧 이들 간의 경합 구도로 이어진다.

이 때 '(사회적 통념상) 이러한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은 자'가 바로 '재개발이라는 의제에 있어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는 자'가 되고, 이들이 연대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 연대는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두리반 농성에 참가하고 있는 작가나 음악가 등은 실제로 두리반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고 또한 강제 철거라는 의제와 관련해 뚜렷한 색깔을 갖고 있지 않던, 그래서 여태껏 '재개발을 둘러싼 주체'로 고려되지 않던 집단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세입자 연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발 업체 측은 '새로운 공격 전략'을 수립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특정 의제에 따라 '하나의 범주'로 묶여버린 집단을 공략하기는 쉽지만 대항 세력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개발 업체 측에서 봤을 때, '세입자 및 전철연'을 상대하는 것과 '세입자와 전철연 그리고 작가, 음악가, 학생 등'을 상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라는 뜻이다. 한편 현재의 두리반이 있을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는 유채림 씨의 답변에서 우리는 다양한 집단 간 연대가 갖는 두 번째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철거 용역들이 우리를 함부로 쫓아내지 못하는 건 (작가회의 소속의)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들(세입자들)만 모여서 이러고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쫓겨났을 겁니다. 그리고 이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음악가들의 공연을 통해 두리반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정치권이나 언론, 각종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저쪽(남전디앤씨나 용역 업체)에서는 더더욱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됐죠." (2011년 4월 6일 유채림 씨 인터뷰 중)

다양성을 기반으로 조직된 연대는 사회적 시선을 끊임없이 이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큰 울림을 갖는다. 대부분의 강제 철거 사례는 사회적으로 잠깐 조명됐다 사라지곤 했지만, 두리반의 사회적 공명은 농성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양한 주체가 두리반 농성에 참여함으로써, 시민들이 두리반 문제를 더 이상 세입자와 개발 업체 간 문제로만 보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주체들은 각자 갖고 있는 다양한 루트와 네트워크를 활용함으로써 두리반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정보통신기술이 여기에 동원되면서 그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더해지기도 했다. 요컨대 연대에 있어 질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더욱더 많이 갖게 됨을 함의하는 것이다.

농성 중인 두리반을 처음 방문한 많은 사람들은 두 번 놀라곤 했다. 먼저 그들의 처절한 생활환경에 한 번 놀라고, 연대의 느슨함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들이 과연 생존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두리반 연대는 느슨하다. 강력한 정신 무장을 한 사람들만 뭉친 공간이 아니라서 그렇다.

요컨대 두리반 사람들의 일부(혹은 상당수)는 '두리반이 철거 된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다. 목숨을 걸고 철거를 막아야 한다거나 철저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은 다양한 가치관과 태도를 가진 서로를 존중하며, 그렇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이 바로 두리반 연대가 갖는 강점이다. 치밀한 계획에 기반을 둔 전략적 투쟁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유로운 판단과 자발적 참여 속에서 '일상생활'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일상 차원의 이러한 실천은 결국 정치적 차원의 실천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제2의 두리반을 위하여

내가 '다양한 집단 간 연대'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는 건 꼭 특정 지역에 개발 압력이 들어오고 강제 철거가 자행될 때쯤이 되어야만 이 연대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이 도시 공간을 전유하며 살아가는 모든 일상 속에서 다양한 그리고 느슨한 연대는 그들의 권리 담론을 형성하고 주장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두리반의 경우는 '홍대 앞이라는 장소 특수성'과 '용산 참사 직후라는 시대적 맥락'이 적절하게 조우하면서 '우연히' 발생한, 그래서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계기야 어찌됐든 우리는 지금 두리반의 연대와 투쟁 방식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있다.

두리반의 문화 정치는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지배 사회의 논리에 균열을 냈으며, 이는 앞서 살펴봤듯 꼭 작가나 음악가 같은 집단이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들의 투쟁을 '우연한 성공'으로 평가절하하면 안 된다. 두리반 투쟁 사례가 보여줬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세입자의 권리 담론을 공론화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두리반 투쟁을 이전의 철거 사례와 아무것도 다를 바 없는 단순 이벤트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말이다.

두리반 연대는 치열한 일상을 통해 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대안 문화를 끊임없이 창출했고, 결국 성공적 결과를 이끌어 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철거 관련 투쟁사에 큰 획을 그었다. 자본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던 세입자들이 두리반이라는 역동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일말의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그리고 제2, 제3의 두리반이 지속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