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이 경제학자와 물리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또 17개국을 여행하면서 방문하고 만난 이들이 대학, 연구소, 기업, 산업 시설의 에너지 전문가들이라면 그녀들의 '세계 일주'는 여느 여행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여행의 낭만과 아련함 그리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 그녀들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뭔가 긴장하게 만들 것만 같다.
실제로 그랬다. 이들의 여행기는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앙골라 앞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석유 시추 시설을 방문하면서 심해로부터 석유를 추출하는 기술에 대해서 놀라면서도 위압감을 표시한다. 이어서 그 방문을 계기로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석유 생산 정점(Peak Oil)'의 문제점, (2010년에 발생한 멕시코 만 사건과 같은) 심해 유전 채굴의 위험성과 천연가스 소각의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 <에너지 세계 일주>(불랑딘 앙투안·엘로디 르노 지음, 변광배·김사랑 옮김, 살림 펴냄). ⓒ살림 |
'세계 일주'니 하는 낚시용 제목을 붙은 편집자의 의도가 어쨌든, 이 책이 서점의 여행기 코너에 놓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여행자와 여행지를 담는 멋진 사진이라도 몇 장 넣어두었을 일이다). 서평을 요청받아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같은 회의 자리에 있었던 우리 연구소의 한 명은 책을 들춰 보더니만 한마디로 단정했다. "공학 책이구먼!" 그의 판정이 맞다면 이 책은 자연과학·공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어 서가에 진열될 것이 분명하고, 몇몇 오지랖 넓은 이공대생에게 발견될 때까지 뽀얀 먼지만을 뒤집고 쓰고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렇게 대접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이 책이 에너지와 관련된 오만 가지 기술에 대해서 소개하는 따분한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을 주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입견 없이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 에너지, 핵융합과 같은 핵에너지 그리고 태양광, 풍력, 조력 등과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 기술을 두루 살펴보고, 에너지 소비를 효율화하고 절약할 수 있는 기술까지 포괄한다. 게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최고의 전문가를 만나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살펴본 생생한 경험과 지식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비록 여행기로는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여행기 방식으로 쓰인 글은 비교적 쉽게 읽힌다. 용기를 내서 도전해볼 일이다. 그리고 두 여성학자가 제기하는 도전적인 질문에 맞서 보는 것도 권한다.
1초에 수천억 원을 날리는 멍청한 짓?
백과사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꼭 읽어봐야 할 내용 하나를 살펴보자. 지난 3월 12일부터 계속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충격과 여파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책의 제2주제인 '신비스러운 자원, 핵에너지 생산의 현재와 미래'를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속한 장들은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인데, 특히 핵융합 발전을 설명하는 부분은 현대 물리학 입문과 같은 초보적인 강의도 제시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 부분의 마지막에는 별도로 용어 설명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주눅 들지 말자. 용기를 내어 책장을 넘겨낸다면 한 과학자의 시니컬하지만, 흥미로운 경고를 들을 수 있다. "이 (핵융합) 시스템이 언젠가 전력 공급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을 겁니다"(114쪽). 스물두 살에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핵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는 천재 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가차 없는 평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자, 국내의 언론들은 일제히 핵융합 발전이 대안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발전소와 같은 "폭발 위험 없는 핵융합 에너지가 미래"(<한국일보> 2011년 3월 30일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핵융합에 필요한 연료인 수소는 바닷물에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어 고갈될 위험이 없고(물론, 또 다른 원료인 삼중수소는 이보다 귀하기는 하지만), 핵발전소와 다르게 핵융합을 통해서는 불활성 물질인 헬륨만 나오기 때문에 온실 기체인 이산화탄소나 방사능 폐기물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핵융합 에너지가 청정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라는 것이다. 에드워드 모스나 이들을 인터뷰하는 두 여성 학자들도 이점을 수긍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이기에 저 천재 물리학자는 저토록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희망과 현실의 격차, 실현 가능한 기술에 도달하기에 요구되는 너무 긴 시간과 막대한 투자 규모 때문이다.
이론적 수준의 구상에서 핵융합 에너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이것을 실현하려는 기술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스스로 낙관적인 입장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는, 프랑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연구원 크리스토프 드보넬은 "핵융합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107쪽). 그는 한국이 참여하여 국제적으로 연구하는 '자기 밀폐 핵융합' 방식에 비해서 10년 쯤 앞설 것으로 여기는 '관성 밀폐 핵융합' 방식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와 전 세계 동료들이 자신들의 방식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에 비춰 봤을 때 너무 소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1기가와트의 전기를 핵융합을 통해서 얻으려면 1초에 10개의 압력 용기에 레이저를 쏘아야 할 것으로 계산되지만, 현재로서는 하루에 1개 정도만을 쏠 수 있는 기술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하루에 86만4000번의 레이저 조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하루에 1번에 머물고 있다는 것.
한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 열핵융합 실험로(ITER, 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 프로젝트가 채택하고 있는 '자기 밀폐 핵융합' 방식은 더욱 안쓰럽다. 미국 MIT에서 연구하는 프랑스 과학자 앙투안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핵융합로인 알케이터(Alcator)를 자랑하며, 그 안에서 형성되는 플라스마의 압력이 "1초만 유지되면 핵융합의 과학적 손익 분기점"을 넘어설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두 여성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1초는 연구자에게는 한 세기에 해당하는 시간"이며, 실제 기록은 "수천 분의 1초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런 알케이터 핵융합로를 1년간 가동시키는 비용은 300억 달러가 필요하며, 그들의 연구가 (운이 정말로 좋아서) 산업에 적용될 수 있으려면 아마도 3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111쪽).
2006~7년경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니 이제 그 실현 시기가 한 5년쯤 앞당겨졌을까? 이 책에서 두 여성 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인류는 무한한 에너지원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117쪽) 핵융합 에너지가 영원히 쫓아가지 못하는 신기루가 아니길.
우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2007년 4월 어느 날, 국회에 '국제 열핵융합 실험로(ITER) 협정' 비준안이 통과되었다. 2006년에 합의된 ITER 프로젝트는 유럽연합(EU)를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중국, 한국, 미국, 인도가 참여하여 프랑스 카다라쉬 지역에 10년간 100억 유로를 투자하여 핵융합로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 번째 실험은 2016년에 시작될 예정인데, 목표는 무려 '15분간'을 가동시켜 투입된 에너지의 열 배를 생산하는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비준안에는 이런 계획이 담겨져 있었다. 한국 정부는 우리 과학자들이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차세대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의 기술을 평가받아 한국도 ITRER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핵융합이라는 미래 에너지 기술에 관한 권리를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비준안을 통과시키면서 한국 정부가 부담하게 될 예산은 1조5000억 원이다. 또 이를 포함하여 수립된 국가 핵융합 에너지개발 기본 계획에 투자할 예산은 2035년까지 모두 4조7000억 원이다. 한해 약 1400억 원 정도가 투자되는 기초연구비의 8%가 단일 프로젝트에 투자되는 셈이었다. 이쯤이면 '돈 먹는 하마'니 하는 비판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한 환경운동가는 '제2의 황우석 사태'라며, 이 비준안 통과를 저지해야 한다며 힘없는 진보 정당, 민주노동당에서 담당 정책을 맡고 있던 내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노동당 의원 10명마저도 기권을 해버렸으니 더 할 말이 뭐가 있나. 계획대로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성공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어마어마한 그 예산을 재생 가능 에너지나 에너지 효율화 기술에 투자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탄식, 심지어 분노까지도 생생히 살아 있으니 말이다. 꼭 성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소식이 있다. 2010년 11월 한국의 국가핵융합연구소(NFRI)는 KSTAR를 가동하여 목표로 하는 상태(H-mode)로 무려 '7초'간 운행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올해 안으로 '10초'간 운행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하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어느덧 2020년으로 완공 목표가 미루어진 ITER에서 우리의 기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니, 제발 '10초' 운행 실험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사이에 지구 대기 중의 온실 기체 농도가 400ppm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은 잠시 잊도록 하자. 1400억 원을 들여 '3초'를 더 연장할 수 있다지 않은가.
이것은 왜 여행기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 이 책이 도착하는 날 우리 연구소의 연구원이 보여준 반응이 좀 충격적이었다. 대학 시절 문학을 전공하다가 환경 운동에 투신하여 오랫동안 기후 이슈를 다루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기후 정책을 전공하는 그가 보여준 '이과-문과'의 완고한 구분선이 그랬다. 비록 기술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어 낼 수 있을 책을 "공학 책"이라고 단언해 밀쳐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워낙 짧은 순간의 반응을 두고 하는 과잉 해석일 수도 있지만.
사실 수많은 기술들이 연구되고 선택되며, 사회에 도입되고 운영되는 것은 사회적인 과정이다. 단순히 기술적 우월성만으로 기술이 자동적으로 선택되지 않다는 것은 (적어도 과학기술학 연구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더 나아가 기술과 사회는 서로를 형성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대안적인 에너지 기술 혹은 에너지 기술의 대안(두 가지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훌륭한 일이다!) 안에 사회적 요소들이 어떻게 녹아들고 있으며, 또 그것이 그 대안들을 어떻게 틀지어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프랑스 계몽주의 정신이 투철한 것으로 보이는 두 여성 학자들의 주된 초점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그 실마리를 찾아내서 읽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두 프랑스 여성 학자들이 에너지 세계 일주를 마무리 지은 곳은 브라질이었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브라질은 바이오 에탄올의 생산 종주국이다. 여러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사탕수수를 이용하여 에탄올을 만들어서 자국의 에너지 독립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나 바이오 에탄올이 세계 식량 위기를 부채질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의 문제점에 대해서 두 여성 학자들은 외면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민감한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의 가치 판단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제를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게다가 나의 관심을 이끄는 관찰도 보여준다. 브라질 정부는 2004년에 '바이오디젤 생산 및 사용을 위한 국가 신생 프로그램(PNPB)'을 시작하면서, 2008년에 경유에 바이오디젤을 2% 혼합하며 2013년까지는 5%를 혼합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정부는 2008년에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2013년의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런 수치만으로는 PNPB에 내포된 사회적 야심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다".
두 여성학자가 주목한 것은 PNPB가 바이오디젤 생산자가 원료의 일부분을 소규모 가족농에게 구매하면 세금을 면제하는 방식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왜?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강조했듯이 "바이오디젤은 노르데스테(브라질 북동부 지방)가 가난을 떨쳐 버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375쪽). 제시되고 있는 구매 조건을 통해서 가난한 가족농의 경제를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브라질에서 바이오디젤이 '사회적 연료'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단다. 빈곤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연료'! 멋지지 않은가? 게다가 '문과와 이과'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고.
앞서 언급한 여러 매력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짚고 갈 일이 있다. 필자 중에 한 명이 물리학 박사이면서도 스스로 버거워 할 정도로 폭넓은 기술 분야를 꽤 깊숙이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의 여러 곳에서 대단히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온다(특히, 상자로 소개한 내용들!). 그 때문에 역자 후기에 스스로 고백했듯이 불문학을 전공한 번역자들에게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 선택에 아쉬움을 숨길 수는 없다. 나의 제한된 지식 범위에서만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양열'과 '태양광'을 잘 구분하지 못한 번역어 선택은 혼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제14장 제목('태양열 에너지는 너무 비싸다?')이 그렇다. 태양열을 통해서 발전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제13장 일광욕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제14장에서 주로 소개한 것은 태양광 전지(solar cell)를 이용한 발전이었다. 그렇다면 번역어는 태양열이기보다는 태양광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열'과 '빛'의 차이를 세심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 기존에 자리 잡은 번역어를 선택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경우도 있다. '수동적 주택(패스브 하우스)', '환경 지문(생태 발자국)', '열·전력 발전소(열병합 발전소)', '냉각 융합(상온 핵융합)'이 눈에 보였다. 이런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번역자들의 노고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사실 내가 몸담고 있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도 작년에 <착한 에너지 기행>(이매진 펴냄)이라는 책을 하나 냈다. 두 프랑스 여성 학자들과 비슷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여행과 에너지(및 기후) 문제를 엮어서 좀 더 친숙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서 보자는 전략. 이 책만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판매 실적을 보였다.
그러나 결코 우리 책도 서점의 여행기 코너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세상의 이런 저런 범주, 칸막이를 넘어서고 뒤섞는다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책 <에너지 세계 일주>가 과연 어느 코너에 자리 잡게 되고, 또 어떤 독자들이 읽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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