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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을 의심하는가? 그렇다면 로드릭을 읽어라!"

[프레시안 books] 대니 로드릭의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

'자유 시장' 개혁의 모범생 : 대한민국

대니 로드릭의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제현주 옮김, 북돋움 펴냄)에 나오는 일화 하나. 몇 년 전 이 책의 저자인 로드릭은 어느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나라의 재정경제부 장관을 만났는데 그 장관은 상세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여주면서 최근 자국이 실시한 시장 개혁의 성과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자랑했다.

"(WTO, IMF, 세계은행이 권고하듯이) 무역 장벽, 가격 통제를 없앴고, 모든 공기업을 민영화했습니다. 긴축 예산을 편성했고, 국가 부채 수준도 낮은 수준이고, 인플레이션 현상도 없습니다. 노동 시장은 전보다 유연해졌고, 자본 통제도 없으며, 외국인 투자가 아무 제약 없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을 개방했습니다."

이 나라의 장관들과 대통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주류 경제학계가 요구하는 이른바 '좋은' 경제 정책 매뉴얼을 잘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퀴즈. 이 나라는 어느 나라였을까?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었고 위에서 등장한 장관이 (노무현 정부 시절의)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다 하더라도 독자들은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IMF와 OECD 등의 요구로 표현된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에 가장 충실한 '모범생'이라는 평판을 국제사회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위 일화에 등장하는 나라는 남아메리카의 한 국가이다.

아무튼, '자유 시장'을 목표로 하는 '구조 개혁(structural reform)'을 초지일관 실행한 그 나라는 과연 경제적으로 성공했을까?

로드릭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경제 성장은 미미했고 외국인 투자도 지지부진했다. 빈곤과 불평등은 더 심각해졌다. 한국 역시 1998년부터 IMF와 OECD가 권고하는 방향의 시장 개혁을 수행한 이래 지금까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빈곤, 경제적 불평등, 생태 환경 파괴는 과거 군사 독재 시절보다 더 심해졌다. 로드릭은 이 책에서 묻는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는 틀렸다!

▲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대니 로드릭 지음, 제현주 옮김, 북돋움 펴냄). ⓒ북돋움
로드릭에 따르면 '참여 민주주의'는 좋은 경제 사회 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메타 제도이다. 참여 민주주의는 질 좋은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선진국들이 20세기 중반 이후 안정적 경제 성장과 평등한 소득 분배를 이룩한 것은 '자유 시장' 논리의 덕택이 아니라 수준 높은 '국가 개입주의'와 결합된 '혼합 경제'(mixed economy),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참여 민주주의' 덕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는 시장과 자본은 세계화를 향해 달려가는데 반해 이를 뒷받침할 '좋은 제도'와 '좋은 정치'는 여전히 일국의 민족 국가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253쪽). 로드릭은 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장경덕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에서 찬양한 "세계화라는 황금 구속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격탄을 날린다.

"(세계화라는 황금 구속복에 몸을 집어넣는) 그런 세상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축소되어 정치는 경제 정책의 입안 기구(중앙은행, 재정 정책 기구 등)에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 보장은 없어지거나 민영화될 것이고, 경제 개발이 아니라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로 될 것이다" (263쪽)

"황금 구속복에 열렬히 몸을 집어넣은 결과, 1990년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활동 영역은 프리드먼이 말한 것처럼 축소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것이 아르헨티나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진짜 교훈은 아니다. 진짜 교훈은 정치 지도자가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 민주주의 정치는 국제 자본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265쪽)

'세계화의 독재'가 아닌 '느슨한 세계 연방주의'

로드릭은 '경제적 세계화'와 '정치적 민족 국가' 간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 혼합 경제 체제가 세계적 차원에서 재구축되는 세계 연방주의(global federalism)를 지향하여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민족 국가가 존속하는 가운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제도 장치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 국제적으로 단일한 기준을 마련하여 국가 간 제도를 통일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되, 일반적인 출구 조치(exit schemes), 면책 조항(escape clause)과 제외 조치(opt-outs) 등을 포용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이를 통해 세계 연방주의에 이르기 전의 튼튼한 중간 단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254쪽)

그는 세계 연방주의로 가는 도중의 '튼튼한 중간 단계'를 구축하기 위해 과거 브레턴우즈-GATT 체제에 내포된 '민족 국가 간의 느슨한 세계 연방주의'의 정신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WTO-FTA 체제에 내포된 '세계화의 독재'를 배척하는 새로운 '브레턴우즈 타협안'을 이제부터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국제 시장 체제에서는 민족 국가들이 (따라서 참여 민주주의가) 계속해서 구심적 역할을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도 국제적 시장 규칙 및 기준의 마련에 있어 광범위한 '예외' 조치들(민족 국가들의 요구를 반영하는)이 내재되어야 한다(268쪽).

이에 반해 현재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자유 무역은 수단에 불과하며 궁극적 목표는 경제 성장과 경제 개발"이라고 선언한 WTO 헌장의 정신마저 내팽개친 채, 마치 자유 무역과 시장 개방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인양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로드릭은 비판한다(제8장).

중국과 인도, 베트남도 IMF 모범생?

그럼에도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자유 금융(금융 시장 개방 및 탈규제)의 장점을 찬미하는 이들은 반문한다. "왜 시장 개방의 실패 사례만 말하는가? 중국과 인도, 베트남은 폐쇄적인 계획 경제를 폐지하고 개혁과 개방에 나선 이후 비로소 고도성장을 달성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로드릭은 중국, 인도, 베트남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달성했으며 그것이 수출 지향과 기술 이전 등 '세계화'와 '시장 개방'의 이점을 잘 활용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는 무조건적인 시장 개방 및 세계화의 위험성도 강조한다. 로드릭에 따르면 중국과 베트남은 시장 개방 및 세계화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 노선'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시장 경제를 확대해 나갔다. WTO, OECD, IMF 등 워싱턴 주류가 권고하듯이 '급진적'으로 소유권(사유 재산권) 개혁부터 시작하는 '단일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인도 역시 부분적 시장 개방을 통해 10년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후에야 비로소 (그것도 점진적 방식으로) '구조 개혁'을 시작했다. 한국 역시 196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르는 30년간 '자유 시장' 논리보다는 '국가 개입주의(산업 정책과 국내 시장 보호)'에 의해 수출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급속한 공업화와 소득 향상에 성공하였다.

워싱턴 주류가 권고하는 표준적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의 중국과 인도, 그리고 룰라 대통령 치하의 브라질 경제는 참담하게 파산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로드릭이 지적하는 대로, 보다시피 이들 나라는 오늘날 경제 성장에 성공하고 있다.

오히려 워싱턴 컨센서스가 권고하는 방식으로, 즉 소유권 개혁부터 시작하여 (점진적이 아닌) 빅뱅식 방식으로 '구조 개혁'(시장 개혁)을 감행한 나라들은 하나 같이 저성장과 함께 사회 양극화도 더욱 심해졌다. 1990년대 러시아와 남아메리카가 그러했고 1980년대 이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그러했으며, 더구나 1998년 이후 한국 역시 비슷했다.

장하준이 의심스럽다면, 로드릭을 읽으라!

로드릭은 반(反) 세계화론자가 아니다. 그는 "개발도상국은 세계 시장을 통해서 최신 기술과 저렴한 자본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북한 또는 미얀마식의 폐쇄 경제를 비판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세계화의 위험성을 말한다.

"세계화는 국민 국가의 능력을 제한하여 각종 규제 및 분배 기능을 담당하는 제도를 제대로 확립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세계화의 결과로) 사회 보험의 필요성은 더 커졌지만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데 드는 비용(세금)을 조달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와 비슷하게, (금융 기관) 건전성 규제가 더욱 중요해졌지만 금융 기관들은 전보다 손쉽게 국가 규제를 빠져나간다. (…) 세계화로 얻는 기회가 특히 개발도상국에 중요한 만큼, 이러한 어려움도 개발도상국에는 특히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개발도상국이 가진 제도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253쪽)

그는 세계화의 이점을 잘 이용하되, 위험 요인을 철저히 경계하고 신중하게 통제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무조건적 자유 무역(금융 시장 전면 개방을 포함해)을 반대하되, 그렇다고 무조건적 보호 무역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각 나라와 정부는 자신의 경제 성장 단계에 맞는 '맞춤형 정책 조합'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자유 시장'에 대한 종교적 믿음(워싱턴 컨센서스에 표현된)에 반대하여 적절한 국가 개입을 요구하되, 시장과 무역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로드릭은 장하준의 입장과 동일하다. 그 역시 장하준과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공로에 대한 대가로 레온티에프 상을 받았으며 2007년 미국 사회과학연구회가 수여하는 앨버트 허시먼 상을 받았다.

로드릭은 이미 1997년 저작 라는 책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에 번역된 책,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는 2007년에 출간된 것이다. 그는 최근에는 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다.

아시아의 변방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가르치는 장하준과 달리, 로드릭은 오리지널 미국인이고 미국의 이른바 명문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을 나왔으며 지금은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가르친다. 그의 성장 배경과 활동 무대로 인해 그는 장하준보다 더 미국의 엘리트 관료 및 학자들과의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있다. 그는 미국경제학회 연례 회의에 참석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쟁쟁한 미국 경제학자들 앞에서 발언한다.

더구나 로드릭은 장하준과 달리 신고전파 경제학의 실증주의 방법론을 즐겨 사용한다. 로드릭이 가진 이러한 이점 때문인지, 그는 미국 경제학계에서 장하준에 비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경제 성장론 관련 논문과 서적들은 아직까지는 장하준에 비해 로드릭을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로드릭이 미국인이며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보수이건 진보이건 관계없이 한국의 대다수 학자들과 관료들은 유럽보다는 미국의 학계 및 정계 동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로드릭과 장하준의 세상 보는 눈은 매우 비슷하다. 로드릭은 장하준과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과 사회적 평등 달성에 도움이 되는 '좋은 제도'가 반드시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아니며, WTO와 OECD, 세계은행과 IMF가 권고하는 '천편일률적'인 '구조 개혁'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구)자유주의적 과제를 위해서도 반(反) 자유주의적 국가 개입이 필수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하는 김상조는 최근 한 강연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구)자유주의적 과제가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것은 바로 주주의 권리 등 사유 재산권을 명확히 하는 일과 반경쟁적 제도들(독과점과 경제력 집중 등)을 혁파하는 일, 그리고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에 위배되는 (재벌들과 엘리트 경제 관료 등의) 특권과 특혜,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 법치주의의 원칙과 함께 깨끗하고 투명한 정부를 실현하는 등의 과제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만의 고민이 아니다.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아직 법치주의와 절차적 공정성, 공정 거래와 공정 경쟁 등 (구)자유주의의 정신이 완벽하게 관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구)자유주의는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개발도상국들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적 과제이다.

그런데 로드릭에 따르면 이와 같은 (구)자유주의적 관점의 가장 큰 한계는 자유주의적 시장 제도의 구축을 위해서도 반(反)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필수적으로 선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다는데 있다(193쪽).

로드릭은 건전한 시장 경제의 구축을 위해서 사회 보장 등 복지 국가 제도와 거시 경제 안정성 확보를 위한 제도, 규제 제도, 그리고 재산권 관련 (실은 재산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제권') 관련 제도 등이 필수라고 말한다. 그런데 재산권 관련 제도를 제외할 때, 나머지 제도들은 모두 선진국들의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자가 아닌 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여 구축한 것들이다. 게다가 빅뱅식 시장 개혁을 통해 불과 수년 만에 선진국형 제도들을 급진적으로 도입할 것을 요구하는 '시장 개혁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선진국들에서도 그러한 '좋은 제도'들이 뿌리 내리고 안착하는 데는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렸다.

"여신 시장 및 유동성 공급을 규제하는 중앙은행, 총수요를 안정시키는 재정 정책, 부정부패 및 반경쟁 행위와 싸우는 반독점 규제 기구, 삶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사회 보험 제도, 이런 모든 제도를 시민을 위해 책임지고 운영할 수 있게 만드는 정치적 민주주의-이 모든 제도를 일구어낸 제도적 혁신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유한 나라들에서 견고히 뿌리내렸다" (252쪽)

시장 제도의 구축을 위해서도 반(反) 시장적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좋은 사례가 1997년 한국 등 동아시아의 외환 금융 위기인데,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드라이브로 인하여, 금융 시장에 대한 철저한 규제 점검의 과제(반 자유주의적 과제)보다 외환 금융 시장 개방 및 규제 완화(자유주의적 과제)가 앞서 나간 결과 국가 경제적 재앙이 발생하였다(197쪽).

또 남아메리카와 한국(1998년 이후)의 경우, 복지 국가와 투기 자본 규제(주주 자본주의 규제) 같은 비시장 또는 반시장적 제도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주의적 과제(시장 개혁)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결과, 사회적 양극화와 외환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해외 무역과 시장 개방에 가장 적극적인 선진국들, 특히 유럽 강소국들은 복지 국가와 투기 자본 규제 등 반시장적 제도의 마련을 선결적으로 완수하면서 비로소 시장 개방에 적극 나섰다(200쪽).

시장 개혁을 더욱 철저히 하라고?

로드릭에 따르면 자유 시장 개혁을 신봉하는 이들은 개혁의 실패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충분한 시장 개혁'의 결과로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더욱 철저한 시장 개혁'을 주문하거나, 또는 시장 개혁의 성과는 10년, 20년 뒤에야 서서히 나타나므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118쪽). 우리가 노무현 정부 시절 흔히 듣던 주장들이다.

그렇지만 로드릭에 따르면 경제 성장을 위해 반드시 제도 개혁(시장 개혁)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 개혁과 경제 성장 간에는 명백한 인과 관계 또는 선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237쪽). 경제 성장을 촉발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중국과 인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주어진 기존 경제 제도의 틀 속에서라도 점진적인 사소한 개혁을 통해 일단 경제 성장과 소득 향상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경제 성장과 소득 향상은 제도 개혁을 위한 경제적, 정치적 환경을 자연스럽게 조성하여 순조로운 제도 개혁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247쪽). 제도 변화가 원인이고 경제 성장이 결과가 아니라, 경제 성장과 소득 향상이 원인이고 제도 변화는 그 결과일 수도 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제도라도 나라에 따라서는 똑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사유 재산권 보호를 법률에 명시한 러시아에 비해 그렇지 않은 중국이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들의 권리와 수익을 실질적으로 더 잘 보호했다(194쪽).

그리하여 로드릭은 이 책의 제2부에서 "경제 성장을 위한 제도에 정답은 없지만 원칙은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어떤 제도가 중요한가가 아니라 그러한 제도를 갖추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즉 표준적인 시장 개혁 처방을 빅뱅식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점진적, 실험적으로 접근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203쪽).

그리고 그러한 점진적, 실험적 접근을 위해서도 개발도상국마다 다른 경제 현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국제기구 경제학자들의 천편일률적인 청사진보다는 현지 지식(local knowledge)이 더욱 중요하다고 그는 역설한다(191쪽). 그리고 현지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도 독재 정부보다는 참여 민주주의 정부가 경제 성장과 소득 향상에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214쪽).

누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대니 로드릭은 미국의 주류 학계와 국제기구의 관료들 사이에도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세계화 및 자유 무역 옹호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 세계화 또는 반 자유 무역론자도 아니다. 그는 (장하준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론 세계화와 시장 경제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 및 자유 시장에 내포된 위험성을 어떻게-민족 국가와 참여 민주주의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통제할 것인지에 관하여, 다양한 현실주의적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주주의, 자유 시장과 국가 개입의 적절한 조합에 관해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그리고 '대안적 세계화'를 고민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제3부('세계화, 그 모순을 벗겨라')를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또 이 책의 제1부('경제 성장, 왜 어떤 나라는 성공하고 어떤 나라는 실패하는가')와 제2부('경제 성장을 위한 제도, 정답은 없지만 원칙은 있다')는 성공적인 성장 산업을 육성하려면 어떠한 산업 기술 정책과 무역 통상 정책, 거시 경제 정책 등이 필요한가를 이론적 및 실용적 관점에서 논한다.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금융 시장 개방과 적은 세금 등의 '자유 시장' 원리를 종교적 신념으로 신봉하는 경제학자와 경제 관료들에게는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보편타당한 천편일률적인 표준적 정책 처방이 있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그것다. 그들은 자유 시장이라는 마법의 원리가 적용되기만 하면 높은 경제 성장과 소득 향상이 이루어질 것처럼 설파한다.

그러나 마법의 공식은 없다. 이것이 바로 로드릭이 이 책의 제1부 전반에 걸쳐 주장하는 핵심이다. 모든 제도와 정책은 각 나라의 발전 단계와 경제 상황에 맞게 늘 재수정되고 재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제1부의 제3장 및 제4장은 '산업 정책'(industrial policy)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전제와 정책 조합이 필요한가를 전문가(테크노크라트)적 관점에서 (중요한 이론적 논의와 함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산업 정책은 우리나라에서 '혁신 정책', '신성장 동력 육성 정책', '중소 벤처 육성 정책' 등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구체적 정책들에 관심을 가진 모든 공무원들과 학자들, 정치인들은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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